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 속에 울리던 북소리

2007.09.04 23:14

지희선 조회 수:554 추천:65

                         빗 속에 울리던 북소리
  
    베버리 힐스의 로데오 거리가 때 아닌 인파로 북적댄다. 웬일인가 했더니, 태풍을 피해온 플로리다 사람들 때문이라고 했다. 나라가 크다보니 동부에서 태풍이 불면 서부로 옮겨오고, 서부에서 지진이 나면 놀라서 동부로 이사를 간다. 겨울이 그리우면 여름에도 콜로라도로 가서 스키를 타고, 여름이 생각나면 겨울에도 하와이로 날아가 크리스마스를 즐기기도 한다. 천재를 피할 수도 있고, 계절도 선택할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인 것같다.
   나는 미국에 살면서 태풍에 대한 공포는 잊었지만, 아직도 여름이 오면 가슴 저미는 통증을 느낀다. 1972년 부산에서의 참혹했던 여름이 너무나 깊은 상처를 남기고 갔기 때문이다. 지금도 내 가슴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흉터처럼 남아 있고, 그 날의 북소리가 내 귀를 둥둥 두드린다.
  
   비가 온다 온다해도 그토록 많은 비가 내리는 건 처음 보았다. "쏴아쏴, 좌악좍" 밤새 지붕을 때리는 비는 다시 한번 세상을 심판하려는 기세였다. 바람은 전깃줄을 잉잉 울리고, 냇가엔 구르릉거리며 돌 구르는 소리가 짐승 울음처럼 섬짓했다. 이튿날 새벽이 되어도 세찬 빗줄기는 그칠 줄 몰랐다.
   그때 어디선가 빗 속에 묻혀 때 아닌 북소리가 울려왔다. 얼핏 괭과리 소리도 들려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건 환청인지도 몰랐다. 나는 벽을 향해 다시 돌아누웠다. 머리가 욱씬거려 첫 강의는 포기하고 누워있던 참이었다. 아침 아홉 시나 됐을까. 옆방에 계시던 아버지가 방문을 박차고 나오며 자지러질 듯 나를 불렀다. 나는 기운 없는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
   그 순간,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어머니 손목을 잡고 황급히 대문을 박차고 나가는 아버지 뒤로, 앞집 이층이 허리가 동강난 채 내 쪽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이미 무너진 한 쪽 담으론 벌건 황톳물이 날 삼킬 듯이 콸콸거리며 차고 들어왔다. 나는 정신없이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그대로 있다가는 압사되거나 수장될 판이다. 얼른  '월남 치마'를 벗고, 짧은 바지로 갈아 입었다. 다시 밖으로 뛰쳐나온 시간이 일, 이분이나 됐을까? 두통도 아버지도 다 잊어버렸다. 오직 여길 빠져나가야 한다는 절박감만이 나를 다그쳤다.
   대문을 막 빠져나오는 순간, 우지끈 하고 앞집 이층이 무너지면서 기둥 하나가 내 오른 쪽 어깨를 내리쳤다. 하지만 나는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 와중에서도 물은 아래로 흐른다는 생각이 스쳐, 산 쪽을 향해 뛰고 또 뛰었다. 꽤 달려온 나는 교회 처마 밑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다른 사람들도 머리를 산발한 채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그때 아버지도 어머니 손을 잡고 허겁지겁 달려오셨다. 아버지는 나를 보자 와락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리셨다. 내가 물에 휩쓸려간 줄 아신 모양이다. 이미 여러 사람이 급류에 휩쓸려갔다고 했다.
   구덕산 울창한 숲을 자랑하던 우리 동네는 태풍이 와도 다치지 않던 무풍지대였다. 그런데 이토록 큰 물난리가 나다니 믿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금이 가 있던 수원지 둑이 이번 호우로 터져버렸다고 한다. 주민들이 고쳐달라고 조를 때마다 "다음에, 다음에"하며 미루던 당국. 이미 넋이 빠진 사람들은 <당국>에 분통을 터뜨릴 힘마저 없는 듯, 풀린 눈으로 비 긋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들었던 북소리는 환청이 아니었다. 수원지 둑이 터지는 걸 본 K고교 밴드부들이 동네를 향해 미친 듯이 북을 두드려댔다고 한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마을은 급류에 휩쓸려 가버렸다.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이 바로 눈 앞에서 휩쓸려갈 때, 그 애들 심정은 어떠했을까. 가슴도 북도 다 찟겨나갔을 게다.
   빗줄기가 약해진 틈을 타 내려와 보니, 마을은 쑥대밭이 됐다. 시냇물은 황톳강이 되어 굽이치고, 주변 집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인명 피해는 더 엄청났다. 쌀집 아줌마는 막내를 구하려다 같이 휩쓸려 갔고, 우물집 아저씨는 죽어도 집에서 죽겠다는 노모와 실랑이 하다 함께 질식사 했다. 무너진 집더미에 깔려, "살려도, 살려도..."하며 애걸하던 이층집 아저씨의 목소리도 이내 사그라졌다. 더욱 애통하고 분한 것은 학교에서 되돌려 보내진 아이들의 떼죽음이었다.
   그 중에는 나를 끔찍히 따르던 태원이도 있었다. 피아노를 치고 있다가 피아노와 함께 떠내려 갔다고 한다. 세계적 테너의 꿈을 키우던 아이. '보리밭'과 '라스파뇨라'를 잘 부르고, '불 꺼진 창'까지 앵콜곡으로 불러주던 아이. 이제는 그 아이가 노랫속 주인공처럼 '뭇 주검 함께 잠들어' 버렸다. 그 아이가 죽고 없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온 천지가 '그 아이'로 채워지는 듯했다. 죽기에는 너무 빠른 열 일곱 살의 아이. 밀짚 모자와 하얀 셔츠와 오토바이가 어울리던 아이. 콧 등에 주름을 잡으며 수줍게 웃던 아이. 제 공연 티켓을 쥐어주며 도망치듯 사라지던 그 아이. 추억은 눈물을 불러오고 눈물은 또 다시추억을 불러와 두 눈엔 자꾸만 눈물이 괴어왔다. 그 사이 해가 저물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시체를 찾아 울부짖고, 어머닌 부서진 살림을 정리하느라 부산했다. 저녁 신문에는 옥상까지 물이 차 올라 빨랫대만 덩그런 이층 양옥 사진과 함께, 사망자 72명이라는 큰 활자가 오단 기사로 실려 있었다.
   이, 삼일 뒤에야 영도 앞 바다에서 몇 구의 시체를 찾아냈을 뿐, 어떤 사람은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 태원이도 영원한 바다의 음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피해가 작은 사람들은 아픔을 뒤로 한 채 복구 작업을 벌였고, 큰 사람들은 새 터전을 찾아 흩어져 갔다. 우리도 십 여 년 정들었던 수원지 마을을 떠나야만 했다. 내 집 갖기가 소원이던 어머니의 '첫 집'은 우리들의 추억을 안고 그렇게 멀리멀리 떠내려가 버렸다.
   이민 오기 바로 전인 1983년 여름. 나는 옛 생각이 나 수원지 마을에  들렸다. 고요한 숲과 맑은 수원지에 어리던 물그림자는 여전히 아름다왔다. 사람들은 우리가 예전에 했던 것처럼, 수원지 둑에 나와 담소를 나누며 저녁 바람을 쐬고 있었다. 십 년이란 세월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고통의 흔적을 지우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을까. 사람들의 표정은 평화롭기만 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나 보다.
   다만 한 가지, 자연 그대로였던 그 곳이 '번듯한' 공원으로 변해 있는 게 예전과 달랐다. 주민들의 진정을 외면하던 당국의 때 늦은 배려였다. 내 마음엔 새삼 분함도 없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태원이의 얼굴만이, 솔개처럼 하늘에서 맴을 돌았다.  
  
   비가 오면 함께 젖고, 가물면 모두가 목이 타는 작은 체구의 내 조국 땅. 피할 곳도 없는 좁은 땅덩이에서, 올해는 얼마나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가 있을는지. 돈 많고 땅 넓어 태풍 시기도 여행 온 듯 즐기는 플로리다 사람들을 보며, 내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할 수만 있다면, 넓은 땅도 뚝 떼어주고 싶고 사시장철 좋은 캘리포니아 기후도 조국에 부쳐주고 싶다.( 개정1: 09-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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