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마을을 지나며(미주문학 2012년 봄호)

2012.01.16 03:53

지희선 조회 수:362 추천:88

   낯선 마을을 지나며

                                                                  
   기차에 오른다. 버릇처럼 테이블에 책과 물병을 놓고 차창에 이마를 기댄다. 기차 따라 흐르는 풍경이 오늘 따라 더욱 평화롭다.
   푸른 하늘은 흰 구름과 적당히 몸을 섞어 추상화 한 점을 그리고, 먼 길을 달려온 산들은 자기 고향인 양 터를 잡고 편안히 누워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 날카로움마저 세월에 마모되어 둥글어졌다. 마치 마음씨 좋은 아짐 엉덩이처럼 푸짐하고 부드럽다. 그 아래로는 숲 사이로 드문드문 들어찬 빨간 기와집들이 이국의 그림엽서를 연상케 한다.
   오가는 사람도, 드나드는 사람도 없이 집은 정물처럼 고요하다. 움직이는 건 내가 타고 가는 기차와 강물처럼 흐르는 내 생각뿐. 좋은 풍경화 한 점처럼 제 구도를 잘 잡고 있는 바깥 풍경을 보니, 자연스레 ‘자연과 인간’에 대해 생각이 머문다. 사실, 자연은 한 번씩 용트림을 하지만 화를 자주 내는 편은 아니다.
  하늘만 봐도 그렇다. 구름이 지나가든, 해가 뜨든, 달이 뜨든, 별이 뜨든 모두 큰 품으로 받아들인다. 구름과 해, 달과 별은 마치 하늘의 부분집합인 양 잘 어울린다. 태양이 뜨거우면 구름이 슬쩍 가려주고, 달이 외로우면 별꽃이 돋아 반짝반짝 사인을 보낸다. 친구가 여기 있다고, 염려 말라고. 심지어, 해와 비가 같이 있고 싶다고 떼를 써도 하늘은 같이 있어도 좋다고 중재해준다. 그 결과, 생기는 건 천둥 벼락이 아니라 아름다운 무지개라는 것을 제 스스로 알게 한다.
   뜻이 다르다고 이분법으로 나누고 선을 그어버리는 것은 우리 인간만이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큰 자와 작은 자, 배운 자와 못 배운자, 남편과 아내, 선생과 제자, 선배와 후배, 상관과 졸병....... 처처에 수직선을 그어두고 선을 넘으면 큰일이나 날 듯 법석이다.
   자연엔 선이 없다. 수평선은 사람이 지어낸 이름일 뿐, 가까이 가면 선은 보이지 않는다. 지평선도 마찬가지다. 더더구나 수직선은 생각조차 안 하고 있다. 동그란 지구도 원 안에 들어있는 지구본이 아니지 않는가. 지구는 한 별일 뿐, 애초엔 국경마다 지방마다 선을 그어두지 않았다. 철책을 치고 담을 쌓고 유리조각까지 박아둔 건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어리석은 몸짓이다.
   자연은 묻는다. 왜 서로 사랑하지 않느냐고. 자연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염려한다. 정말 왜 이러느냐고. 참을성 많은 자연도 때로는 화를 낸다. 한 번씩 소낙비를 내리고, 번개를 치며 사인을 보낸다. 인간은 우산을 쓰거나 움찔하며 이불을 덮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자연은 다시 마음을 진정하고 원래의 평화로운 모습으로 돌아간다. 무지개를 보여주고 꽃도 피워주고, 열매를 맺게 하고 구름도 두둥실 띄워준다. ‘이쯤이면 되겠지.’ 하고 다시 한 번 믿어보는 것이다.
    그래도 아니다 싶으면 더 확실한 사인을 보낸다. 화산을 일으켜 화산재로 덮기도 하고 용암으로 녹여버리기도 하며, 지진으로 지축도 흔들고 쓰나미로 싹 쓸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자연은 여전히 풀기 어려운 암호인가. 그때부터 인간은 엉뚱한 시비로 바빠지기 시작한다. 인재니, 뭐니 하며 책임전가하기 바쁘고 애민 사람 몇 명만 쫓아내는 걸로 마무리 한다. 행복한 인생을 담보로 하는 종교는 한술 더 떠, 벌 받아서 그렇고 죄가 많아 그렇다고 겁을 준다. 종은 종 스스로를 위해 울지 않는다. 종소리를 듣는 사람은 많으나 종 치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하물며 제 스스로 아픔을 감내할 종은 누가되어 줄 것인가.  
   요즘들어 교내 폭력이 위험수위에 있다고 아우성이다. 그 해법을 가만히 보면 징계나 강력한 처벌법이 주를 이룬다. 누가 누구를 벌한단 말인가. 질서유지라는 이름으로 강행되는 처벌법도 일종의 폭력이 아닐까. 문득 팽이와 팽이채가 생각난다. 모든 것이 수직적 상하관계가 되어 한 사람은 팽이가 되고 한 사람은 팽이채가 된다. 한 사람은 내려치고 한 사람은 비명을 지른다. 마치 포악한 지주와 노예처럼. 학교 폭력도 그렇고, 군대폭력도 그렇고, 가정 폭력도 그렇고 모두가 잔인하고 끔찍하다.
   폭력은 사랑의 결핍에서 나오고 교육의 부재에서 나온다. 폭력에 ‘관례’라는 것은 없다. ‘관례’라서 계속해 오고 눈감아준다는 얘기는 얼마나 비겁한 일인가. 나는 모든 폭력의 해법을 ‘사랑’과 ‘교육’에서 찾기를 원한다. 문제의 해법은 중징계나 강력법이 아니다. 인력과 예산만 더 낭비할 뿐이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학교에서는 선생이, 기관에서는 상관이 제 스스로 조금이라도 우위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면 먼저 사랑을 베풀 일이다. 여기서도 ‘기다림의 미학‘과 ‘느림의 미학’이 필요하다. “선생님이 나한테 단 한번이라도 심부름을 시켜주었던들 오늘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절규하는 한 영혼의 이야기를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한다.
   목소리 하나만 낮추어도, 석고상 같은 얼굴에 미소만 살짝 지어도 세상은 달라질 수 있다. 이름만 한 번 불러주어도 그 존재감은 상승된다. 시험과목에 쫓겨난 윤리 도덕 시간도 돌아와야 하고, 영어에 빼앗긴 국어도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모국어를 모르는 아이를 ‘고아’라고 하는 말이 한 시인의 외침으로 끝나선 안 된다. 영어를 잘 하고 외국어를 잘 하는 것이 성공의 바로미터가 아니라 모국어를 잘 하는 것이 큰 자랑이 되어야 한다. 고운 말, 바른 말 한 마디가 가정을 바꾸고 학교를 바꾸고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촛불 하나가 온 방을 비추고, 몽당연필 한 자루로 책 한 권을 다 쓴다는 시인 엘리자벳의 <A Little>이 사랑을 받는 것도 작은 것이 주는 힘 때문이 아닐까. 내가 가진 것이 시간이든 돈이든 건강이든 재능이든 조금만 나누어도 밝은 세상은 온다. 이기심과 탐욕에서 to have의 삶을 살아왔다면 나누는 삶의 내가 되는 to be의 삶으로 변화하는 삶이야말로 우리의 살 길이 아닌가 싶다.
   여기저기서 자성의 소리가 들려오고 녹색 운동이 일어나고 재능 봉사가 힘을 받고 있으니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간은 희망에 속아 산다고 하지만, 다시 한 번 주먹을 쥐어보는 마음, 그 마음 때문에 새해를 맞으면 마음이 벅차오르는 거 아닐까.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은 나이가 되어서인가. 정몽주의 단심가보다는 이방원의 하여가처럼 두루두루 얼싸안고 가고 싶다. 나는 어떤 것을 나누며 to be의 삶을 살까 ‘고민’해 봐야겠다. 지금 테이블 위에 얹혀 있는 조광제 선생의 <<비상열쇠>>가 조금은 그 답을 줄 것 같기도 하다.
  차창 밖으로 흐르는 풍경은 여전히 평화롭고 고요하다. 앞으로 어떻게 사는지 묵묵히 지켜볼 심사인가 보다. 어찌 보면, 자연도 인간에 대한 희망에 속아 살아온 듯하다. 어느 새 기차가 도심 속으로 들어왔다. 강물처럼 흐르던 생각도 이쯤에서 접어야겠다.  (01-15-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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