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박문하의 수필 <잃어버린 동화>
                          
                                                          
   한 손에는 청진기, 다른 한 손에는 펜을 들고 애절한 인생과 생활의 애환을 수필로 노래하다 간 '우하 박 문하'. 그의 이름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십 여 년 전 미주 문학11월호에 수록된 변 완수 선생의 '여백의 인생'에서였다.
   '박 문하'는 수필 새내기였던 나에게 퍽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빼어난 산문을 쓰시는 변 완수 선생이 그의 작품을 귀하게 다루는 걸 보면 예사 수필가가 아닌 듯 했다. 문학 수필을 지향하던 나는 수필가 박 문하와 그의 작품 '여백의 예술'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한번 만나 뵌 적도 없는 데다가 동부에 사시는 변 완수 선생께 장거리 전화까지 건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염치 불구하고 전화를 들었다. 다행히, 전화를 받은 그 분의 말투에 잔잔한 반가움이 묻혀왔다. 그러나 박 문하의 '여백의 예술'이 수록되어 있는 수필집 '잃어버린 동화'는 이미 절판되었다고 한다. 절판이라니...... 난감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선생은, "좋은 글을 읽고 서로 나누는 건 즐거운 일이지요"하면서 소장본을 보내주마고 약속하셨다. 정말 기대하지 않았던 행운이다. 수필은 '정의 문학'이라더니 '과연......'하고 속으로 감동했다.
   며칠 뒤, 약속대로 몇 권의 책과 함께 박 문하의 수필집 '잃어버린 동화'가 부쳐왔다. 1977년도에 범우사에서 발행한 조그만 문고판이었다. 책 겉장에는 500원 짜리 가격표가 앤틱 악세사리 마냥 앙증스럽게 붙어있었다. 오랜 연륜을 말해주듯 누렇게 변색된 책은 고서 냄새가 풀풀 났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모양새를 봐서라도 골동품처럼 귀하게 다루어야할 것만 같았다. 수수한 표지와 삽화 하나 없는 편집 역시 '예쁠 것도 없는 아내'를 연상케 했다.  
   박 문하의 수필은 그 한 편 한 편이 그야말로 '생활 수필'의 진수였다. 그러면서도 표현이나 구성면에서 순수 문학 수필로도 손색이 없었다. 한 작품 한 작품 읽을 때마다, "수필은 문학의 부록이 아니다"라고 한 그의 지론에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은근히 생활 수필을 신변잡기로 얕잡아 보던 나는 그의 작품을 접하고서야 좋은 수필은 필력의 문제지, 소재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생활의 바탕이 없는 수필은 공허한 기교'라고 일갈한 우하의 말은 내 수필 공부를 위한 죽비였다. 소설처럼 구수하고, 동화처럼 아기자기하고, 꽁트처럼 유머가 넘치는 작품 하나 하나가 흥미로웠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수필집의 표제로 쓰인 <잃어버린 동화>였다. 아마도 회색 빛을 즐기는 내 어둔 정서와 맞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을비가 스산히 내리는 어느 날 밤이었다. 이미 밤도 깊었는데 나는 빗속에서 우산을 받쳐들고 어느 골목길 한 모퉁이 조그마한 빈 집터 앞에서 화석처럼 혼자 서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곳에는 오막살이 초가 한 채가 서 있었던 곳이다. 와 보지 못한 그 새, 초가는 헐리어져 없어지고, 그 빈 집터 위에는 새로 집을 새우려고 콘크리트의 기초공사가 되어져 있었다. 사랑했던 사람의 무덤 앞에 묵연히 선 듯, 내 마음과 발걸음은 차마 이 빈 집터 앞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웅장함을 자랑하는 로마 시대의 고적도 아니요, 겨레의 피가 통하는 백제나 서라벌의 유적도 아닌, 보잘 것 없는 한 간 초옥이 헐리운 빈 터전이 이렇게도 내 마음을 아프게 울리어주는 것은 비단 비 내리는 가을밤의 감상만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소설처럼 시작되는 '잃어버린 동화'는 첫 서두부터 내 여린 감성을 자극해왔다. '가을비가 스산히 내리는 어느 날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한 간 초옥이 헐리운 빈 집터'라는 공간적 배경 속에서, 우산살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처럼 외로움이 뚝뚝 흘러내리는 중년 사내의 모습이, 슬픈 영화의 한 장면같이 찡하게 전해왔다.

   -어느 날 밤, 나는 호떡상자를 어깨 위에 메고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호떡 사이소, 호떡"하고 외치며 골목길을 지나고 있었다. 마침 길가에 있던 조그마한 초가집 들창문이 덜커덩 열리더니 거무스레한 중년 남자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호떡 5전 어치만 주가." 중년 남자는 돈을 쥔 손을 내밀었다. 어스름 램프 불이 졸고 있는 좁은 방에는 나보다 나이 어린 두 오누이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어머니인 듯한 중년 부인이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중년 남자는 호떡 여섯 개를 받아서는 오누이에게 각각 두 개씩 나누어주고는 나머지 두 개 중에서 한 개는 부인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덜커덩 창문이 닫히고 말았다. 창문이 닫힌 방안에서는 도란도란 정겨운 이야기 소리와 함께 네 식구의 호떡 먹는 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책갈피 속에서 누렇게 변색된 어린 날의 사진을 발견한 듯, 나는 글을 따라가던 눈을 거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 어린 날, 우리 동네 골목에도 구덕산 삭풍이 휘몰아치는 겨울밤이면, 호떡 사라고 외치던 애절한 목소리가 있었다. 호떡보다는 그 어린 소년이 안쓰러워 호떡을 사달라며 엄마에게 조르던 기억이 난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소년을 다시 만난 듯 내 가슴에 여린 물살이 인다. 흔히 보던 어린 날의 초상이요, 겨울 풍경의 한 토막이지만, 서문에서 이미 읽은 우하의 남다른 가정 배경 때문에 더욱 가슴이 쓰려왔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잃어버린 나라에 대한 울분으로 유서 한 장만 달랑 남긴 채 자결하시었고, 삼남 이녀나 되는 형님과 누님들은 만주 땅에서 독립 운동가로 활동하다가 모두 유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그 치열했던 곤륜산 전투에서, 34세의 꽃다운 나이로 장렬하게 숨진 조선 여자 의용군 대장 박 차정이 바로 그의 친 누님이다. 독립운동사에 있어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를 지닌 우하. 더욱이 자신은 유복자로 태어나 홀어머니를 모시는 소년가장에 '불량 선인'으로 살아가는 처지였으니, 따스한 가정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은 뼈에 사무쳤으리라.    
   호박등 램프 불이 비치던 방안에서 호떡을 맛있게 먹던 한 가정의 다사로운 정경. 비록 초가 한 간의 가난한 삶이었지만, 그것은 행복의 상징인 양 여덟 살 소년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그는 창문이 닫긴 어둠 속에 서서, 자신도 먼 훗날 꼭 행복한 가정을 이루리라고 다짐했다. 주경야독을 하며 자신을 채찍질한 결과, 그는 마침내 의사가 되고 이남 삼녀를 둔 다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한 간 초옥의 풍경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 집과 그 날의 다사로웠던 정경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동화'요, '마음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로부터 40여년이 흘러간 지금, 나는 한 간 초옥보다는 몇 배나 더 큰 콘크리트 집을 가지게 되었고 많은 가족을 거느리게 되었으나, 어쩐지 아직도 그날 밤의 그 초가집 창가의 풍경이 자꾸만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근년에 사랑하는 큰 자식놈을 불의의 사고로 잃어버리고, 이따금씩 아내마저 그 거리가 멀어져 가는 밤이면 나는 혼자서 술을 마
시고는 곧잘 이 초가집 창가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운 내 동화 속의 이 초
  가집도 헐리어져 온 데 간 데 없고, 가을비가 내리는 이 외로운 밤을 나는 진정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탄식에 가까운 물음을 던지며, 비 내리는 가을밤, 초옥이 헐리운 조그마한 집터 앞에서 묵연히 서 있던 중년 남자. 할 수만 있다면, 내 그림자라도 곁에 세워두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가고 없다. 딱 10년만 더 살아 좋은 수필집 두 세 권만 더 남기고 가면 여한이 없겠다고 토로한, '나에게도 봄은 오는가?'라는 투병기를 마지막으로 남긴 채 그는 갔다.    죽기 한 달 전까지도 펜을 놓지 않았던 진정한 수필가 우하 박 문하. 쉰 여덟의 나이로 가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사람이다. 1918년 생이니, 살아 있으면 여든 여덟의 노인이다. 그럼에도 그는 내 곁에 여덟 살의 호떡 파는 소년으로 서 있다. 어린 날, 우리 집 골목에서 호떡 사라고 외치던 이름 모르는 소년처럼 내 마음에 여린 물살을 일으키면서.
   회귀하는 연어처럼, 줄곧 어린 날을 향하여 유영하게 하는 우하 박 문하의 '잃어버린 동화'는 오히려 잊고 있던 내 어린 날의 동화를 되찾아주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어린 날의 초상화. 아련한 안개와도 같이 몽롱하던 옛일이 선명하게 다가오고, 조금은 회색 배경을 지닌 이런 글들이 좋아지는 것도 다 나이가 들어가는 탓일 게다. 호박 등 램프 불은 꺼지고 한 간 초옥은 포크레인에 뭉개어졌지만, 우하의 '잃어버린 동화'는 내 가슴에 남아 언제까지나 작은 등불로 깜빡일 것이라 믿는다.(11-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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