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리에 내리는 비 1.jpg

이태리에 내리는 2.jpg

 

비는 땅만 적시지,
왜 내 맘까지 적시누... 
 
비는 오늘만 적시지,
왜 어제까지 적시누... 
 
비님은
좀 웃으시지
왜 맨날 맨날 우시누...           
(사진 : 윤정애) 
 
  어른이 된 내 초딩 친구는 지금 무슨 이름으로 불릴까? 나는 저를 ‘정애’라 부르고, 저는 나를 ‘희선’이라 부른다.
  이 세상에 사람들, 수십 억이라는데 저를 ‘정애’라 불러대는 사람 몇 있으며 나를 ‘희선’이라고 불러주는 사람 몇 있을까. 아마, 열 손가락 펴서 세어 봐도 몇 개는 남을 걸?
  그래......, 그래서, 우리는 어깨 동무 씨동무다. 추억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정애는 잊을 만하면 찾아내고, 이젠 영원히 못 만나나 하면 나를 또 찾아 내서 놀래켰다.
  지구촌 하고도 대한민국, 대한민국 하고도 마산, 마산 하고도 신마산. 세 갈래 길이 만나는 버스 종점 댓거리에서 우린 만났다. 아마도 고무줄 뛰기, 땅 따 먹기, 사방치기, 오방치기도 같이 하면서 놀았겠지.
  초등 1학년부터 3학년까지, 한 동네 같은 월포 초딩 친구였다. 그녀는 3학년 끝나고 전학 가 버리고, 나는 4학년 끝나고 대도시로 전학 가 버렸다. 그녀가 5학년 때 다시 월포로 돌아 왔을 때 나는 거기에 없었다.
  그 이후로 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난 여고 2년생이었다. 한 통의 편지가 우리 학교 내 이름 앞으로 날아 왔다. 내 성이 전교 세 명밖에 없는 희성이라, 학년만 쓰고도 내게 전달되었다.
  구구절절이 우리가 함께 보낸 초딩 3년의 추억을 적어 보냈다. 하지만, 내 희미한 기억으로는 그 친구를 떠올릴 수 없었다. 미안했다. 사진을 보내 보라고 했다. 사진이 왔다.
  아하, 이 친구! 저네 언니랑 우리 언니랑 같은 중학 같은 학년에, 저네 오빠랑 우리 오빠랑 같은 월영 학교 같은 학년에, 저랑 나랑 같은 월포 학교 같은 학년에 다니던 바로 그 친구였다! 그 이후로 그녀는 참으로 열심히, 알뜰살뜰히도 예쁜 편지들을 보내 주었다.
  60년이란 세월 속에 우린 서로 여러 번 잃어 버렸다. 그때마다, 그 친구는 기어이 나를 찾아 냈다. 신문에 난 내 글을 보고도 찾아내고, 학교 친구를 통해서도 찾아 내고, 이민 오기 전에는 내 학교 후배를 통해서도 찾아냈다.
  어떤 땐, 2년이나 3년이 걸렸고 때로는 5년도 걸렸다. 나는 감동했다. 내 무엇이관데, 어느 누가 있어 그토록 집요하게 나를 찾고 싶어 할까.
  1983년 8월, 미국으로 이민 오기 직전 그녀는 극적으로 나를 찾아 냈다. 독일에 살고 있던 그녀는 그 전 해에는 나를 찾지 못하고 되돌아 갔단다.
  소식을 끊고 살다시피한 나였지만, 언제 다시 올 지 모르는 이민 길을 떠나는지라, 학보사 주임 교수님께 인사 드리러 갔던 게 하나의 끈이 되었다.
  먼저 후배가 마중물 전화를 걸어 왔다. 누가 학보사로 나를 찾아 왔다고, 전화 바꾸겠노라고. 그녀가 자기 이름을 대기도 전에 “정애가?”하고 물었다. 그녀는 “말도 하기 전에, 어떻게 난 줄 아냐?”하며 화들짝 놀랐다.
  나는 말했다. “너 아니면 이 세상에서 날 찾을 사람 한 명도 없다!”고. 그녀가 깔깔대고 웃었다. 아마도 목젖 다 보이도록 웃었겠지. “너가 만약 남자라면, 난 아마 너랑 결혼했을걸? 야! 빨리 집으로 와라! 나 며칠 뒤 이민 간다!” “알았어!” 그녀는 빛의 속도로 달려 왔다. 

   우리는 다시는 잃어버리지 말자며 서로의 연락처는 물론, 만약을 대비하여 사돈 팔촌까지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 가끔 연락은 주고 받았지만, 우리는 그 이후로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다. 37년이란 세월이 흘렀어도 그녀의 하이소프라노 웃음 소리는 아직도 내 귓가에 여울진다.
  그녀는 이태리에 거주하는 한국인으로서 패션 대모 쯤 되는 듯하다. 내노라 하는 모델과 유명인들이 친구 가게에 왔다갔다 하고 이태리 신문을 장식하는 걸 보면. 그녀는 지금도 여전히 커리어 우먼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업계의 인정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저는 한국을 제 안방 드나들 듯하지만, 비지니스 우먼이 아닌 나는 ‘놀기 삼아’ 한국을 찾아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다. 특별한 건수가 있어야 겸사겸사 나간다. 자연히 저랑 시간이 맞지 않아 지금껏 페이스 북을 통해서만 만나고 있다. 촌스럽게도 페이스 북이 뭔지도 모르는 내게 그녀가 페이스 북으로라도 만나자며 제의해 와 어쩔 수 없이 등록했던 게 7년 전이다.
  나는 지금도 촌스럽게 SNS 소통법을 잘 모른다. 언젠가 그녀가 페이스 북에서 “희선아~”하고 부르기에 “와아?”하고 장난스레 대답했더니, “걍! 불러 봤어!” 한다. “걍? 걍이 뭐꼬? 무슨 말이고?”하고 물었더니, ‘그냥’이란 말을 줄인 거란다.
  햐아! 그 애는 이런 말을 쓰는구나 싶어 신기했다. 저도, ‘어린 날에는 여포창날 같이 빠르고 똑똑했던 친구가 와 이리 촌스럽노’ 싶었을 거다.
  명색이 국어 선생 출신인데 난 ‘걍’이 ‘그냥’의 준말인 줄도 모르고 살았다. 사용하지는 않아도 글 쓰는 주제에 ‘언어의 생성과 소멸’은 알아야 쓰지 않겠나. 나도 멋적어 실소했다. “그래, 낼 모레 할매가 될 가시나가 젊은 애들이 쓰는 말을 아직도 쓰고 있나?!” 하고 물음과 책망 반반 섞어 농을 했다.
  오늘도 딸 때문에 하지도 않는 인스타그램에 들어갔다가, 비오는 정경을 올린 그녀의 사진을 보고 이 글을 쓰는 중이다. 추억을 사랑하는 그녀! 별 대단한 풍경거리도 아닌데, 그녀의 사진 한 장이 나로 하여금 추억의 옛길로 돌려 세운다.
  그녀의 어린 날 속에 단발머리 가시내 내가 있고, 내 초딩 시절의 유일한 친구로 그녀가 있다. 그녀와 내가 함께 걸어 나온 추억의 통로. 우리는 서로를 놓치면 어린 날의 추억마저 놓칠까 봐, 참~ 모질게도 오래 우정의 끈을 붙들고 있다.
  죽기 전에 우리 한 번 볼 수 있을까. 어쩌면 못 보고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죽고 그녀가 산다면, 비록 눈물이 말라 없다 하더라도 가슴으로라도 울어 주겠지. 만약, 저가 죽고 내가 남는다면 나 또한 그러 할 테지.
  오늘 이태리에는 땅에 비 내리고, 이 미국엔 가슴에 비 내린다. 촉촉히 젖는 가슴. 대체로 외로운 삶이지만, 오늘은 그녀를 떠올리며 잠시 그 외로움 머리맡에 밀쳐 두고 싶다.
  정애야! 부디 건강하고 행복해라. 고맙다, 친구야! 날 귀한 친구로 대접해 줘서. 사랑한다!  ‘영원’은 이 지상에 없으니, ‘영원히’란 꾸밈말은 생략할게!         (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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