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선

2008.10.30 03:27

지희선 조회 수:569 추천:81

                     폐선

                                                      

마산 앞 바다
돌고래들의 릴레이에
물결치는 파도

온 바다를 떠돌던
여객선은 갯부두에 묶여
산 같은 몸집이
뻥뻥 뚫리고
숭숭 파고드는 햇빛!

건강한 그 빛이
결핵 병동
낡은 침대 위에도
걸터앉아,

가슴 시린
하얀 젊음의 등줄기에
파도를 일으키고

해체되는 기관지를 통해
분출하는 시뻘건 피를
폐유처럼
바다에 뿌린다.

그래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미련의 시간이지만
아린 빛을 아끼며
사랑하고 있다. (K 시인의 ‘폐선’)

   몰랐다. K가 이런 시를 쓰며 하루하루 혹독한 삶을 연장하고 있었는지는. ‘하나님이 주신 휴가 기간’이라며 영어 공부까지 하고 있다던 그가 아닌가. 회복기에 있다는 그의 말만 믿고,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왔었다. 자기 병동에서도 가장 중환자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대한민국 공군 대위로서 언제나 당당했던 그였기에 폐병과의 싸움에서도 꼭 이겨낼 거라 믿었었다. 그리고 12년이 흐르고 다시 21년이 흘렀다.    
  그의 가슴에도 가끔 내가 물무늬를 그리고 있었던 것일까. 인명대사전을 뒤적여도 없던 나를, 그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미주 문학 사이트’를 통해 찾아냈다. 대학 학보사 기자 시절에 만났던 그는 내가 어디에 있든 글을 꼭 쓰고 있을 거라 생각되어 미주문단 사이트를 뒤졌단다. 반가움이 가득 묻은 e-mail과 함께 보내온 시 소품들. 한때 신동아 논픽션에도 당선되었던 그는 어느새 개인 수필집과 시집을 가진 전업 작가로 돌아와 있었다. 놀람과 기쁨도 잠시, ‘폐선’이란 시는 숨을 멎게 했다. 보이지 않는 행간마다 시뻘건 추억을 쟁여둔 이 시는, 어느 새 나를 30여 년 전 ‘그 날’로 돌려세웠다. 여름의 끝자락에 초가을이 기웃대고 있을 때였다.
   그날은 비가 왔었고, 천지간에 혼자인 듯 외로움이 뼈 속 깊이 스며들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그래, 떠나자. 이왕이면 추억이 있는 곳으로. 이런 날은 열차 여행이 제 격이지. 내 자신에게 주문을 걸듯 속삭이며 경부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는 서서히 비가 흐려놓은 풍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움’이란 추상명사는 비에 젖어 떠는 간이역을 스치면서 한 영상으로 구체화되어갔다. 이제는 비껴간 인연이 되었지만 그게 무슨 대수람. 남자와 여자가 아닌 영혼과 영혼과의 만남이 절실한 순간. 거기에는 어떤 조건도 제약도 따를 필요가 없었다. 내 마음은 외로워서 오히려 자유로웠다.
   비, 그리움, 고독. 그리고 추억. 이런 것들에 등 떠밀려 동대구역에서 내렸다. 그리고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가 그의 부대 인사과로 전화를 걸었다. “김00 대위는 마산 국군 통합 병원으로 옮기셨습니다.” 아, 아직 제대는 하지 않았구나. 마산으로 옮겼다는 부하 직원의 말이 고마웠다. 마침, 마산은 내 고향이고 어차피 여행 삼아 나온 길이 아닌가. 다시 마산행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창밖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모네의 후기 작품 같은 풍경이 희미한 실루엣을 남기며 스쳐갔다.
   “의무관입니까? 환잡니까?” 정문에서 면회 신청을 하자 담당 군인이 우렁찬 목소리로 물었다. “인사과에 있었는데......” 하고 나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군의관은 아니고 환자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환잡니다!” 관에 못질하듯 꽝하고 대못을 박고는 면회 대기실로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환자는 무슨 환자. 키 176에 몸무게 72 킬로그램인 건장한 대한민국 공군 대윈데......’ 나는 머리를 흔들어 담당관의 말을 지웠다. 정문에서 면회실까지의 거리는 꽤 멀었다. 길 양쪽 꽃들은 비에 씻겨 색깔이 더욱 선명했다. 비도 어느새 멎고, 하늘은 푸른빛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섰다. 놀랍게도 K였다. 파란 환자복을 헐렁하게 입고, 여윈 얼굴에 파리한 채로 나타난 사람. 그는 예전의 K가 아니었다. 충격으로 할 말을 잃었다. 눈을 크게 뜨고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내게 그는 빙긋 웃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어쩌다가.......” 내 눈엔 눈물이 고였다. 이십 대 후반의 그 푸르른 젊음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늘도 무심하시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려고 했는데.......” “그래도 지금은 좀 나아진 거야.” 그는 또 한 번 빙긋 웃었다. 그 말, 그 웃음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론이요 화해의 몸짓이었으리라. 말줄임표로 끝나는 단답식 대화만 간간이 오갈 뿐, 우리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다음 면회조차 거절하는 그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불사조 같은 사람이라 꼭 이겨낼 거라 믿었다. “또 며칠 퐁당퐁당 하겠구나.” 날 바래다주며 혼잣말처럼 내 뱉던 한 마디가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읽게 된 그의 시엔 그때의 아픔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투병 중 면회 온 사람은 딱 두 명인데 그 중에 한 명이 나라고 했다. 나는 우연히 찾아간 셈이니, 그는 일체의 면회를 허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혼자 그 고통을 감내해낸 모양이다. 짧지 않은 투병 생활 속에 그 외로움과 고통이 어떠했을까. ‘폐선’이란 시 뒤에 붙은 추신은 더 많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가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국군 통합 병원에서 바라보는 창가에 폐선이 정박해 있고, 결핵 환자들이 하나씩 죽어나가듯 폐선은 고철로 낱낱이 분해되고 있었지요. 그러나 아무도 이런 일이 결핵 병동 앞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줄을 몰랐답니다. 저도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서 이 시를 적었지요.”
   폐선과 결핵 환자. 이보다 더 강한 은유는 없을 것 같다. 고철로 낱낱이 분해되어 나가는 폐선의 최후를 보며, 얼마나 많은 환자들이 절망 속에 죽어갔을까. 창 밖 풍경이 주는 의미가 새삼 가슴을 친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와 요양소 창 너머로 보이던 ‘폐선’의 차이. 그것은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희망과 절망으로 나뉘는 길목에서 생사를 가르는 엄청난 것이었다.  
   ‘시뻘건 피를 폐유처럼 바다에 뿌리며’ 육필로 써 내려간 ‘폐선.’ 그러나 그의 배는 결코 ‘파선’되지도 않았고 고철로 분해되지도 않았다. '사월의 노래’를 부르며 생명의 불꽃을 밝혀 들고 되돌아온 사람. 그는 지금, 한 여자의 남편이며, 세 자녀의 아버지요, 손자 손녀를 거느린 다복한 할아버지로 ‘아린 빛을 아끼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어느 시인이 노래하듯, 노후란 본시 아름다운 것. 누군들 몇 번의 고비를 넘지 않고 여기까지 왔으랴.  머잖은 날 고철로 분해되는 날이 올지라도, ‘건강한 햇빛’ 속에 우리 아직 살아있음을 감사해야겠다. 아름다운 환송인가. 서녘 하늘에 몸을 푸는 저녁노을이 아름답다. 오늘따라, 늦가을 언덕에 빛나는 은빛 억새들의 춤은 또 왜 저리도 장엄한가.         (10-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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