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가 있는 수필 - 그대의 창

2007.09.05 02:22

지희선 조회 수:487 추천:71

가을은 조락의 계절이다. 잎은 뿌리로 돌아가고, 익은 열매는 땅으로 떨어진다. 그것만이 아니라 사람도 간다. 저마다 한 백 년은 더 살 듯이 생각하지만 그것은 다만 희망 사항일 뿐이다.
   내 백인 손님 쏘니가 갔다. 다음 달에 보자며, 환히 웃는 모습을 뒤에 남겨두고, 예순 넷의 나이로 먼 나라 별이 되어 떠나갔다. 베벌리 힐스에서 태어나, 베벌리 힐스에서 살다가, 그 곳에서 죽은 그녀. 그녀는 뜨내기 베벌리 힐스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베벌리 힐스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얼굴에는 고향에 사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평온함이 흐르고 있었다.

   언제나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녀는 불평 불만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당신도 화를 낸 적이 있느냐며 상상이 안 된다는 내 말에, 그녀는 내 손등을 살짝 치면서 자기도 화를 낼 때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얼굴엔 선한 웃음이 가득 번졌다. 최고의 부자 동네에 살면서도, 부자의 교만함이 전혀 보이지 않던 그녀. 나는 그녀의 소박함과 수더분함이 더없이 좋았다.  단골 손님이면서도 손님 이상의 우정을 나눌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그녀의 인간성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녀의 선한 미소에 슬픔이 묻어나기 시작한 건 올 일월이었다. 느닷없이 남편이 심장마비로 떠나고부터였다. 새벽 여섯 시가 되면, 어김없이 "허니!"하고 부르며 모닝 커피를 가져다 주던 남편이 그 날 따라 일곱 시가 되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깨워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 그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그녀는 처음으로 실감했다.
  쏘니의 남편은 아내 사랑이 생활화 된 사람이었다. 그녀의 어린 날 추억을 위해서 그녀 엄마가 살던 옛 집을 다시 사 준 남자, 2년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캐딜락 새 차를 뽑아주며 모델 출신이었던 그녀의 품위를 지켜주던 남자. 늘 그녀를 존중해 주고 따뜻하게 보살펴 주던 그런 남자였다. 엄마가 하는 선물가게에서 일을 도와 주던 열 살 소녀가, 아버지 넥타이를 사러왔던 열 다섯 살 소년을 만났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True Love'를 해 왔다는 그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손수건을 쥐고 있는 그녀의 작은 손을 내 두 손으로 감싸주는 일 이외에는.
   잉꼬 부부는 저승길이 외로와서 3년 안에는 데리고 간다는데, 쏘니의 남편은 더 급했던 모양이다. 병명도 없이 한 달 동안 시름시름 않던 쏘니를 그렇게 빨리 데리고 가 버렸다. 쏘니가 떠난 것은 남편의 상을 당한 지 꼭 열 달만이었다. 나야말로 망연자실했다. 그 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때 비로소 쏘니가 지녔던 슬픔의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있었다.
   어두운 창 너머 먼 하늘로부터 별 하나가 반짝이며 들어왔다. 곁에 있는 수정달도 유난히 둥그렇고 밝다. 시월 상달도 아닌데 저토록 밝다니. 그 때 문득, 한 생각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 참 그렇지. 가슴에 사랑 하나 품고 살면 그게 별이 되고 달이 되는 게지. 그것도 일등성이 되고, 보름달이 되는 게지.'

   별이 뜨고 지며 그 자리에 있듯이 그리움도 뜨고 지며 늘 그 자리에 있는 것. 그리고  달이 차고 기우듯 그리움도 차고 기울며  보름달로 두둥실 떠오르는 것. 그리움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키 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 그대의 창>
                  
그대 없는 창에도 별 꽃은 피더이다
피고 지고 지고 피는 별꽃 송이 사이사이
얼비친 당신 얼굴이 보름달로 뜨더이다.
                
그대 있던 창에도 별꽃은 지더이다
지고 피고 피고 지던 별꽃 무덤 사이사이
당신은 그믐달 되어 밤하늘로 숨더이다
              

그대 없는 빈 창에도 계절은 오더이다
오고 가고 가고 오는 바람 같은 세월에도
당신은 내 마음 은하에 초승달로 뜨더이다.

   만약, 저 세상에서의 만남이 예비되어 있지 않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어찌 살까. 시간이 흘러 세월이 되고, 세월이 흘러 망각의 강 레테로 흘러 들어 가더라도, 마음의 창에 별 하나 심어두고 달 하나 떠올리면 유한한 우리의 삶도 그리 섧지는 않을 것 같다. 잎이 떨어져도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고, 익은 열매가 떨어져도 다음에 올 가을을 기약해 준다면, 이 조락의 가을도 그리 섭섭지 않게 보낼 수 있을 것같다.
   노란 단풍잎이 마당을 가득 채우며 가을 소풍을 떠날 채비를 한다. (개정1:09-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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