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석 줄 단상 - 고 김주열

2022.04.25 21:42

서경 조회 수:10

3. 세 줄 문장 - 고 김주열(04192022) +
 
돌에 매달려 마산 앞바다에 던져진 고 김주열.
꽃다이 타오르던 17세 목숨은 봄보다 짧았다.
‘사월의 영혼’ 그의 묘비가 미완의 봄을 떨며 운다.  

 

고 김주열 1.jpg

 

고 김주열2.jpg

(사진 : 보도 영상)

 

봄은 왔으나, 봄이 데리고 온 사월은 돌보다 차고 잔인했다. 이승만의 독재정권 12년과 3.15 부정선거는 끝내 ‘피의 화요일’ 1960.4.19 비극을 불러 왔다. 공식집계 시민 사망자 186명, 부상자 6,026명. 집계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그 와중에, 가장 잔인하게 짓밟힌 목숨은 꽃다운 나이 17세 고 김주열 학생이었다. 형과 함께 3.15 부정 선거 시위대에 참여했다가 당한 참사였다. 시위대가 몰려오자, 소방차 한 대가 인파를 가르며 질주하여 전신주를 들이 받았다. 순식간에, 암흑 천지가 되고 거리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에서 최루탄이 날아 왔다. 사람들은 이리 튀고 저리 튀었다. 꽉 잡고 뛰던 형의 손을 놓친 것도 그 순간이었다. “주열아! 주열아!!” 다급히 부르는 형의 목소리를 덮은 건 시위대의 요란한 발자국 소리와 칠흑같은 어둠이었다. 알고 보니, 주열이가 놓친 건 형의 손이 아니라 이승의 끈이었다.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것도 모자라, 그의 시신은 돌에 매달린 채 마산 앞바다에 던져졌다. 한번도 억울한데 그는 두 번이나 공권력에 위해 죽임을 당했다. 차가운 밤바다에 그를 던진 사람은 마산 경찰서 경비 주임 박종표 경위였다. 그가 누군가. 일제 강점기 때, 수많은 독립 투사들을 체포 구금하고 고문한 친일 악질 헌병보, 바로 그 사람이다. “제발 떠오르지 말아 다오! 제발 떠오르지만 말아다오!!” 박경위는 주문처럼 뇌까리며 짚차를 돌렸다. 파도는 짐짓 못 들은 채 출렁였지만 못 들은 게 아니었다. 병든 남편을 버려 두고 아들을 찾아 나선 어머니 권찬주 여사의 애끓는 호소가 하늘에 닿았나 보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시체 한 구가 떴다. 고 김주열. 실종된 지 27일만의 일이었다. 부산일보 허 종 기자는 가슴에 숨겨온 카메라를 꺼내어 급히 셔터를 눌렀다. 찰칵찰칵.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역사를 바꾸어 버릴 한 장의 사진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시신의 얼굴은 꼿꼿이 하늘을 우르렀고 불끈 쥔 두 주먹은 시간을 멈춘 채 그대로였다. 멈출 줄 모르는 시간도 그의 앞에선 옷깃을 여미었던가. 시신 부패도 거의 없었다. 신문을 본 사람들은 참혹한 모습에 치를 떨었다. 야당지지도 아니요, 여당 지지도 아닌 오직 ‘정의’를 부르짖은 대가가 이거였던가. 격로한 학생과 시민들이 전국적으로 들고 일어 났다. 경찰 저지선도 무너졌다. 그 수가 십 만이 넘었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2학년. 신마산 댓거리 바로 그 곳에 살았다. 김주열 시신이 발견된 마산 앞바다와는 지척의 거리였다. 무슨 일인지, 어머니가 “세상에! 세상에!!”를 연발하며 안절부절하셨다. 저녁 무렵부터 어디선가 우렁찬 군가가 들려 왔다. 어른들 따라 쫓아 나가 보니, 진동에서 마산쪽으로 넘어 오는 고갯길로 트럭을 탄 장정들이 끊임없이 밀려 오고 있었다. 골육상잔의 6.25 사변 후유증이 채 가시지도 않았건만, 군가가 왠 일인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목이 터져라 군가를 부르며 시내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전쟁터로 나가는 군인처럼 비장했다. 나중에야, 그 구경거리가 4.19 데모대였다는 걸 알았다. 전쟁 한번 치뤄 보지 않은 꼬맹이에겐  역사적 대사건이요 현장 체험이었다. 4월 26일.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하고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 독재자가 떠나자, 이제야 새 세상이 오는 줄 알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그 봄은 미완의 봄이었다. 게다가, 턱없이 짧은 봄이었다. 죽 쑤어 x 준다더니, 그 다음 들어선 군사 정권은 한술 더 떠 18년을 버텼다. 그 뒤로도 군사정권이 이어지며 암울한 시대는 끝날 줄 몰랐다. 권력이란 그렇게도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독버섯인가. 먹으면 죽는 줄 알면서도 기어이 독버섯을 탐했다. 민주 투사의 혈투도 계속되었다. 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87년 6월 항쟁, 2015년 광화문 촛불 시위로 이어지며 박종철과 이한열 등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값을 치루었다. 하지만,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가 최루탄에 쓰러진 ‘학우’로 바뀌었을 뿐, 근본적으로 변한 건 없었다. 권력을 맛본 기득권의 반발은 독거미처럼 집요하고 치밀했다.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 살맛 나는 대한민국. 이 소박한 꿈을 이루는 게 그리도 어려운가. “어머니! 죽어서 흙밥이 될 바에는 무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살아 생전 사람 노릇을 해서 이름을 남겨 놓아야죠!” 17세 소년이 생전에 했다는 이 말이 심장을 친다. 고 김주열은 원하던 고등학교 합격증도 사후에 받아, 교문 한번 밟아 보지 못하고 갔다. 흙밥 대신 사람 노릇 하며 살겠다던 갸륵한 소년. 꿈은 망가지고 심장은 멎었지만, 그의 영혼은 4월의 갈매기가 되어 마산 앞바다를 나른다. 모든 불순물을 안고도 썩지 않는 바다, 눈물이 너무 많아 비가 와도 젖지 않는 바다. 그런 바다를 벗삼아 오늘도 훨훨 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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