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을 달리다

2017.05.13 02:27

서경 조회 수:122


일요일 새벽 세 시 삼십 분.
아직 비는 오지 않지만, 검은 밤하늘을 올려보니 심상찮은 표정이다. 
다시 리챠드 김과 우리 팀 오정훈 대장을 만나 시합 장소를 향해 떠났다. 
날씨가 춥고 쌀쌀하다.
이미 일기 예보에 충실한 사람들은 비옷 차림으로 왔다.
설레임과 불안한 마음들을 안고 삼삼오오 모여 들었다. 
포레스트 러너의 공식 대회인만치 인원수가 만만찮다. 
이종민 코치의 스트레칭과 주의 사항을 들었다. 
풀 마라톤 출발은 다섯 시 삼십 분, 하프 마라톤 출발은 여섯 시 십 오분이란다. 
하지만, 하프도 풀 마라톤 제일 뒷줄에 붙어 바로 출발한다는 코치의 방침이다. 
나는 오정훈 대장을 따라 짐을 맡기러 UPS 차량으로 이동했다.
아뿔싸 !
낭패가 났다.
짐을 맡기고 바로 돌아섰는데 오대장이 보이지 않는다. 
두리번 두리번.
여기저기 둘러보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때를 맞춰 우박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온 몸이 젖고 신발엔 빗물이 질척댔다. 
피할 곳도 없다. 
여자들은 벌레처럼 몸을 돌돌 말아 웅크리고 앉아서 비를 두드려 맞았다. 
남자들은 오돌도돌 소름이 돋은 채 그대로 선 채 비를 맞고 섰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빗속을 질주하며 워밍업을 했다. 
허리춤 벨트에 넣어둔 전화기라도 꺼내어 이 광경들을 찍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역사적 현장을 놓치다니!
특종 놓친 종군 기자라도 된 듯 아쉽다. 
그러면서도 계속 내 눈은 오대장을 찾기 위해 군중을 훑으며 서치 라이트가 된다. 
전화도 카톡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 더욱 답답했다. 
남가주 비는 그리 오래 가지 않는 특징이 있는데 계속 퍼 붓는다. 
덜덜, 덜덜. 
이젠 한기까지 오고 잔뜩 등을 구부리고 웅크려 앉은  자세는 근육까지 경직되게 한다.
준비해 온 검은 쓰레기 봉지를 둘러 쓰고 눈만 빼꼼히 내놓은 채 계속 오가는 사람 중에 오대장이 있으려나 하고 살폈다. 
이 많은 군중 속에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풀 마라톤은 벌써 오래전에 떠났다고 한다. 
그 꽁무니에 붙어 우리 하프 팀도 벌써 출발했겠지.
차라리 오대장을 찾는다고 시간 허비하지 말고 풀 마라톤 꽁무니나 찾아갈 걸, 하고 후회했다.
하프 마라톤을 일곱 번이나 뛰었어도 빗속에 이토록 혼자 버려지기는 처음이다. 
최종적으로는 '어차피 마라톤은 군중 속에서 홀로 뛰는 운동'인데 싶어 혼자 뛰어도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굳혀졌다. 
그런데 오늘 따라 시간은 왜 그리 더디 가는지. 
출발은 하지 않고 비만 줄기차게 퍼부었다. 
마치, 심술이라도 부리려고 작정한 듯 비는 더 세차게 내렸다.
두꺼운 쓰레기 봉지를 비옷삼아 둘러 썼지만, 우박이 우두둑 떨어지며 사방으로 튄다.
우박도 콩알만 하다. 
여기저기서 "오! 마이 갓!"이란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피할 곳이라곤 없다. 
어떤 사람은 이파리 몇 잎이 저 높은 하늘 가까이 붙어 있는 팜트리 옆에 붙어 선다. 
그러나 저도 온 몸으로  선 채 비맞고 있는 팜트리가 무슨 도움을 주랴. 
목을 타고 등으로 빗물이 흐른다. 
티셔츠까지 젖어드니, 한기가 더해져 정말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드디어 출발. 
빗줄기 사이로 시간차별 출발을 했다. 
춥고 경직된 최악의 컨디션이라 조금 더 일찍 출발하고 싶어 2시간 20분 페이스 메이커 옆에 섰다. 
물론, 출발만 같이 하고 내 속도대로 천천히 뛴다는 계산이었다. 
3마일까지 로보트 같은 검은 쓰레기 봉지를 뒤집어 쓴 채 달렸다. 
마라톤은 팔로 뛰는 운동이란 요상한 말을 들었는데 언감생심. 
봉지 귀퉁이를 잡은 손은 안에서 바시락대고 있을 뿐, 제대로 폼을 잡을 수도 없었다. 
3마일쯤 지나니, 비가 슬슬 긋기 시작했다. 
쓰레기 봉지를 벗어 던져 버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워밍업이 되면서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자원 봉사자들이 건네는 물도 마시고 드링크도 마시며 힘을 내니, 주변 경관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개비 사이로 아슴한 마을 풍경이 들어오더니, 왼쪽으로 바다도 드러났다.
잠자듯 미동도 없이 떠 있는 요트들이 이국 풍경을 자아낸다. 
5마일을 넘어가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작은 시내처럼 흐르는 물을 밟고 뛰니 양말도 신발도 물이 차 더욱 무거웠다. 
오락가락하던 빗줄기는 7마일 지점 쯤에서 완전 그쳤다. 
이미 다 젖은 몸. 
이젠 비가 오든말든 상관없지만, 비가 그치니 딱 한 가지가 좋았다.
전화기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점. 
처음부터 기록 경신은 포기한 터, 예쁜 풍경 등 글감 사진이나 좀 찍자 싶었다. 
꿈 꾸는 포구처럼 코스가 너무 아름다웠다.
'바로 이 맛이야!'
몸은 무겁지만, 새로운 코스를 뛰는  즐거움이 가슴에 차 올랐다. 
중간중간 사진도 찍고, 힘들다 싶으면 좀 걷기도 하다 보니, 어느 새 주변에 걷는 사람이 많아졌다. 
내가 낙오병 무리에 섞여 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이 번쩍 들어 좀 속도를 내어 뛰었다. 
9마일인지 10마일인지 언덕배기로 올라서니 저만치서 우리 팀 자원 봉사자가 달려와 함께 뛰어 준다.
부스에서 뛰어 나온 다른 봉사자도 힘찬 응원을 보내며 수박 한 조각을 건네 준다.
목을 축이고 다시 봉사자와 함께 동반 달리기를 했다.
"힘들 땐 무리하지 말고 걸으세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저도 그러고 있어요. 뛰다가 걷다가 했어요."
그때, 3시간 짜리 페이스 메이커가 내 앞을 힘차게 치고 나갔다. 
'으잉? 내가 세 시간도 더 넘었다고?'
'말도 안 돼!'
'아휴! 창피!'
온갖 창피한 생각으로 갑자기 심경이 복잡해졌다.
포레스트 팀에 조인해서 뛰는 첫 마라톤 도전에, 이렇게 창피한 일이 있나!
뛰다가 걷다가 하면 세 시간도 넘을 수 있구나, 싶었다.
보통 때보다 15분 늦게 잡아도 두 시간 사십 오분에는 들어올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완전 망했다.
"말도 안돼, 말도 안돼! 세 시간을 넘다니!"
이 소리밖에 안 나왔다.
옆에서 같이 뛰어주는 봉사자는 그래도 방글방글 웃으며, 이렇게 부상 없이 완주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거라며 끝까지 격려해 준다.
보통은 부담스러워서 페이스 메이커랑 뛰지 않는데 오늘은 우정 봉사자더러 마지막 구간을 같이 뛰어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마음을 너무 편하게 해 준다. 
덕분에 마지막까지 쓰러지지 않고 피니시 라인을 밟을 수 있었다. 
메달을 받으니, 긴장이 풀리고 모든 피곤이 다 가신 듯했다. 
하늘엔 뭉게 구름 두둥실 떠 가고 따스한 오뎅국이 날 반겨주었다. 
오뎅국과 떡으로 고픈 배를 채우니 살 것 같았다. 
잠 한숨 못 자고, 빈 속으로 달린 최악의 OC 마라톤. 
그토록 뛰고 싶은 코스를 멋있게 장식하지 못해 아쉽긴 해도 또 하나의 추억이 될 시합이다. 
돌아 나오는 길, 창공을 향해 일련의 새 떼 무리가 힘차게 차고 올랐다. 
문득, 한 군사 병원에서 78세의 나이로 숨진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펙의 말이 떠올랐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달린다."
그래, 나는 달린다.
고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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