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니

2007.05.27 10:11

지희선 조회 수:665 추천:78

             틀니

                                                        지 희선

    '지혜의 발자취'에서 재미난 글을 발견했다. 짧은 글이지만, 유우머 감각과 암시성을 지닌 듯 하여 여기에 소개해 본다.

- 아주 나이가 많은 한 수녀가 원장으로부터 수련 수녀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영성에 대해 훈화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노수녀는 수련 수녀들이 자기 주변에 모이자 훈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훈화 도중에 노수녀의 틀니가 빠져 마루에 떨어졌다. 이걸 본 수련 수녀들이 깔깔대고 웃었다. 노수녀는 천천히 틀니를 주워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훈화를 계속했다. "하느님은 이 틀니와 같으세요. 그 분만이 우리 이 없는 영혼에 아름다움을 부여하실 수 있으니까요."-

   틀니와 주님. 짝 맞지 않는 신발 같은 이 두 단어를 되뇌며 내 자신을 돌아본다. 육신의 아픔과 영혼의 아픔 사이에서 어느 것을 더 아파했던가. 치료해주는 의사와 내 영혼의 치유자 중에서 누굴 더 자주 찾아 뵈었나. 죽음과 부활로 엮어가는 내 삶의 베틀 속에서 나는 얼마나 눈부신 옷감을 지어내었나. 꼭 부활시기가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재점검해야할 내 영혼의 문제를 너무나 많은 시간 잊고 살아왔던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를 대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지 짬을 내어 만나려 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 사랑을 키우려 애쓴다. 바빠서 전화를 못했다거나, 깜빡 잊었다는 핑계를 댈 즈음엔 '사랑이 저만치 가네'라는 노래 가사를 떠올리면 된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다 보면, 세월만 가고 사랑처럼 저만치 가고 있다.    
    지난 일요일, 우리 '미주 카톨릭 문우회'는 테메큘라에 있는 '꽃동네'로 피정을 갔다. '저만치 가고 있는 내 사랑'도 다질 겸 짬을 내 참석했다. 열 다섯 남짓한 인원수에 지도 신부님과 부제님을 모시고 하는 피정이라 퍽 오붓하리라 짐작됐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샌디에고 성당에서 온 '예비자'들이라고 했다. 팔월 십 오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있을 영세식을 위해 피정을 왔다고 했다. 참석한 예비자들은 삼 사십 대의 젊은이들로 한결같이 밝은 얼굴이었다. 평화와 기쁨에 담뿍 젖어있는 신앙의 벗들을 보니 내 몸에서도 풋풋한 풀냄새가 나는 듯 했다. 솔 향기에 묻혀오는 아이들의 왁자한 웃음소리도 여름날 매미 소리처럼 즐거웠다.
   대자연 속에서, 육십 여 명의 예비자들과 함께 드린 주일 미사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우리 신자들은 성체와 성혈을 함께 모시는 양영성체를 하고, 예비자들은 신부님으로부터 안수 축복을 받았다. 예비자 머리에 손을 얹고 한 사람 한 사람 안수 축복을 해주는 신부님의 모습은 경건하다 못해 거룩하게 보였다. 한 영혼을 위해 어느 누가 이토록 경건한 축복을 해 줄 것인가. 그 누가 이토록 큰 품으로 상처 받은 마음들을 안아줄 것인가. 몇몇 예비자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울먹였다. 성가를 부르고 있는 우리들의 두 눈도 촉촉히 젖어왔다. 눈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수'라고 했다. 그 성수가 가슴 가슴에 흘러들어 작은 기적을 이루고 있었다.    
   오월은 사랑의 달이다. 어린이 날이 있고, 어버이 날이 있고, 스승의 날이 있는 달이다. 무심했던 아이에게 입맞춤을 한번 더 해주고, 소홀했던 부모님께 전화 한 통 더 올리고, 잊고 지내던 스승님께도 엽서 한 장 더 띄우는 달이다. 사랑의 회복을 꿈꾸는 달, 그래서 오월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지도 모른다. 잊었던 얼굴도 떠올리고, 그리운 이름도 백지에 써 보자. 혹 어느 한 귀퉁이에 여백이라도 있으면, '주님'이라고 조그많게 써 보자. 작은 이름이 가장 크게 돋보이는 '신앙의 신비'를 맛볼 수 있을 게다.  
    
   내 영혼의 아름다움을 되찾기 위해 잃어버린 틀니를 찾아 나서야 겠다. 그 분만이 우리 이 없는 영혼에 아름다움을 부여하실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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