꺾이는 길목에서

2011.04.16 01:55

지희선 조회 수:616 추천:102

                  꺾이는 길목에서

                                                        
   어머니가 허리수술을 받고 요양 중이라 간병인겸 대화자로 나섰다. 올 들어 재택근무로 돌아선 나는 진종일 컴퓨터와 씨름하다가 주말마다 어머니를 뵙는 게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기차를 타고 가다보니 눈도 마음도 시원해서 좋고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와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어 일석이조다.
   아들 둘 딸 넷 중에 둘째딸인 나는 유난히 어머니와 친했다. 언니는 대학을 따라 일찍 집을 떠났고, 동생은 나보다 먼저 결혼을 했기에 집에 남은 나는 자연스레 어머니와 벗이 되었다. 결혼을 하고 난 뒤에도 늘 어머니 곁에 살다가 미국까지 따라와 산 지가 어언 30년이다.
   어찌보면 어머니와 나는 추억의 통로를 함께 걸어 나온 동행자이다. 같은 시간과 공간속에서 보낸 날들이 많았기에 추억 또한 주저리주저리 열린 포도일 수밖에. 요즘 어머니는 허리 아픈 것도 잊고 옛이야기를 하시기에 바쁘다.
  “니 생각나나?” 하고 시작하실 때가 있고, “니는 내 살아온 거 다 알끼다”하며 가벼운 한숨과 함께 시작하실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도 먼 옛길을 달려 그날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 가난했지만 가난을 못느끼고 산 시절. 어머니가 있고, 아버지가 있고, 할머니, 삼촌, 언니, 오빠, 동생들이 있는 그 가족 풍경이 사뭇 그리워지곤 한다.
   오늘은 이불을 꿰매는 나를 보더니, “니 까딱하면 욕지 가시나 될 뿐 안했나?”하고 말을 꺼내셨다. 욕지 가시나. 그건 어머니와 나만 아는 비밀스런 이야기다. 언니와 동생들은 그 내밀한 이야기를 모른다.
   내가 너댓살 쯤 되었을 때, 통영(충무)에서 살 때 이야기다. 우리 옆집에 ‘점쟁이 할머니’라고 불리우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우리 할머니 친구로 직업상 이 섬 저 섬 떠돌며 점도 치고 굿도 해주는 할머니였다. 한바퀴 휙 돌고 오면 으레 우리 집에 와 할머니한테 그의 여행담을 늘어놓곤 했다. 나는 그 이야기가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눈을 반짝이며 들었다. 그런 나를 그 할머니는 매우 예뻐하셨고, 과자도 혼자만 먹고 가라고 종종 당신 집으로 불러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점쟁이 할머니가 청천벽력 같은 말을 내게 했다. 우리 진짜 엄마는 욕지섬에 있다고. 지금 있는 엄마는 내 진짜엄마가 아니라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내 ‘진짜엄마’를 찾아가고 싶었다. 꼬마치고는 그 감정이 너무나 절실했고 사무쳤다. 나는 눈만 뜨면 달려가 그 집 창살에 매달려 진짜 엄마한테 데려다 달라며 졸랐다.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 이주일...... 나의 보챔은 끝날 줄 몰랐다. 급기야 나는 들어 누워 버렸다.
   며칠 후, 어른들끼리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나는 그 점쟁이 할머니를 따라 우리 ‘진짜엄마’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엄마는 울었지만, 나는 여행가는 기분으로 마냥 들떠 있었다. 몇 개의 섬을 지나고 푸른 파도를 기세게 가르던 배가 선창가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 자그마하고 단아하게 생긴 낯선 아줌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마, 내가 니 세 살 때 통영 장에서 안 이자뿐나”하며 마구 얼굴을 비벼댔다. 큰 양옥에 식모까지 있는 부잣집이었다. 그날 저녁은 닭고기 반찬에 거나하게 먹었다. 이튿날 아침 점쟁이 할머니는 떠나고 나만 남았다. 식모언니는 헝겊인형을 만들어주며 내게 살갑게 대했다.
   그런데 묘한 일이었다. 하루, 이틀, 사흘 째 되는 날 새벽 양아버지 손에 끌려 고구마밭을 돌던 내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어머니 얼굴이 자꾸만 일렁거렸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그때부터 배도 아프기 시작했다. 차마 집에 데려다 달라는 말은 못하고 배가 아프다며 시도 때도 없이 울었다. 한밤중에 약국을 찾고, 요강에 앉히고, 죽을 쑤어 먹이고 갖은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저 나는 배가 아프다며 울기만 했다. 실상, 나는 배가 아픈 게 아니었다. 그냥 서러웠다.  한 방에서 한 이불 잡아당기며 사는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이 부잣집에서 나는 왜 엄마가 그토록 보고 싶은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눈치를 챈 양부모는 인연이 없나보다며 나를 엄마 곁으로 보내주었다. 포물선으로 된 부둣가 길을 따라 바람같이 집으로 달려갔을 때, 아 그때 우리 어머니도 선창가를 향해 울고 계셨다.
   오후 두 시만 되면 들어오는 욕지섬 배를 보며 눈물로 지샌 내 젊은 어머니. 이제는 여든 셋의 노파가 되어, 희부염한 새벽같은 눈빛으로 그날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겨있다. 우리 어머니의 여명 기간은 얼마나 될까. 그리 멀지는 않을 것 같다. 어머니 돌아가시면 나는 누구랑 이런 추억담을 나눌 수 있을까. 아무도 없지 싶다. 추억이란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니까.
   어머니가 보건센터에 가고 나면, 나는 홀로 남아 종종 어머니가 했을 몸짓을 해보곤 한다. 잠시 여든 셋의 어머니로 돌아가 보는 것이다. 창에 기대어 선다. 그리고 무심히 흘러가는 차량을 응시한다. 낮은 낮대로 무심하고 밤은 밤대로 서럽게 만들었을 그 시간과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어머니의 마지막 정착지인 노인 아파트 310호. 전화벨은 울리지 않고, 유일한 벗이라곤 어항에서 헤엄치는 금붕어 몇 마리뿐, 고독이 감도는 이 공간에서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창에 기대어 생각에 잠기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창에 기대어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돌아오지 않을 유년과 찾아오지 않는 자식들을 기다리며 입버릇처럼 ‘홀로서기’를 외고 계시지나 않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면 어머니의 고독이 뱀처럼 감겨온다. 무엇이 바빠서 이토록 어머니를 홀로 내버려두었던가. 새삼 자책감이 든다.
    어쩌면 남달리 어머니와 내가 밀착한 것은 양녀로 보내려고 했던 죄책감과 엄마를 버리고 떠났던 나의 죄책감이 맞물려 더 가까워졌는지도 모른다. 꺾이는 길목에서 한 사람은 오른쪽으로 또 한 사람은 왼쪽으로 갈 뻔했던 그 일을 떠올리며 인연에 대해서 운명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가 많다. 어머니와 함께 하는 요즈음, 나는 다시 유년의 어린 딸로 돌아온 느낌이다. 시냇물이 흘러 강이 되고 바다가 되었다가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되돌아오듯 다시 한 생을 사는 기분이다. 몸의 건강을 돌보는 간병인이 되기보다 대화를 나누는 벗이 되리라 다짐해본다. 창밖 가로수에도 어느새 봄의 빛이 완연하다. (4/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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