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에세이 - 하오의 서정

2022.03.06 07:17

서경 조회 수:16


 하오의 서정 콜라보.jpg

 

  한갓진 오후. 창 가까이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제목에 끌려 어제 다른 책과 함께 사 온 최민자의 <손바닥 수필>이다. 2012년 3월에 초판된 책을 딱 10년이 지난 2022년 3월에 읽게 된 셈이다. 해저에서 유영하는 수많은 물고기 중 운 좋게 낚은 한 마리 물고기같이 반갑다.
  일찍 만나도 인연이요, 늦게 만나도 인연이다. 책도 나와 인연이 있어야 내 손에 들어온다. 아무려나. 시간의 강물을 거쳐 태평양 건너 예까지 온 책을 조심스레 펼친다. 뒷표지에 적힌 ‘왜 쓰는가, 왜 나는 쓰고 싶은가?’ 첫줄에 눈이 갔다.  
 
  - 무엇이 되고자 해서, 허명이라도 얻고자 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내가 추는 시간의 춤이어서 허무에 대항하는 내 삶의 양식이어서다. … 
 
  ‘어라? 이건 나와 동감인데?’하는 생각을 하며 목차를 훑어 갔다. 크게 다섯 장으로 나뉘어진 85편의 수필이 쌈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손바닥 수필>이라 해서 완전 단수필인 줄 알았는데, 제목 치고는 짧지 않았다. 일반 수필만큼 긴 작품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정제된 표현으로 짤막짤막하게 쓴 글들이 주를 이루었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세상에 맞춤형 수필이랄까. 정적이면서도 지적이라는 피천득 선생의 서평에 고개 끄덕이며 읽어 나갔다.
  한참 책을 읽어 나가는 중에 어디선가 짹짹 참새 소리가 들렸다. 눈을 들어 창밖을 보니, 세상에! 처마 밑 장식으로 달아둔 조그만 새집에 참새란 놈이 들어 앉아 나를 보며 갸웃대고 있었다.
  고요타 못해 적막하기까지 한 하오의 시간. 녀석도 심심했던 것일까. 하도 귀여워 누운 채로 사진 한 장을 찍어 주고 얼른 밖으로 나갔다. 글감이 나올 듯하여 제대로 된 사진 한 장을 찍고 싶어서였다.
  여긴, 올리브 가로수에 아름드리 소나무와 뽕나무도 많은 시골집이다. 그 튼실한 가지 다 두고 하필이면, 장식으로 달아둔 ‘오두막 새집’으로 날아들다니! 푸른 창공을 나르는 무한 자유의 새도 때로는 공간적 제한을 받는 집에 아늑함을 느꼈던가? 그 모습이 내 심상에 느낌표와 물음표를 찍었다.
  아뿔사. 내 동작이 느렸던가. 그 녀석이 빨랐던가. 나가자마자, 녀석은 나 잡아 보라는 듯이 푸른 창공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떠나버린 새, 사라진 새. 오두막 새집은 다시 빈 집이 되었다.
  “돌아 올까?” 빈 창공을 보며 혼잣말로 중얼댔다. 이 가지 저 가지 날아다니는 바람군 새들도 때 되면 집을 찾아 든다니 한번 믿어나 볼까. 착하다 못해 어리숙한 여인네 심사가 된다. 빈 오두막집 사진 한 장을 찍고 다시 들어 왔다. 마침, 읽고 있는 책의 첫번 째 작품 제목이 ‘사라진 것들의 마지막 처소’였다.  
 
  - … 날 밝기 전, 교회를 떠나간 종소리들은 해질녘이면 슬그머니 종루 안으로 기어들곤 했다. 반겨주는 이가 없어서일까. 저녁답의 종은 더 길게 울었다.
  - … 종소리는 어김없이 돌아 왔지만 집 나간 백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노래, 돌아올 줄 모르는 강아지, 멀어져간 얼굴, 떠나버린 시간, 사라진 것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 …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 밤, 내 안 어디 컴컴한 그늘에서 홀연히 살아오는 옛친구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사라지는 것들도 종소리처럼 슬그머니 돌아 와 숨는 것인가.
  - … 떠나간 것들이 다 돌아와 숨는, 사람의 안뜰이 가장 넓은 우주다. 가장 깊은 블랙홀이다.  
 

  사람의 안뜰이란 마음의 정원이리라. 방금, 내 창가에서 기웃대던 녀석. 저도 늙고 나도 늙어버린 먼 훗날, 외로움 앞세우고 다시 날 찾아 오려나. 그럴 때면, ‘한갓진 어느 봄날 오후,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하고 나도 반길 테지. 삶은 고달파도 추억은 아름다운 것. 사소한 일조차 아름다운 풍경으로 떠오를 때, 그 속 주인공은 누구일까.
  어스름 저녁. 해지면 어김없이 찾아드는 순한 소처럼 산그늘이 문을 들어 선다. 사위의 풍경이 조금씩 지워지자, 외려 마음 뜰안이 밝아진다.
  상기도 반짝이는 정인들이 하나 둘 별처럼 돋아난다. 모두 저만의 만남과 이별, 사연들을 지니고 색색의 꽃으로 피어난다. 이별의 아픔인가, 추억의 그리움인가. 오늘 따라, 세월의 바람이 쓸고간 마음 뜨락에 싸리비 자국 선연하다.  
  가물대는 얼굴이여, 혀 끝에 맴도는 이름이여! 가사를 잊어버린 곡조여! 재가 되어버린 추억이여! 사라지고 잊혀진 모든 것들아, 어서 돌아 오라! 모두 모두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와, 메마른 내 뜨락에 샛노란 꽃등을 밝혀 다오.    (2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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