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 속에 사는 분

2008.02.24 07:57

지희선 조회 수:616 추천:76

                             ‘영원’ 속에 사는 분

   <산다는 것은 아름다움과 만나는 것이다/나이 든다는 것은/더 깊은 아름다움과 만나는 것이다/하늘에 별이 뜨고/땅에 꽃이 피고/이웃에 문소리가 나고/창문에 불이 켜지고/하늘과 땅에 흐드러진 보석들을/시의 꽃바구니 속에 담아보는 것은/얼마나 복된 일인가.>        -이숭자 시인의 제2시집 ‘새벽하늘’ 서문에서-
  
   칠월 마지막 주일 오후, 미주 문단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원로 시인 이숭자 선생님을 뵙기 위해 집을 나섰다. 이미 글 문을 닫고 양로원에 계신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때때로 대소변을 받아낼 정도로 병약해졌다는 말은 처음이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이 날 따라 바깥 날씨는 눈부시도록 화창했다. 이 화창한 날씨를 선생님이 다시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선생님은 캘리포니아의 따뜻한 날씨와 바다를 무척 사랑하셨다. 오죽하면 이십 여 년간 산 동부를 버리고 서부로 옮겨오셨을까. 특히 바다를 사랑한 선생님은 베니스 비치에 보금자리를 정하고 소녀처럼 행복에 겨워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백사장과 무리지어 날아오르는 갈매기 떼, 에메랄드 빛 파도는 선생님의 시에 있어 즐겨 사랑받던 소재였다. 해변을 따라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이국의 풍경을 물씬 풍겨주던 팜트리 가로수는 또 얼마나 아꼈던가.
   베니스 비치에서만 삼십 년 가까이 사셨으니, 양로원으로 옮기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린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좋은 시설에 스물 네 시간 상주하는 간호원과, 식단에 따라 만든 영양식을 주는 고급 양로원이라 해도 양로원 자체를 거부했다. “고급 양로원이면 뭐하누. 양로원은 양로원이지. 베출러에 살아도 내 집이 최고지”하며 고집을 부렸다. 선생님의 완강한 반대에 동부에서 날아온 외아들도, 일터를 팽개치고 온 조카도 번번이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카펫 바닥에 쓰러진 채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는 걸 방문 갔던 봉사자가 발견하게 됐다. 그녀는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가족과 상의한 뒤, M 양로원으로 서둘러 옮겼다. 유료 양로원이라 시설이 좀 괜찮을 거라는 기대와, 무엇보다도 스물 네 시간 상주하며 돌봐줄 사람이 있어 안심이 되었다고 한다. 결국 M 양로원은 선생님께 있어 새 보금자리이자 마지막 정착지가 됐다.
   바다와는 거리가 먼 도심 속의 M 양로원. 선생님은 이제 그토록 사랑했던 베니스 비치와도 영원히 이별해야 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더 깊은 아름다움과 만나는 것’이라고 노래하시더니, 결국 ‘더 깊은 아름다움과의 만남’이란 ‘이별의 미학’이었던가. 생각해 보면, 산, 강, 바다, 별, 달, 꽃....... 이 모든 자연 중 어느 한 가진들 그 분의 시심을 피해갈 수 있었으랴. 수 백 번 열리고 닫혀도 무심히 들렸던 이웃의 문 여닫는 소리, 밤이 되면 으레 켜지기 마련인 어줍잖은 방안의 불빛 하나도 그 분에게는 빛나는 시어였고 버릴 수 없던 소재였다. 과학에서나 쓰일 법한 화학 기호까지도 그 분의 손을 거치면 아름다운 시어로 되살아나곤 했다. 그것은 인생과 그에 속한 모든 사물을 사랑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귀한 선물이었다.    
           선생님은 1954년에 첫 시집 ‘호심의 곡’을 내고, 오년 뒤인 1959년 미국 동부로 건너가 성 엘리자벳 대학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곧이어 커네티컷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끝낸 뒤 소셜 워커로서 이민 생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 와중에서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명문 하바드생으로 길러냈을 뿐만 아니라, 손자, 손녀까지도 하바드 가족으로 만들어냈다.
   자신의 삶과 자식 농사에 오로지 시간을 바친 삼십 년 세월 동안, 생명 같던 시도 고달픈 이민생활 속에 묻혀버렸다. 급기야 ‘한국 여류 시인 101인집’에 그는 작고 시인으로 분류되어 나온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피 토하듯 일성을 가한다.
   ‘고국을 떠난 서른 해에/이미 그 땅에선/‘작고 시인’으로 나뉘었다는데/......친구여/내 여기 살아 있소/돌멩이 같이 살아 있소.’
   이 일을 계기로,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은 살아있어도 결국 ‘작고 시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 느꼈다. 선생님은 자리를 털고 분연히 일어섰다. 생활에 밀려나 있던 시의 화산이 굉음을 내며 폭발하기 시작했다. 불후의 시집인 ‘새벽하늘’과 ‘국경의 제비’에 이어, ‘사랑의 땅’과 ‘빛 따라 어둠 따라’가 용트림을 하며 연이어 뿜어져 나왔다. 시인이면 시인이지, 여류시인은 무엇이며 노시인은 무엇이냐며 일성을 가한 것도 이때였다. 선생님은 시인이란 이름 위에 어떤 접두사나 관형어도 용납하지 않으셨던 시인 그 자체였다. 그것은 교만하거나 오만해서가 아니라, 시인으로서 가지는 자부심이었다. 그리고 그 자부심만큼이나 선생님은 시인으로서 책무를 다 하셨다.
   문단의 말단으로 대 시인의 그림자만 봐도 영광일 터인데, 같은 성당 교우라는 또 하나의 행운까지 겹쳐 주일이면 늘 그 분을 뵈올 수 있었다. 한 이 삼년 됐을까. 아직도 시를 열심히 쓰시느냐고 여쭈었더니, “시 써봤자 자꾸 시집만 내야 되고, 미주 문단에 평론 쓰는 사람이 별로 없어 요즘은 평론 좀 쓰고 있지”하고 대답을 하셨다. 새까만 후배들이 글공부는 게을리 하고 ‘눈도장’ 찍으러 다니기 바쁜 세상에, 끊임없이 자신을 계발하고 있는 선생님의 모습에 다시 한 번 고개가 숙여졌다.
   양로원 문을 열고 들어가 직원에게 선생님 성함을 대니, 오른 쪽으로 첫 번째 방이 선생님의 처소라고 일러준다. 문은 열려 있는데 인기척이 없다. 2인 1실을 쓰는지 주인은 간 곳 없고, 두 개의 침대만이 빈 나룻배마냥 벽 쪽에 정박되어 있었다. 여든 여덟의 연로하신 선생님을 생각하며 언젠가는 비워질 침대에 한동안 눈이 머물렀다. 싱글 침대 하나만큼의 공간만 필요해질 날도 머잖았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더워왔다.
   흐려진 동공 속으로 들어오는 이 방의 풍경은 삭막하기 그지없다. 장식 없는 하얀 벽에 밤색 장롱이 하나, 가족사진이 든 사진틀 두어 개 그리고 물병이 고작 이 방주인들의 재산 목록이다. 책은커녕, 그림 한 장, 꽃 한 송이도 없다. 병실도 이렇게 삭막하지 않으련만, 스물 네 시간 숨 쉬고 사는 생활공간인데 이럴 수가 있을까. 한 달에 천 몇 백 불씩이나 주고 산다는 고급 양로원이 이 정도면, 일반 양로원의 환경 시설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아무리 고급이라도 양로원은 양로원이지”하던 선생님의 말씀이 가슴을 쳤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친구의 부축을 받으며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머리를 아주 짧게 깎인 모습이 무척 낯설다. 제대로 맞지 않는 슬리퍼에 퉁퉁 부은 발로 한 발 한 발 떼어놓는 걸음이 아기 걸음처럼 위태로웠다. 다행히 선생님은 전혀 불편이 없는 듯 유쾌했다. 저녁 식사 시간 전이라 휴게실에서 친구들이랑 쉬고 있었다며, 내 두 손을 잡고 어린 애처럼 좋아하신다. 정신도 말짱하고 목소리도 카랑카랑했다. 매일 매일 어떻게 지내시냐는 안부 인사에, “여긴 ‘매일 매일’이 없지 뭐” 하신다. 미처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다.
   ‘매일 매일’이 없는 곳.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고, 자고 싶으면 자고 기운 있으면 휴게실에 가서 좀 앉았다가 또 들어와 눕고....... 물 흐르듯이 그저 흘러간다고 했다. 매일은커녕, 매 시간도 잴 필요가 없다며 허허 웃으셨다. 그저 시간의 물이랑에 떠내려갈 뿐, 시간에 대해서는 초연한 자세다. 분, 초를 따지고 날짜를 헤는 유한한 삶은 이미 선생님을 떠났다. 아니, 선생님이 떠나셨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무한한 공간 속에서 ‘영원’을 사는 게 아닌가. 새삼 선생님으로부터 삶의 신비가 느껴졌다.
   문득, 말년에 심혈을 기울여 쓰셨던 평론 옥고와 귀한 책들이 생각나 다 어찌했느냐며 여쭈었다. 선생님은 “글쎄, 나야 서둘러 이쪽으로 딸려왔으니 아무 것도 모르지. 그냥 무소유로 사는 거야. 법정 스님이 말한 것처럼 말이야. 가진 게 없으니 아주 편해” 하며 너털웃음을 웃으셨다. 내 작품을 잃어버린 것보다 더 아쉬워하는 나와는 너무 대조적이다. 강 하류에 닿은 영혼은 이토록 자유로운 것인가. 모든 소유와 집착을 버린 선생님 몸에선 산사를 돌아 나온 솔바람 향내가 났다.
   마침, 같이 동행한 대모님이 간호원 출신이라 능숙한 태도로 의자를 붙여 발을 높여드리고 부기를 좀 빠지게 했다. 너무 피곤해 하실까봐 오래 있지도 못하고 일어섰다. 그런데 기어이 몸을 일으켜 우리를 문 앞까지 배웅해주셨다.
   문지방 선 하나가 이승과 저승을 가르듯 선생님과 나를 갈라놓는다. 넘을 수 없는 어느 선이 우리를 영원히 갈라놓기 전에, 다시 한 번 베니스 비치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푸른 별의 마지막 기도 속에 그저 산 목련 이울 듯 소리 없이 지게 해 달라’던 선생님의 염원이 이루어지기까지 평안하시길 이 밤도 빌어본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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