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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는데
햇빛이 이마를 툭 건드린다
“봄이야”
그 말을 하나 하려고
수백 광년을 달려온 빛 하나가
내 이마를 건드리며 떨어진 것이다
나무 한 잎 피우려고
잠든 꽃잎의 눈꺼풀 깨우려고
지상을 내려오는 햇빛들
나에게 사명을 다한 햇빛을 보다가
문득 나는 이 지상의 모든 햇빛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강물에게 나뭇잎에게
세상의 모든 플랑크톤들에게
말을 걸며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반짝이며 날아가는 물방울들
초록으로 빨강으로 답하는
풀잎들 꽃들
눈부심으로 가득 차 서로 통하고 있었다
“봄이야”
라고 말하며 떨어지는 햇빛에 귀를 기울여 본다
그의 소리를 듣고 푸른 귀 하나가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시 감상 >

   방금 나쁜 꿈에서 잠을 깼다. 시간은 밤 12시 39분. 창밖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꿈 속에서 나는 어느 두 모녀를 만났다. 추운 날인데도 엄마는 엷은 옷을 입고 떨고 있었다. 나는 측은한 마음에 입었던 코트를 입혀주었다. 그러곤, 우리집으로 가자며 앞장서 걸었다.
   넓은 들을 건너 막 좁은 산길로 들어섰다. 입구에 웬 이상한 남자 둘이 우리를 가로막고 서서 얼굴과 사진을 대조했다. 수배된 범인을 찾고 있다고 했다.
   두 모녀는 순순히 응했으나, 나는 그들을 외면했다. 왠지 신분도 밝히지 않고 무조건 조사를 하는 그들이 못마땅하고 역겨웠다. 그들은 외면하는 나를 명령조로 얼굴을 돌리게 하더니 범인 얼굴이 맞다며 그 자리서 나를 잡아 갔다. 우리집으로 데려 가려던 두 모녀에게 채 전화번호도 못 주고 잡혀 갔다.
   취조 중 내 죄목을 알게 됐다. 그들은 내가 월급 명세서를 조작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했다는 거였다. 그런 일이 없던 나는 부인했지만, 일단 나의 신분은 미결수가 되었다. 영어의 몸이 된 나는 완전 자유를 잃고 오직 일요일 하루만 외출을 할 수 있었다.
   첫외출 허락을 받은 나는 두 모녀를 찾아 나섰다. 허름한 아파트 동네를 해가 지도록 뒤지고 다녔다. 수소문을 통해 그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겨우 찾았다. 아파트는 어둡고 허름했으나, 나를 본 그들의 얼굴은 환히 빛났다.
  나는 내 처지를 설명하고 나올 때까지 나를 기다려 달라며 부탁했다. 그들은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돌아갈 시간이라며 그들의 얼굴을 만져주고 급히 돌아 섰다. 참으로 짧은 만남이었다. 그들도 아쉬워 내 뒤를 따라 나섰다.
   그런데 아뿔싸! 돌아나오는 길을 잃어 버렸다. 길인가 싶어 달려가 보면 높은 돌담이 가로 막혀 있었다. 또 이 길인가 싶어 골목을 돌아 나가면 다시 막힌 길목이 나왔다.
   귀소 마감 시간은 밤 열시. 벌써 그 시간이 가까이 다가 오고 있었다. 마음이 초조하고 급해졌다. 제 시간에 도착 못하면 나는 탈옥범이 되고 잡히면 가중 처벌을 받는 중죄인이 된다. 마음이 급해질수록 몸도 빨라졌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담을 넘기로 했다. 두 모녀가 떠밀어 올려주는데도 내 몸은 천근인 양 무거워 실패했다. 마침, 높은 담 옆에 낮은 담이 하나 있어 천신만고 끝에 담을 넘어 큰 길로 나왔다. 하지만, 내 차를 찾을 수 없었다. 하도 골목을 많이 돌아 길이 헷갈렸다.
   어쩔 수 없다. 차를 버려 두고 달리기로 했다. 그러나 걷는 건지 뛰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느리다. 꿈 속에선 왜 그리도 빨리 뛰어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하긴, 발이 마음대로 움직이면 꿈이 아니다.
   마음이 급해서 그랬는지 속도가 붙어 발도 몸도 가벼워졌다. 겨우 감옥소에 도착했다. 이 감옥소는 궁전처럼 크고 화려했다. 불을 환하게 켜서 그런지 밤인데도 대낮처럼 밝았다.
  007 숀 코네리도 아닌데, 신출기묘하게 살풋 내려 앉은 곳은 4층이다. 아래를 보니, 기다렸다는 듯이 수많은 총구가 나 한 사람을 향해 위로 겨누고 있었다.
   여차하면, 쏠 태세였다. ‘결국 이렇게 하여 내가 죽는구나!’ 싶었다. 나는 힘껏 소리쳤다. 첫소리는 쇳소리도 아니요 쉰소리도 아닌 가라앉은 목소리로 목구멍에서 제대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다시 한번 크게 외쳤다.
   “나 돌아 왔어! 시간 안에 도착했어! 쏘지 마!”
   그 말에 모든 총이 내려지고 나는 무사히 그들 품에(?) 안겼다. 몇 시냐고 물으니, 누군가가 밤 열시 십분이라고 했다.
난 좀 퉁명그런 목소리로 “겨우 십분 늦었네!” 하며 불만스레 말했다. 십분을 못기다려, 총구까지 디밀었냐는 항의의 표시였다.
  그런데 더 가관인 건, 누군가 귀소 마감 사간이 새벽 두시라고 일려 주는 게 아닌가. “뭣이라? 그러면 좀더 있다 올 걸!”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몸에 힘이 ‘탁’ 풀렸다.
   그 순간, 나도 잠에서 깨어났다. 잔뜩 긴장했었는데 깨고 보니 꿈이었다. 허망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꿈 속에서 너무나 긴장한 탓인지, 꿈을 깼는데도 좀체 몸이 풀리지 않았다. 몸은 굳어있고 심장 작동수도 빠르다.
   바로 이런 긴장된 순간에, 이 시를 발견했다. 내가 자는 동안에 카톡으로 들어온 시였다. <아침에 읽는 오늘의 시>란 부제가 붙어 있었다. 천천히 눈으로 읽어 갔다. “봄이야” 하는 한마디가 그렇게 달콤할 수 없었다. 햇빛 한 줄기가 내 몸을 관통하며 스쳐 갔다. 그 햇빛 한 줄기는 먼 나라에서 몇 백 광년을 거쳐 달려온 빛줄기였다.
  나뭇잎 하나를 피우고, 꽃 한 송이 피우게 하려고 그는 그 수고를 마다 하지 않고 이 지상을 향해 달려왔다. “봄이야”
라고 속삭이는 그 한마디에 ‘푸른 귀 하나가 땅 속에서 솟아 올랐다.’ 얼마나 귀한 빛의 소명이며 책무인가.
   “봄이야!” 하고 속삭여 주는 따순 한 마디가 내 온 몸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한 편의 시가 주는 가없는 위로요 귀한 선물이었다. 생활의 자유를 구속 받고 바이러스 공포에 위협을 느끼며 숨 죽이고 살아가는 지금. <햇빛이 말을 걸다>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천금보다 귀한 한 줄기 빛을 주었다. 그것도 2003년도에 쓴 시라니, 우리에게 오려고 준비한 빛줄기처럼 오래 전부터 예비된 시였다. 한 편의 시로 인하여, 꿈으로 얽혔던  불안한 마음도 평정을 찾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새벽 맞을 차비를 하는 거다. 또 하루, 나에게 주어질 오늘을 맞기 위해 햇빛 마중을 가야겠다. 그러나 저러나, 새벽쯤에는 비 그치고 한 줄기 햇빛을 볼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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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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