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에세이 - 모래톱 야생화

2020.04.08 10:17

서경 조회 수: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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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상 사태 이후 20일만의 외출이었다. 그것도 산책하는 마음으로 떠난 힐링 외출이라 속이 트였다.
   새벽부터 주룩주룩 내리던 비는 오다 말다 하며 차창을 두드린다. 이문세의 ‘옛사랑’과 ‘광화문 연가’가 아늑한 평화를 준다.
   도착한 곳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는 헌팅톤 비치다. 5년 전, 내가 첫 하프 마라톤을 도전했던 곳이라 반가웠다.
   한적한 거리엔 고요가 안개처럼 내려 적막했다. 평시라면 북적거릴 거리에 소리란 소리는 다 사라졌다. 가끔 마스크 한 사람 몇몇이 전장 같은 거리를 풍경처럼 스쳐 갔다.
   노란 줄을 쳐 좋은 금지 구역을 피해 바닷가 가까이 섰다. 모처럼 바다를 좀더 가까이 보고 싶어서였다.
   오늘따라 파도도 숨 죽이는지 높지 않은 모습으로 출렁댄다. 밀려 왔다 밀려가는 흰 파도가 감성을 자극한다. ‘파도는 어디서 오나... 어디로 사라져 가나...’ 옛날에 읊조리던 노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모래톱엔 누가 찍어 놓고 간 발자국인지 무수한 발자국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이 세상에 살다 간 흔적의 발자국이다. 미처 의식조차 못했거나 혹 남기고자 했던 모래 위 발자국을 자연은 친절하게 따라 와 지워줄 게다.

   마치, 흰 눈 위에 새긴 새벽 발자국을 지우던 함박눈처럼. 파도이거나 모래 위를 스치는 바람이거나 하얀 눈은 그들의 책무를 잊은 적이 없다.
   모래톱에 머물던 나의 눈길에 민들레만큼이나 샛노란 야생화가 눈에 들어 왔다. 무겁게 갈아 앉은 회색 풍경에 명도 높은 노란 야생화는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난 눈을 반짝이며 노란 야생화와 눈맞춤했다.

    늘 그렇듯이, 야생화는 더불어 함께 피어 있었다. 군집의 아름다움이다. 홀로 피는 도도함보다 군집의 아름다움은 얼마나 고귀한가.
   뿐인가. 야생화의 삶이 늘 그렇듯, 그들의 영토는 척박하다. 내가 보고 있는 노란 야생화도 모래톱에서 생명을 뽑아 올린 기특한 꽃들이다.
   그들은 어떻게 이렇게도 메마른 모래톱에서 고 작은 생명을 뽑아 올릴 수 있었던 걸까. 생명에 대한 간절함과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터이다. 그들은 사막의 선인장처럼 제 스스로 물기를 머금고 풀풀거리는 메마름을 견뎌 내었을 게다.
   인생이란 사막을 횡단하며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 뉘 있으랴. ‘왜 하필 나인가!’하는 원망 대신, ‘그들 중 한 명일 뿐이야!’하는 대범함을 가진다면 벽같은 절망 속에서도 우리는 담쟁이 손으로 그 벽을 오를 수 있다.

   담쟁이 잎이 그러하듯, 흙 한 줌 없고 물 한 방울 없는 죽음 같은 벽을 오를 때 다른 담쟁이 잎 함께 그 벽을 넘는다. 이 세상이 무인도가 아닌 바에야, 내 곁엔 늘 함께 피는 노란 야생화가 있고 같이 벽을 넘어주는 담쟁이 이웃이 있다.
    오늘은 비 내려 메마른 모래톱을 적셔 준다. 기특하다는 듯이, 수고했다는 듯이.
내 인생에도 알게 모르게 내려주신 주님의 은총이 있었다.
   죽음같은 절벽 앞에 섰을 때, 야생화 한 송이나  담쟁이 한 잎보다 더 귀한 내 목숨을 생각하자. 그들의 귀한 생명력을 배우자. 가슴을 열고 눈 크게 뜨고 보면 세상은 의외로 따스하고 안온하다.
   지금 지구촌 곳곳에서 아슬아슬한 걸음으로 코로나 19 징검다리를 건너 가고 있다.
우리는 분명 냇물 건너 저 편에 닿을 게다. 다만, 시간이 느리게 갈 뿐 기어이 건너갈 터이다. 모든 건 지나간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징검다리 건너 갈 때, 제 등을 밟고 가라며 등을 내미는 징검돌도 처처에 있다.
대구 코로나 사태에서 보듯이, 전국 각처에서 의료인들이 몰려 오고 자원봉사자와 도네이션 차량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걸 우리는 보았다.
    이미 여러 의료인들이 예수님의 오상을 함께 받는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자신의 건강을 잃거나 목숨을 내 주었다. 푸르른 하늘에 혼자 떠돌던 구름도 검은 회색빛 하늘이면, 서로 불러 함께 어울린다. 어려운 시간일수록 빛나는 것이 이웃 사랑이요 휴머니즘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던 산책인데, 뜻하지 않게 노란 야생화를 통해 또 하나 아름다운 주제를 배웠다.
   창밖엔 비 주룩주룩, 창 안엔 안온한 평화를 주는 이문세의 노래가 흐른다. 오늘 하루도 먼 훗날엔 추억으로 떠오를 한 편의 소묘가 되겠지.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 눈 앞엔 가없이 펼쳐진 헌팅톤 비치 수평선과 노란 야생화가 어른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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