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에세이 - 들판 길을 걸으며

2020.04.28 11:45

서경 조회 수:25

들판 길을 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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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다음 날 아침.
모처럼 외출을 했다.
며칠 째 주룩주룩 내리던 비도 이젠 됐다는 듯 뚝 그쳤다.
오고 가는 차들은 있었지만, 평상시에 비하면 한적한 거리였다.
거침없이 하이 킥이라더니, ‘길아, 비켜라! 가슴을 열어라!’하는 호기로운 마음으로 씽씽 달렸다.
비 개인 하늘은 어쩌면 그리도 푸르른지!
솜털 구름은 또 어찌 그리도 순백의 아름다움을 뽐내는지!
방콕하며 숨막혔던 답답함이 일시에 풀리며 가슴이 뻥 뚫렸다.
달려라 달려!
장장 100마일의 먼 거리를 가까운 이웃 나들이 가듯 신나게 밟았다.
프리 웨이에서 내려 시골길로 들어 섰다.
속도를 줄였다.
비포장길로 30마일은 덜컹대며 더 가야  한다.
며칠간 내린 비로 메말랐던 들판이 거대한 호수로 변했다.
흙탕물이라 그다지 아름답진 않았지만, 찬란한 햇빛으로 호면의 윤슬이 아름다웠다.
여기 저기 물 오른 대추나무 가지들이 붉으데데한 게 마치 복숭아 나무를 연상시킨다.
약속 장소에 다다르니, 주인장보다 개가 먼저 반긴다.
짖지도 않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잘 왔다고 차 앞까지 다가 와 인사한다.
차를 담벼락 옆에 세운 뒤, 철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 섰다.
그런데 누렁이 녀석이 선듯 따라 들어오지 않는다.
알고 보니, 이 누렁이는 이웃집 개란다.
저도 눈치가 있어 제 집처럼 선듯 들어서지 못했나 보다.
누렁이는 이 집 흰 개와 친구라 제 집처럼 자주 온다고 한다.
주인과 대화를 나눈 뒤, 공기가 하도 맑아 끝없이 펼쳐진 들길을 산책삼아 걸었다.
누렁이와 흰둥이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를 따른다.
눈 앞에 토끼가 보이니, 치타같이 빛의 속도로 치달았다.
토끼는 “날 살려!” 하며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다.
다시 돌아온 누렁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침을 똑 떼고 우리 앞에서 유유자적하며 걸어 간다.
귀여운 녀석들.
눈을 드니, 먼 세월 돌아온 산의 능선이 성격 좋은 친구처럼 둥글고 부드럽다.
하늘은 짙은 코발트 빛으로 눈을 물들이고 드문드문 떠 있는 새하얀 구름은 슈가 캔디처럼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을 것같았다.
봄이면 꽃물 드는 마음이 가없이 너른 들판을 걸으니, 화선지에 여린 물감 스미듯 평화로움으로 물든다.
‘코로나야! 너도 끝날 때가 있겠지?’
속으로 슬쩍 눙쳤다.
코로나 덕분에 자유 산책이 얼마나 귀한 행복인지 알겠다.
시골 들판길을 걸으니, 우리도 착한 개도 모두 풍경 속의 아름다운 오브제였다.
목화솜 흰 구름은 오랫동안 눈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혼자 떠돌던 구름도 외로운 날이면 서로 얼싸 안고 울겠지.
그때 우린 차창밖 빗방울을 응시하며 또 생각에 잠기겠지.
문득, 흰구름을 보며 얼마 전 비 오는 날의 정경을 떠올렸다.
되짚어 오는 산길엔, 어느 새 내려 왔는지 안개 자욱하여 길을 막았다.
차들은 모두 빨간 비상등을 켠 채 서행을 하고, 하이빔을 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갈등 속에 짙은 안개 속을 빠져 나왔다.
‘변덕스런 나일강’이 아니라, 참 변덕스런 날씨다.
날씨는 변덕스러워도, 마음만은 변치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오늘 또 하루, 이렇게 아름다운 시간이 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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