하얀꽃.jpg


바람 불고 물 젖은 잿빛 도심의 하늘 아래
가지마다 살 맞대고
하얀 빛 부심 뭉텅이로
피고 피고 또 피고
자꾸 돋으며
아른아른 피어나는
이 세상 어디
저리 하얀 빛무리를 품어 안은 배후가 또 있을라나  
 
하얀 꽃 가득
빽빽하게
나도
저처럼 가뜩
너를 기다리는데
밤이 되면 달빛에
사념으로 소곤대는
하얀꽃이 하얘서
우우
이렇게 꽃무리를 보며 해후해보는
눈자위 글썽이는 애련
그리하여
괜찮다 사랑한다
그 측은한 말 다시 또 돋아 나오고  
 
벚꽃길을 걷다
즐비한 하얀 꽃잎에 걸려
망연자실
하얀꽃이 하얘서
가혹하게 하얘서
아프다
힘없이 아프다
          (사진 : 김동원) 
 
< 시 감상 >
  한 편의 시를 만났다. 낯선 이름에  낯선 시였다. 가만히 되뇌어 낭송하는 내 입술을 타고 탱글탱글한 포도송이처럼 식도를 타고 굴러 떨어졌다. 가슴께쯤 도달한 음절 음절들이 서늘한 슬픔을 안고 내 늑골을 후볐다. 늘 그렇듯이, 이유는 늦게 와도 느낌은 빛의 속도로 왔다.  
 
... 밤이 되면 달빛에
   사념으로 소곤대는
   하얀 꽃이 하얘서... 
 
  이 시를 읽기 전, 내 마음은 무슨 꽃색이었던가. 나는 모른다. 다만, 하얀 꽃으로 하얘졌다는 사실밖에.
  하얀 색은 모든 색을 품는다. 또한 하얀 색은 모든 색의 배경이 된다. 뿐인가. 하얀 색은 어떤 강렬한 원색도 파스텔톤으로 바꾸어 준다.
  빨강은 분홍이 되고, 검은 색은 회색이 되고, 남빛은 푸른 색으로, 진초록은 연초록으로 바뀐다. 하얀 안개꽃 닮은 사람도 어쩌면 이런 연유로 좋아하는지 모른다.  
 
... 이렇게 꽃무리를 보며 해후해보는
   눈자위 글썽이는 애련... 
 
  해후는 약속하고 만나는 만남이 아니다. 우연한 만남, 그러나 알고 있던 인연과의 뜻밖의 만남이다. 예상치 못한 만남이기에 더욱 반갑고 애련하다. 혹여나, 당신은 이런 해후를 꿈 꾸는 님 하나 품고 있는지.  
 
... 하얀 꽃 가득
   빽빽하게
   나도 저처럼 가뜩
   너를 기다리는데 ... 
 
  이런 간절한 그리움, 그대 가슴에 품고 사는지. 하얀 꽃이 하얘서, 물기를 짜고 다 짜 버려 염전처럼 하얗게 소금으로 남은 사무친 그리움. 죽기 전에 단 오분이라도 만나고 싶어하는 그 간절함을 아는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우리 젊어 기쁜 날’속에서.
  왠지 가슴이 쓰려오는 싯귀 한 줄 한 줄이 빗금 그으며 가슴에 홈을 판다. 흙물 튀기며 땅에 홈을 파는 여름날 소낙비처럼.
  시인은 분명 사랑을 해 본 사람이다. 그것도 애달픈 사랑을 해 본 사람이다. 한 줄의 싯귀에 밑줄 긋게 하고 늑골에 가벼운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 시인은 미사여구로 독자를 속이지 않는다.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도 아니고 노련한 문자의 조탁자도 아니다. 그저 진솔할 뿐이다.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시를 알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작가 김동원의 밤벚꽃 사진을 페이스 북에서 보고 채 감동이 가시기 전 스치듯 본 시다.
  그런데 방금 본 밤벚꽃 사진이 마치 맞춤옷처럼 이 시의 이미지와 딱 들어 맞았다. 이 사진과 시의 만남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내 가슴에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나의 상상은 나래를 편다. 별빛 찬란한 하늘 아래 만발한 하얀 빛무리. 밤바람에 하롱대며 시나브로 떨어지는 하얀 꽃잎 꽃잎들. 꽃인가 눈송인가, 가차이 가서 눈여겨 보려는 순간, 저쪽 가지 사이로 꽃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는 그. 놀람움으로 두 사람의 동공은 꽃송이만큼 크게 벙근다.
  이 순간만은 세월의 나이테를 계산하지 말자. 옛연인들은 만남 자체로 시간을 그때 그 시간으로 돌려 버리는 마법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 이쯤에서 상상은 접기로 하자. 그만큼만 해도 행복하다.  
 
... 하얀 꽃은 하얘서
   가혹하게 하얘서
    아프다
    힘없이 아프다. 
 
  하얀 꽃은 가혹하게 하얗다. 소금보다 짠 하얀 그리움도 가혹하리만치 하얗다. 하얗게 지샌 밤은 또 왜 그리도 많았던가. 김동원의 월하미인 밤벚꽃과 송영신의 하얀 꽃이 나를 먹먹하게 한다.이유는 모르겠다. 느낌만이 답해 줄 수 있으리.
  오늘 밤 또 하얗게 밤을 지새야 할 것같다. 벚꽃은 봄이면 ‘피고 피고 또 피어’나는데, 만나면 해 주고 싶은 말 ‘괜찮다,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쯤이면 전해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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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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