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구리 풍경(수정)

2008.01.23 00:03

지희선 조회 수:1069 추천:97

              
      요즈음 나의 하루는, 처마 끝에 달린 구리 풍경과 함께 아침을 열고 저녁을 닫는다. 유타주에 있는 구리산에 들렀다가 여행 기념으로 사 온 풍경인데 단돈 사십 불에 산 놈 치고는 제 값 이상이다. 방안을 기웃대며 사랑의 교신을 보내오면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산사나이가 산을 향해 달려가듯, 뱃사나이가 푸른 해원을 향해 돛을 올리듯 내 마음은 구리 풍경으로 부풀어 오른다.

우선, 모양새가 시중에 나도는 알루미늄 풍경같이 얄팍하지 않고, 구리의 중후한 멋을 지니고 있어 마음에 든다. 게다가, 그 청아한 목소리라니. 추처럼 가운데 드리워진 삼각형 나무 원판을 중심으로 길고 가는 여섯 개의 몸체가 어우러져 내는 소리는 실로 천상의 음색이다.

속을 비웠기 때문일까. 사운대는 잎의 속삭임 같이 크진 않으나 긴 여운을 남기는 노래. 때로는 댓잎의 노래로, 더러는 갈잎의 속삭임으로 촉촉이 가슴을 적셔온다. 귓가에 날아와 여울지며 흐르는 풍경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아름답다 못해 애닯기까지 하다.

새벽에 듣는 소리가 다르고, 한 밤중에 듣는 소리가 다르다. 전자가 전깃줄에 팔분음표를 찍고 있는 명랑한 아침 참새를 연상시킨다면, 후자는 길 떠나는 철새를 연상 시킨다. 계절 속에 흐르는 풍경소리도 제 각각이다. 가을엔 바이올린 현의 떨림 같이 애상에 젖게 하고, 겨울엔 칼바람을 맞고 선 겨울나무처럼 묵상에 잠기게 한다. 그러다가 바람 자는 날에는 여섯 개의 몸체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침묵에 빠져 사념에 잠기게 한다.

그런 날의 풍경은 나보다 먼저 침묵의 무게와 값을 익혀버린 듯하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살며시 띄워 보낸 눈웃음 하나가 얼마나 가슴을 요동치게 하는지, 높은 웃음소리보다 눈가에 어룽어룽 맺히던 눈물이 또 얼마나 가슴을 파고 드는지 풍경은 잘 알고 있다.

조용히 침묵하고 선 풍경을 볼 때마다, 나는 내 어깨에 잠시 내려앉았다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던 첫눈의 잔상을 떠올리곤 한다. ‘멀리 있는 사람, 멀리 두고 그리워하자하고 단단히 다짐하며 미동도 없이 서 있는 풍경. 만날 수 없음에도 그리움이 깊어갈 때면 나도 그런 모진 결심을 할 때가 있다. 즐거운 나날 사이사이 슬픔이 비칠 때, 차라리 체념의 미덕을 익히는 거다.

나와 아침 저녁으로 교감하고 있는 풍경을 보면, 때로 창조주가 된 기분이다. 창조주가 흙에 숨을 불어 넣어 한 생명을 만들었듯이, 무생물에도 사랑을 불어넣어 주기만 하면 생명이 된다. 처마 끝에 걸려 끊임없이 사랑의 교신을 보내오는 구리 풍경은 더 이상 차가운 금속이 아니다. 푸른 혈맥 속에 더운 피가 흐르는 생명체다.

장닭이 긴 울음 우는 한갖진 오후엔 , 풍경도 거들어 소식 알 길 없는 옛님 생각으로 상념에 잠기게 한다. 설레임 안고 만났다가 아쉬움 안고 돌아서던 나날들. 그 때는 무슨 설움 그리 많아 울 일도 많았던지,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자주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럴 때면, 그는 오히려 실컷 울라며 기다려 주었다. 기다려준다는 것. 그 때는 그것이 그가 줄 수 있었던 가장 큰 사랑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미국 떠나오기 전 날. 서른 즈음의 우린 서로의 행운을 빌며 헤어졌다. 한 사람은 머뭇거리다 행운의 일곱 번 째 택시를 타고 떠나 와야 했고, 또 한 사람은 언제까지나 어둠 속에 홀로 남아 있어야 했다. 지극히 유아적인 나를 큰 사람으로 성숙시켜 주었음에도 그는 해 준 게 하나도 없다며 마음 아파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머물러야 이루어지는 사랑을 애써 외면하며 지역적 거리감을 위해 공간 이동을 결심했을 때, 마음은 차라리 홀가분했다. 갈등과 위기의 절정이 대단원의 막을 향해 달리던 그 날. 그 날 따라 창밖엔 왜 그리도 바람이 자지러지게 불던지. 내 마음 속에 댕그랑거리며 금속성 울음을 울던 그 풍경이, 여기까지 따라와 조석으로 날 불러낼 줄이야.

할 수만 있다면, 한번쯤은 다시 만나 유아적인 내 행동에 대해 사과하고 받기만 했던 큰 사랑에 대해 감사해야 마음의 빚을 덜 것같다. 바람 따라 조석으로 울리는 저 풍경도 마음의 무게로 남아 있는 내 사랑의 미션을 일깨워 줌이라 믿고 싶다.

이른 새벽엔 아련한 봄비로 찾아와 날 깨워주고 깊은 밤엔 불 꺼진 창 밖에서 홀로 밤을 지켜주는 나의 구리 풍경. 내가 배반하지 않는 한, 결코 먼저 배반할 리 없는 든든한 님이다. 영원을 다짐하지 않아도 영원으로 이어질 그런 사랑을 나의 풍경은 지니고 있다.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나 흙이 묻는다지만, 다시 한 번 영원한 사랑에 대해 로망을 가져보는 거다. 멈추는 날 올지라도, 아름다운 사랑의 꿈 잃지 말라고 일러주는 저 풍경의 잠언. 가슴에 깊이 담아야 할까 보다.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바람 자면 바람 자는 대로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사는 모습이 큰 선생을 얻은 듯 귀하다. 때로는 큰 스님 법문으로 다가와 옷깃을 여미게 하고, 더러는 자연의 설법으로 일렁이는 마음의 풍랑을 잠재우기도 하는 구리 풍경. 금처럼 찬란하진 못해도, 은처럼 빛나진 않아도, 시간이 지날수록 푸르를 구리 풍경을 보며 나는 이런 서툰 노래를 바치기도 했다.

 

네 마음 수초처럼 바람에 흔들릴 때

내 마음 사랑 병에 이 밤을 앓고 있다

삶이란 요람 속 아기처럼 흔들리며 커는 것.

 

지금도 눈 감으면 구리 광산의 그 거대한 모습이 떨림으로 다가온다. 한 인간의 도전 정신이 빚어놓은 그 웅장한 역사. 그때 나는 처음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전성은 무한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화산 분화구 같이 뻥 뚫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산 무더기. 천 년 묵은 구렁이가 몸을 틀고 앉은 듯, 지하 수 천 피터를 뱅글뱅글 돌아 파내려간 길. 그 뱀띠 길로 개미처럼 기어 오르며 광석을 실어내던 수 백 대의 트럭들. 아득히 내려다 보이는 로마의 원형 극장 같던 분화구에 서면 우린 한 점 점으로도 찍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때의 감격이 구리 풍경을 보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그 어두운 광맥 깊숙이 묻혀 천 년을 넘게 기다리다가, 어느 장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져 세상 구경을 하게 된 구리 풍경. 그 기다림도 모자랐는지 다시 바람에 흔들리며 긴 날과 밤을 지새운 뒤에야, 이 작은 동양 여행객의 손에 닿았으니 그 끈적한 인연의 고리만 생각해도 예사 인연이 아니다. 유독 인연설에 목 매는 나. 그래서 더욱 구리 풍경에 정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남은 날도 그와 더불어 끊임없는 사랑의 교신을 나누며 아름다운 삶을 가꾸고 싶다. 청아한 목소리로 내 삶을 노래하기 위해서는 구리 풍경이 그러했듯이 긴 기다림의 자세로 마음 비우는 작업부터 해야 할까 보다. 욕심 같아서는, 구리 풍경같이 수더분한 친구도 한 두 엇 두었으면 좋겠다. 시간이 흐를수록 청동으로 푸르를 그런 우정을 키우고 싶다.

댕그랑 댕댕. 풍경이 울고 바람 불어 좋은 날이다. 삶도 바람이 불어야 노래가 된다. 처마 끝 구리 풍경이 서로 살 부비며 내는 노랫소리에 내밀한 음성 들려오는 듯하다.

                                                                  (199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작품 후기>

 

작품 <구리 풍경>1999년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이다. 구리 풍경은 유타 주 엘로우 스톤 여행을 하던 중 구리산에 들려 사온 여행 기념품이다. ‘구리가 주는 어감은 금이나 은이 주는 어감과 또 다른 친근미가 있다. 금이나 은처럼 각광 받는 스타들보다는 늘 아웃사이더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는 딱 맞는 물건이다. 옐로우 스톤 여행의 백미라 할 만치 구리 풍경의 원산지인 구리산은 거대함으로 나를 압도했다. 땅 속 깊숙이 묻혀 있던 광석들이 트럭에 실려 꼬불꼬불 뱀띠 길을 따라 올라오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묻혀 있던 원석이 제련되어 우리 집 처마 끝에 풍경으로 달려 있으니 감회가 남다르다. 게다가, 그 청아한 노랫소리는 귓가에 여울지고 가슴을 울렁이게 하니 수필 한 편 절로 나온다. 뿐인가. 그의 침묵까지도 내 사유의 벗이 된다. 눈 뜨면 가장 먼저 들려오는 풍경 소리. 나는 <풍경 소리고>란 제목으로 13편의 단시조를 써서 1999<현대 시조>에 등단하기도 했다. 단돈 $40에 사 온 구리 풍경은 신춘문예 수필 당선과 시조 등단의 기쁨을 동시에 선사한 고마운 친구다. 이렇게 좋은 친구가 있다면, 보쌈이라도 해 와야 하지 않을까. 여러분, 창 밖에 '풍경' 하나 걸어 보세요. 여러분 마음에도 아름다운 풍경 소리 울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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