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에세이 - 진달래 오솔길

2022.04.04 12:00

서경 조회 수:462


 진달래 오솔길.jpg

 

꽃들이 폭죽을 터뜨리는 봄이다.
옛날엔 봄이 얼음장 밑으로 온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엔 봄이 페북 들판으로 오는 듯하다.
발로 찍은 사진을 가만히 앉아 눈에 담는다.
미안하고 감사하다.
얼마 전엔, 노란 산수유와 하얀 목련으로 내 마음을 밝히더니, 오늘은 연분홍 진달래꽃으로 설레게 한다.
뱀처럼 꿈틀대며 가던 길이 꼬리를 감춘 진달래 오솔길은 한 편의 옛동화를 쓴다.
그 길 위로 세 명의 꼬마가 재잘대며 걸어 간다.
지리적 배경은 살짝 마산으로 옮겨 간다.
등장 인물은 여섯 살, 여덟 살, 열 살 꼬맹이들.
어린 두 동생과 나, 우리 세 오누이들이다.
사진 밖 왼쪽 아래 편엔 푸른 가포 바다 물결이 출렁대고 있는 것도 안다.
우리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세 번이나 번갈아 보내며 진달래 보랏빛 야산과 오솔길을 헤집고 다녔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가면, 그 길 끝 쯤에 마산 결핵 요양소가 있었다.
여섯 살배기 막내 동생이 늑막염이 걸려 우리는 매주 수요일 오후 다섯 시까지 약을 타러 가야 했다.
가끔은 엑스 레이 사진을 찍어 병의 차도를 확인하기도 했다.
엄마 아빠는 생활전선에서 바쁘고, 언니 오빠는 늘 학교에서 늦게 오니 약 타러 가는 담당은 열살 배기 내 몫이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산을 몇 구비 돌아가야 하는 그 먼 길을 가기 싫어 빼 먹어 버렸다.
다음 주에 갔을 때, 백인 여자 원장은 얼굴이 빨갛게 상기가 되어 나를 호되게 나무랐다.
언제나 함박 웃음과 함께 우리를 맞이해 주던 다정한 원장 선생님이 그 날은 심한 말까지 내 머리 위로 쏟아 부었다.
“동생 약도 안 먹이고 죽이고 싶어요?”
그 말이 단도와 같이 날아와 내 가슴에 꽂혔다.
‘언지예~ 다음 부터는 꼭 안 빠지고 오겠심더!’
마음 속으로는 답했지만, 얼마나 무서운지 입으로는 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에게는 이름 대신 늘 ‘우리 천사’로 불리고,  학교에서도 칭찬만 듣던 내겐 가히 충격적이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 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 꾸중은 당연했다.
돈도 안 받고 오직 환자를 살려 보겠다고 불철주야로 뛰고 있던 그 분들의 정성에 비하면 우리 역할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다.
가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게다가, 환자 영양을 위하여 주던 고소한 ‘원기소’와 ‘’가루 우유’는 간식이 귀하던 그 시절 우리에겐 훌륭한 간식이 되었다.
“와서 보라!” 하던 예수님 말씀처럼, 빠지지 말고 오기만 하라는 원장님 말씀은 영육간의 복음이었다.
나는 그 이후로 단 한번도 거르는 일 없이 병원을 다녔다.
아, 그러나 그 추운 겨울날 해풍을 맞으며 자라목이 되어 손을 꼭 잡고 넘던 그 고갯길은 마의 산길이었다.
하지만, 봄이 되면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 꽃동산은 우리에게 축제의 장이었다.
공원에 풀어 놓은 강아지마냥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진달래 꽃잎을 따 먹으며 희희낙락했다.
봄은 그 시절 모진 겨울을 견뎌낸 댓가로 받은 하늘의 상급이었다.
고 작은 발로 먼 길 함께 걸어 갔던 여섯 살 배기 꼬맹이 남동생.
왜 그때 업어 줄 생각은 못하고 걸리고 갔는지 새삼 미안하다.
후유증 없이 잘 회복된 동생은 지금도 조기 축구회 감독과 현역 선수로 뛸 정도로 건강하다.
진달래꽃만 보면 내 고향 마산과 결핵 요양소가 어김없이 떠오른다.
멀리서 보면 그건 분홍빛이 아니라 보랏빛 야산이었다.
혀 끝에 올리면 녹던 하늘하늘한 진달래 꽃잎은 우리 꼬맹이 동심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은유다.
아직은, 우리 세 명 지상에 건재하고 함께 추억을 공유할 수 있어 감사하고 행복하다.
“니 그때 생각나나?” 하고 물으면 “생각 나고말고! 다 생각난다!” 하고 호쾌하게 대답할 여동생.
“누나야! 고맙데이!” 하고 말할 내 남동생.
육친의 정을 물씬 돋게 하는 진달래 야산이요 오솔길이다.
 

(사진 : 장정옥)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808 79. 80. 석 줄 단상 - 성 토마스 성당 미사 참례 외 1 file 서경 2022.07.15 9
807 77. 78. 석 줄 단상 - 신록의 계절 7월 외 1 + file 서경 2022.07.10 28
806 75. 76. 석 줄 단상 - 집과 무덤의 차이 외 1 file 서경 2022.07.10 19
805 73. 74. 석 줄 단상 - TV Dinner를 아세요? 외 1 file 서경 2022.07.10 15
804 72. 석 줄 단상 - 이별 연습 file 서경 2022.07.05 19
803 70. 71. 석 줄 단상 - 나팔꽃 연가 외 1 file 서경 2022.07.05 20
802 68. 69. 석 줄 단상 - 수중 마을 외 1 file 서경 2022.07.05 12
801 66. 67. 석 줄 단상 - 서탐 외 1 file 서경 2022.06.29 45
800 64. 65. 석 줄 단상 - 키다리 선인장 외 1 file 서경 2022.06.29 51
799 62. 63. 석 줄 단상 - 사랑의 결실 외 1 file 서경 2022.06.29 45
798 60, 61. 석 줄 단상 - 밤의 추상화 외 1 file 서경 2022.06.23 52
797 58, 59. 석 줄 단상 - 탄생 신비 외 1 file 서경 2022.06.23 14
796 56, 57 석 줄 단상 - 플라타너스의 슬픔 외 1 file 서경 2022.06.22 15
795 54, 55. 세 줄 문장 2제 - 꽃 진 자리 외 1 file 서경 2022.06.17 34
794 52, 53. 석 줄 단상 - 거리의 천사 외 1 file 서경 2022.06.17 42
793 50, 51.석 줄 단상 - 다시 불러 보는 이름 외 1 file 서경 2022.06.17 47
792 48, 49. 석 줄 단상 - 빛의 만남 외 1 file 서경 2022.06.13 45
791 46, 47. 석 줄 단상 - 주인 잃은 고양이 외 1 file 서경 2022.06.13 40
790 44, 45, 석 줄 단상 - 내 사랑 팜트리 외 1 file 서경 2022.06.13 7
789 43. 석 줄 단상 - 그런 사람 아니에요 file 서경 2022.06.11 42

회원:
4
새 글:
0
등록일:
2015.06.19

오늘:
1
어제:
4
전체:
1,317,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