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난 몰라 난 몰라

2020.04.28 15:07

서경 조회 수: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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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청춘 남녀가 있었다. 꽃보다 빛나고 아름다운 청춘이었다. 그들은 단숨에 사랑에 빠졌고 아낌없이 사랑했다.
  그녀가 미국 유학 길에 올라 눈에서 멀어지자, 그는 보고 싶은 마음에 숨이 막혀버릴 지경이었다. 그는 곧  태평양을 건너 왔고 사랑은 무르익어 결혼이란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봄 가고 여름 가고 계절이 오가는 사이, 그들에겐 세 명의 공주님이 태어났다. 명랑 쾌활하고 재기발랄한 아이들로 가는 곳마다 사랑을 독차지했다. 엄마 아빠 사랑 먹고 크는 아이는 사랑을 줄 줄도 아는 착한 아이들이었다.
  아빠는 아내를 끔찍이 사랑하고 딸들을 아끼는 자랑스런 가장이었고, 성당에서는 성가단장으로 누구보다 탁월한 능력과 열정을 지닌 봉사자였다. 아내는 소녀적 장난기와 재치있는 재담에 연체동물같은 춤사위로 전천후 엔터테이너였다. 이 가족이야말로, 행복의 절정을 향하여 거침없는 하이 킥이었다.
  아,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시지! 완전한 행복은 어쩌면 이리도 쉬이 깨뜨려질 수 있을까.
  어느 날, 회사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연락이 왔다. 불의의 안전사고로 그가 병원에 실려 갔단다. 아내는 귀를 의심했다. 그토록 조심스럽고 꼼꼼한 사람이 왜? 무슨 일로? 병원을 향해 달리는 길이 헷갈리고 멀기만 했다.
  의식을 잃은 그는 산소 호흡기를 매단 채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의 애끓는 울음소리를 듣기라도 한 걸까. 아이들 쪽을 보고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의사는 리액션이라 달래지만, 아빠가 살아 있다고 딸은 소리치며 운다.
  밤낮 사흘을 혼수 상태에 있던 그는 끝내 먼 여행길을 홀로 떠났다. 그가 흘린 눈물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사였다. 함박눈처럼 펄펄 날리던 웃음도, 그토록 다정하고 사랑스런 목소리도 함께 사라졌다. 지상에서 영원으로. 그러고 보면, 영원도 한 순간이었다.
  막내 딸아이는 숨이 넘어 가도록 울어대며 “아빠, 내가 말 안 들어서 그래? 나 궁뎅이 멤매 해 줘, 멤매! 우유도 잘 먹고 일찍 잘께!”하며 엉덩이까지 디민다. 용서라도 청하면 혹 아빠가 살아올까 봐 딸아이는 목놓아 울었다. 살아 생전에 때린 적이 없는 자상한 아빠였다.
  아이들은 남편 잃은 엄마가 불쌍하다고 울고, 엄마는 아빠 잃은 아이들이 가슴 아파 울고. 보는 사람은 그 모습이 측은해서 울고. 그야말로 통곡의 바다였다.
  그의 나이, 팔팔한 46세! 떠나기엔 너무 젊은 나이였고 가진 재능과 사랑은 너무 많아 차고 넘쳤다.
  그가 떠난 지 이십 년. 해는 지고 해는 떠서 세월은 흘러 갔다. 시간은 잔인하나 세월은 너그러웠다. 비수가 스쳐간 가슴엔 실금이 있건만, 그 슬픔 간직한 채 아이들은 숙녀가 되어 제 짝을 찾아 떠났다.
  모두 명문대를 나와 명문가로 시집을 가 상위 1%의 삶을 누리고 있다. 아마도 천상에서 아빠가 복을 듬뿍듬뿍 내려준 지도 모른다. 딸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짝을 이루고 금쪽 같은 손자 손녀까지 안겨 줬으니 남편 잃은 슬픔이 잦아들만도 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와의 싸움으로 발버둥쳤다. 그녀는 슬픔을 잊기 위해 신학 공부를 하고 선교 목사가 되어 세계를 떠돌았다. 남편은 처처에 살아, 그녀가 가는 곳마다 따라왔다.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돌아 보면, 세월이 어떻게 흘러 갔는지 알 수가 없다. 겉으로 보면, 누가 뭐래도 누릴 거 다 누리고 사는 복된 노후다. 허나! 그에겐 그토록 사랑하던 남편이 없다. 이전의 일상으론 절대로 돌아갈 수가 없다.
  이십 년간 한번도 잊은 적 없는 남편.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순간에 명인에 의해 깨진 도자기는 새 도자기로 태어나지만, 한번 깨진 행복은 복원할 길이 없었다.
  먼 길 돌아온 그녀는 흰머리 소녀로 거울 앞에 앉았다. 거울 저쪽의 그녀가 말했다. “수고 했어! 이제 좀 쉬어!” 그녀도 쉬고 싶었다. 안식년을 맞아, 골프를 치고 맛있는 걸 먹고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러나 도무지 흥이 나지 않았다.
  세속의 즐거움은 마음의 내적 기쁨까지는 주지 못했다. 마침, 코로나 19. 비상사태 선포로 외출은 금지되고, 주님은 그녀를 책상 앞에 앉혔다. 넋두리라도 좋다. 삶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라는 소명이다. 범사에 감사다.
   그녀는 지난 날을 회고하며 회상기를 쓰고 있다. 눈물의 회상기다. 쪽지 하나, 영전에 띄운 편지 한 통, 침대에서 흐느끼며 쓴 지난 글들 위에 다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글자마다 추억이요, 행간마다 사연이다. 생로병사. 네 글자로 정리 되는 싱거운 삶인 줄 알았는데, 왜 그리도 사연이 많은지 대하 소설이다.
  누가 봐도 아까운 사람이요 멋진 남편이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고 보상받을 수 없는 슬픔이 밤새 눈을 퉁퉁 붓게 한다. 천상에서 남편이 보고 슬퍼한다고 기쁘게 살라 해도 그녀는 주르륵 눈물을 흘릴 뿐이다.
  오늘은 내게 지난 날 써 놓았던 글이라고 노래까지 흥얼대며 읽어 준다. 입술엔 장난기 있는 미소가 감돌지만, 눈가엔 어느새 이슬이 맺힌다. 그 모습이 왜 이다지도 내 가슴을 에이게 하는지. 부재의 슬픔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듣는 나도 눈물이 괴어 오고 “아깝다, 정말 아깝다!”는 말만 반복했다.
  젊은 날, 그들은 패티 김의 ‘사랑하는 당신이’란 노래를 즐겨 불렀다고 한다. 침대에 누워 둘이 마주 보며 멜로디를 맞추어, 고개까지 까딱까딱하며 불렀으리라. 장난삼아, 재미삼아 불렀던 사랑의 노래가 이토록 가슴 아픈 추억이 되어 그녀를 울릴 줄이야! 
 
  - 사랑하는 당신이 울어 버리면 난 몰라 난 몰라.
  - 사랑하는 당신이 화를 내시면 난 몰라 난 몰라
  - 사랑하는 당신이 죽어 버리면 난 몰라 난 몰라
    나만 혼자 남아서 살 수 있을까 난 몰라 난 몰라
    아니 아니 나도 같이 따라 갈 테야
    사랑하는 당신 곁으로 ~
    둘이는 나란히 잠이 들 거야 
 
    이렇게 살다 가자고 약속했단다. 실상, 남편을 잃은 그녀는 금방이라도 따라갈 태세였다. 아이들더러 백인 양부모한테 가서 살면 더 행복하지 않겠느냐며 떠밀었다. 아이들은 아빠도 없어 서러운데 엄마까지 그러니 더욱 서럽게 울었다. 그때 큰 딸아이가 울음을 그치곤 똑 부러지는 소리로 항의했다. 큰 딸아이는 학교에서 수석을 놓친 적 없는 재원에, 동생이라면 금쪽같이 아끼던 언니였다.
  “엄마는 남편을 잃었지만, 우린 아빠를 잃었어요! 엄마까지 없다면, 우리가 세상을 제대로 살 수 있을 것같아요?”
  넋이 반 나갔던 그녀는 그때사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안하다를 연발하며 아이들을 부둥켜 안고 울었다. 아이들! 그래, 그녀는 아이들 때문에 살아야 했다. 그녀가 옛날에 써 두었다는 글의 마지막 문단이 찡하다.  
 
  - 당신 지금 어디에 있어요. 미치도록 보고 싶어요. 바보 바보, 나 혼자 두고. 세월아 빨리 빨리 가거라. 아이들도 빨리 커서 시집 가고 나도 빨리 늙어서 당신 곁에 갔으면 좋겠다. 이젠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걱정이 안된다. 여보야, 까짓 것! 죽기까지밖에 더하겠어, 하는 뱃짱이야.  
 
  오래 전에 올렸던 소원을 주님보다 세월이 먼저 듣고 와 기다리고 있다. 흙뿌리 부여잡고 굽이쳐 흐르던 세월의 강도  넓은 포구에 이르러 느릿느릿 흐른다. 바다가 저만치 보인다. 강과 바다의 합일도 얼마 남지 않았다.
  목숨은 모질고 값지다. 그녀는 살아 있고 아이들도 살아 있다. 살아 있기에 옛날을 추억하며 그들은 다시 울 수 있다.
아이들은 지금도 자기들을 버리려했던 엄마를 이기적이라며 가끔 원망하지만, 앞다투어 모시려 경쟁을 하는 효녀들이다.
  아낌없이 사랑했던 두 사람. 지상에서 못다한 미완의 사랑, 천상에서 이루길 두 손 모아 빈다. 비수로 실금 그어도, 가슴 시린 사랑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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