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수필 - 보름달과 가로등

2020.05.03 15:37

서경 조회 수:48

보름달과 가로등.jpg
 

하늘에는 보름달
거리에는 가로등 
 
걸인마저 잠이 들고
오가는 이 없는 밤 
 
둘이는  친구가 되네
비밀스런 친구가 되네                          (사진 :김동원) 

 

달밤이었다.

둥그런 보름달이 두둥실 뜬 그런 밤이었다.

5번 프리 웨이를 타고 LA를 향해 북진 중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길을 잘못 들었다.

캄캄한 밤, 인적없는 그리피스 팍을 뱅글뱅글 돌며 무섬증이 들기 시작했다.

이리 가면 길을 막아 놓았고 저리 가면 산 쪽으로 올라 가는 길이었다.

심장은 조여오고 몸은 경직됐다.

얼마나 헤맸는지 밤 11시가 넘었다.

어찌어찌하여 돌아 나오니, 코리아 타운이 아니라 다운타운이다.

그 많던 인적은 어디로 사라졌는고.

포격이 멎은 전장과 같은 고요가 몸서리치도록 나를 긴장시켰다.

검은 빌딩이 괴물처럼 치솟고 철문 내린 가게들이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괴괴한 거리.

그 속에 움직이는 물체는 오직 하나, 나를 태운 토요타 프리우스 브이 뿐이다.

말로만 듣던 교교한 달빛이었다.

하늘에서 부터 드리운 은빛 시폰같이 달빛은 거리에서 하늘댔다.

그 달빛 끝줄기에 박스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빈 박스들이 길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게 기이했다.

그것도 질서정연하게 나란나란했다.

눈 여겨 보니, 박스 끝에 공같은 동그란 물체들이 나와 있었다.

세상에! 그건 사람 머리였다! 마치, 기간단총이 거리를 훑고 간 뒤에 죽어 널브러져 있는 시체와 진배 없었다.

러나 그건 죽은 시체가 아니라, 고단한 하루를 접고 잠든 홈리스 무리였다.

로스 앤젤레스 스트릿과 4가에 노숙자를 위한 쉘터가 있지만, 모두를 수용하긴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거리를 헤매다 거리에서 잠든 ‘노숙자’였다.

잠자는 그들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으나, 눈 감고 잠든 그 표정만은 평안하리라. 그

들의 이마를 가만히 쓰다듬고 있는 은빛 달빛.

오래 전에 그들의 이마를 짚어 주었을 어머니 손길을 생각하니 알싸한 연민이 밀려 왔다.

한 때는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아버지였을 그들의 개인사.

우리는 모르지만, 보름달은 다 안다는 듯이, 그들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가만가만 다독여주고 있었다.

한낮의 왁자한 소리도 거둬 가고 부산한 발걸음도 거두어 간 다운타운의 밤거리.

전장과 같은 고요와 긴장 속에 홈리스는 은빛 달빛을 받으며 고단한 하루를 그렇게 마감하고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순간도 그때의 오싹함과 홈리스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던 은빛 달빛이 오버 랩된다.


(2013년 시 작성/ 2020년. 5월 산문 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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