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레돈도 비치 석양은 지고

2018.05.29 04:26

서경 조회 수:45

 레돈도 비치....jpg

   오월은 아름다운 달이다. 어린이 날이 있고, 어버이 날이 있고, 스승의 날이 있다. 연이어, 21일 둘이 한 몸 이루는 부부의 날 까지 있다. 잊고 살던 정을 나누고, 불편했던 인간 관계를 회복하는 달이다. 기실, 오월은 장미가 있어 계절의 여왕이 아니라, 꽃보다 어여쁜 마음이 있어 가장 아름다운 달이 아닐까 한다.
  한국에서는 1956년부터 지켜져 오던 어머니 날이 1973년부터 어버이 날로 변경되어 올해가 마흔 다섯 번 째 어버이 날이라 한다. 미국은 1868년 주일 학교 교사였던 앤 자비스가 만든 ‘어머니 위로의 날’을 시발로 근 150년 가까이이어져 오고 있다. 
  처음엔 남북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들을 위로해 주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한다. 1905년, 앤 자비스가 죽고 끝나나 싶었던 행사는 엄마를 그리워하던 딸 애나 자비스에 의해 다시 이어졌다. 딸 애나는 교회 사람들에게 평소 엄마가 좋아하던 500 송이의 흰 카네이션을 나누어 주며 추모 행사를 벌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세계 169개국이 세상 어머니들을 기리는‘어머니 날’로 기념하고 있다.
  오월 둘째 일요일이 정식  마더스 데이로 선포된 건 1914년 윌슨 대통령 때고, 그 20년 후인 1934년 루즈벨트 대통령 시절에 와서야 공휴일로 제정 되었단다. 미국은 유월 셋째 주 일요일을 파더스 데이로 지내오고 있어 어버이 날로 묻혀버릴 염려는 없다. 
  엄마라는 이름표를 달고부터, 일년에 최소한 두 번은 딸에게 대접을 받는다. 어머니 날과 크리스마스다. 여기에 생일이 끼여야 하나, 불행히도 섣달 스무 여드렛날이 생일이다 보니 미국 온 이후로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와 12월 28일을 겹쳐 한 번 행사로 끝내 버린다. 
  어머니날은 주머니가 얇은 자식에게는 약간 부담되는 날이요, 어머니들에게는 은근히 기대되는 날이다. 바쁜 자식을 이 날만큼은 볼 수 있는 날이요, 용돈을 받아도 별로 미안하지 않는 날이기도 하다. 만나서 밥 한 끼 함께 먹는 것. 이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다음 날 소풍 가는 아이처럼 들뜨곤 한다. 
  이 곳 저 곳 물망에 올리다, 내 좋아하는 해산물과 바다 둘 다 즐길 수 있는 레돈도 비치 횟집으로 정했다. 낯선 곳도 흥미롭지만, 익숙한 곳도 나쁘지 않다. ‘함께’ 한다는 게 벌써 마음 가득 행복감을 준다. 작년에 왔을 때, 포만감에 젖어 넘실대는 푸른 파도를 바라보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터. 언제 와도 즐겁고 행복한 곳이다.
  여기 와서 먹는 메인 메뉴는 역시 스팀 게다. 작년에는 한 마리 당 $48 하는 거대한 게를 주문하여 다 먹느라 혼이 났다. 올해는 인간적으로 식탐을 누르고, 적당량을 시켜 ‘품위 유지’하며 먹기로 미리 합의를 봤다. 
  한 파운드에 $25이라고 했다. 작년보다 파운드 당 $5은 더 올랐다. 작은 게 한 마리는 주로 2파운드 가량. 큰 게는 보통 4파운드 이상이라 한다. 작은 게 한 마리면 나누어 먹기에도 딱 맞을 것같은데 눈치가 보여 큰 게 한 마리를 시켰다. 거기에, 멍게와 구운 생선, 스팀 새우와 조개, 프렌치 프라이 등을 추가 주문했다. 쫄깃쫄깃 씹히는 식감이 좋아 해삼도 먹고 싶었는데 없어서 좀 아쉬웠다. 오늘도 역시 포식하게 생겼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타고르의 바닷가의 아이들을 연상시켰다. 흰 파도는 밀려 왔다 밀려가며 아이들을 놀려대고, 아이들은 파도 너울 밟으려 바다로 뛰어 든다. 옷이 좀 젖으면 어떠랴. 캘리포니아 따가운 태양도 오늘따라 기세를 낮추어 바람 차고 쌀쌀한데 아이들은 아랑 곳 없다. 
  어른들은 그 모습을 보며 재미있어 깔깔댄다. 데리고 나온 반려견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모래펄에 제 발자국 찍기 바쁘고, 갈매기는 힘차게 창공을 날아 오르며 공중 무용을 펼친다. 
  슬픔과 기쁨을 모두 껴안고 뒹구는 바다. 모든 불순물을 안고도 썩지 않는 바다. 제 스스로 많은 수분을 지녔기에 비가 와도 젖지 않는 바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 온 나의 바다는 내게 인생을 가르쳐 준 교과서다. 높은 파도도 낮은 파도도 결코 그 정점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 그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었고 위로였다. 오늘도 흰 파도는 사모하는 섬 멀리두고 모래펄로 달려 와 그리움을 토해낸다. 밀려 왔다 밀려가는 그리움. 잊고 살다가도 가끔은 떠오르는 내 그리움도 밀물과 썰물, 늘 그와 같았다
  바닷가 아이들의 웃음소리 속에 어린 날의 내가 있고, 긴 머리 바람결에 흩날리는 해변의 여인이 있다. 아마도, 더 먼  훗날엔 젊은 날을 회억하는 흰 머리 소녀가 태평양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상념에 이어 즐거운 대화까지 섞어 먹는 해변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애초에 희망했던 ‘품위 유지’는 불가하다. 나무 망치로 쳐서 게살을 발라 먹어야 되는 건 누구에게나 예외가 아니다. 가끔은 살점이나 짭쪼롬한 국물이 상대방 얼굴에 튀니 핀잔 받기 십상이다. 이 때는 눈흘김도 애교로 받아 넘겨야 한다. 
   먹기도 바쁜데 딸은 또 사진을 찍어 댄다. 기념으로 남겨 둬야 한다나. 하긴,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어머니 날 상을 받을 지는 저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엄마, 활짝 웃어, 웃어!” 하고 독촉까지 한다. 웃을 때가 따로 있지, 지금이 입 벌려 웃을 시간인가. 이빨 사이사이 끼인 음식물을 악어새가 와서 청소해 줄 일도 없건만 웃으라니. 사진 찍을 때마다 입술을 꼭 오므린다. 걸핏하면, 페이스 북에 올려 버리니, 조심에 또 조심해야 한다. 
  이 것  저 것 맛보다 보니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배는 포만감에 찼다. 설상가상. 밀려드는 손님들 때문인지, 딸은 빨리 가서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조른다. 한 이 삼십 분 정도는 느긋하게 쉬고 싶었으나, 토를 달지 않고 일어선다. 우리 어머니도 늘 그리 하셨던 것같다. 예나 이제나  자식 앞에 왕노릇 하는 부모는 없나 보다. 끌려 가는 주제에 ‘품위 유지’는 이래저래 물 건너 간 일. 순한 양이 되어 따른다. 
  바닐라 콘을 먹으며 소요학파처럼 다리 위를 걷노라니, 저만치 수평선 너머로 석양이 지려 한다. 파도는 햇살을 받아 윤슬로 반짝이고 물살 가르는 배들도 제 집을 찾아 방향을 튼다. 낚시꾼은  즐비한데, 잡힌 고긴 많지 않다. 잡아 봤자, 먹을 수도 없는 고기. 짜릿한 손끝 맛이 좋아 잡는다는 말은 낚시꾼만이 아는 묘미겠지. 
   어느 새, 석양이 지고 태양이 남긴 빛의 흔적만이 수평선 위 하늘 색을 바꾼다. 시계는 멈추어도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간다. 슬픈 날도 기쁜 날도. 절망에 찬 날도 환희에 부풀어 오르던 날도. 다 지나간다. 그리고 그 자리는 다시 추억이란 이름으로 채워진다.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딸과 함께 보낸 아름다운 시간, 2018년 오월 둘째 일요일. 또 한 번의 어머니날이 석양 따라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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