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헌팅톤 비치 마라톤

2019.02.15 01:30

서경 조회 수:25

헌팅톤 비치 2019.2.jpg



   간밤에 그토록 내리던 비가 그쳤다. 다행이다. 오늘은 헌팅톤 비치 마라톤과 수퍼 볼 시합이 있는 날. 두 가지 다 우중 속에 치르기엔 낭패스런 일이다. 3년 전, 우박비를 맞으며 질퍽거리는 빗속을 달린 OC 마라톤은 최악의 마라톤 대회로 기억된다. 
  새벽 2시 반부터 설치던 잠을 털고 4시 반에 집을 나섰다.
다섯 시 이후에는 파킹랏이 풀로 찰 거라는 말을 들은 터라, 일찌감치 출발을 서둘렀다. 하프 마라톤을 여덟 번이나 뛰었지만, 혼자서 시합 장소를 찾아 가긴 처음이다. 불안했던 마음과는 달리, 길은 멀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고 각 팀들은 텐트를 치느라 분주했다. 뛰는 선수들보다 늘 서포터 팀이 더 빨리 움직여야 하고 바지런해야 한다. 
  우리 해피 러너스 팀도 송두석 서포터 팀장을 위시하여 열 명이 넘는 봉사자들이 참여했다. 텐트를 치고 깃발을 세우고 한 쪽에서는 커피 물을 끓이느라 분주하다. 
 풀 마라톤은 새벽 여섯 시 반에 출발하고, 하프 마라톤은 일곱 시 사십 오분에 출발한다고 했다. 저마다, 얼굴엔 기쁜 표정이 역력하고 울리는 밴드의 음악은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3만 명 가까이 뛰는 헌팅톤 마라톤에 우리 팀은 30명이 참석했다. 3월에 있을 LA 마라톤이 우리 팀의 공식 마라톤이라 대거 참석하기에 오늘은 주로 하프 마라톤 참석자들이 많다. 
  얼마 전까지 몸이 찌부둥하고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데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런지 몸도 마음도 가볍다. 마일당 평균 12-13분대로 잡고 편안하게 뛸 생각이다. 
  페이스 메이커랑 뛰는 게 부담스러워 늘 군중 속에 묻혀 나홀로 뛴다. 이 생각 저 생각하며 뛸 때도 있지만, 대체로 아무 생각없이 ‘그냥’ 뛸 때가 많다. 무념무상. 발이 바쁘게 움직일수록 생각은 절로 비워진다. 
  헌팅톤 비치 마라톤은 5년 전, 첫 마라톤을 뛴 곳이고 좋은 기록을 올린 곳이라 내겐 각별히 애정이 있는 코스다. 바닷가 경치도 아름다운데다가 비도 그쳐 기분 좋게 출발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이것이 러너들의 최대 희망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하염없이 달려야 한다면 그건 분명 형벌이다. 우리 인생길도 시작과 끝이 있기에 달려볼 만하다. 속도 조절은 각 자가 하는 법. 달리기도 삶도 제 인생 제가 책임져야 한다. 
  6마일쯤 지나자, 그쳤던 비가 바람에 실려 와 몸과 거리를 적시기 시작했다. 이 정도 가는 비쯤이야 맞아 줄 만하다. 모자를 벗었다. 시원한 빗줄기를 얼굴에 받고 싶었다. 비를 맞으니 열도 식고 땀도 씻겨 기분이 상쾌했다. 가끔은 비를 맞아도 좋겠다 싶었다. 비바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스쳐가는 비바람이었나 보다. 모든 바람은 스쳐가고 비는 그칠 때가 있음을 다시 한 번 배운다. 
  반환점을 돌아 해변을 끼고 돌자, 비바람이 스쳐간 자리를 시원한 해풍이 채워 주었다. 광활하게 펼쳐진 해변 저 편으로 갈매기들의 군무가 한창이다. 비가 내리면 갈매기들은 어디로 숨나. 실없는 걱정을 하며 뛰다 보니, ‘비가 와도 젖지 않는 바다’라는 수필 한 귀절이 떠올랐다. 그렇지. 바다는 수분을 머금고 사는 선인장처럼 늘 젖어 있지. 
  모든 불순물을 안고도 썩지 않는 바다를 생각하며 잠시 수궁 속으로 사라진 오빠를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무거운 생각 버리고 몸을 가볍게 해 줄 시간이다. 생각을 털고 다시 무념무상으로 뛰기 시작했다. 보도 위를 치고 나가는 리드미컬한 내 발자국 소리가 듣기 좋았다. 
  8마일쯤 이르니, 갈매기 두 마리가 날아 와 머리 위로 유유히 날갯짓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 나선다. 그래, 인간 기관차 자토펙이 말한 것처럼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달린다”.  다만, 하늘을 나는 새도 바다를 유영하는 물고기도 느긋한데 달리는 사람들만 조급하다. 조금만 속도를 낮추어도 행복 지수는 훨씬 상승하지 않을까 싶다. 
 10마일을 알리는 깃발을 보자, 다 와 간다는 안도감과 함께 피로감이 몰려와 슬슬 몸이 무거워진다. 나를 앞서가는 사람도 있고 뒤쳐지는 사람도 나온다. 걷다가 뛰다가 하면서 자기 컨디션을 조절하는 사람도 여기저기 보인다. 그 수많은 사람 중에 우리 해피 러너들의 상징인 빨간 모자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먼저 갔거나 뒤에 오겠지, 생각하며 묵묵히 뛰었다. 
  13마일. 눈이 번쩍 띄인다. 이제 0.1마일 남았다. 도로변을 꽉 채운 응원단들의 함성도 더 크게 들려온다. 마지막 잔이라며 우리 봉사팀이 건네 준 코카콜라 한 잔의 시원함이 되살아 났다. 집에서 타 온 Argi 비타민 음료수 마지막 한모금을 삼킨 뒤, 냅다 달렸다. 
   바람을 가르며 피니시 라인을 향해 질주하는 이 기분. 여지껏 힘들게 달려온 피곤이 일시에 풀리는 순간이다. 주소 불명이던 엔돌핀도 어느새 돌아 와, 피니시 라인을 힘차게 밟았다. 
  대회 봉사자들이 달려와, 서핑 보드 모양의 멋진 메달을 목에 걸어 주었다. 그들의 격한 축하에 덩달아 함박 웃음이 터졌다. 2시간 41분. 평균 속도 마일당 12분 20초. 목표에 걸맞게 들어 온 셈이다. 가장 빠르게 뛴  기록은 2시간 21분. 4년 전에 뛴 아주사 경기였다. 내 나이에 이 정도만 뛰어도 만족이다. 아니, 걸을 수 있는 것만 해도 고마운데 뛸 수 있으니 무한 행복이다. 
  여기저기 맛있는 간식과 바나나, 드링크가 즐비하다. 복숭아, 오렌지, 망고 과일즙으로 목을 축이며 우리 해피 러너스 텐트를 향해 걸어 갔다. 
  우리 봉사팀은 벌써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삶은 달걀 하나가 풍덩 들어간 뜨끈뜨끈한 컵 라면과 은박지에 정성스레 싸 온 김밥 한 줄이 나를 반겼다. 봉사자들의 정성과 사랑이 담뿍 담긴 보약 밥상이다. 그야말로 꿀맛이다. 
  나오는 입구에 마사지 봉사팀 텐트가 보여 어깨 마사지까지 받고 보니, 몸은 한결 더 가벼워졌다. 풀 마라톤 뛰고도 멀쩡하게 걸어 나오는 걸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부러워하거나 욕심을 내진 않으련다. 자극은 될지 몰라도 욕심은 부상의 지름길이다. 그저 꾸준히 열심히 연습하고 제 속도에 맞추어 뛰는 게 상수다. 
   이제 5월에 있을 OC 마라톤을 뛰면 롱비치와 헌팅톤을 거쳐 세 개의 비치 코스를 연이어 뛰는 셈이다. 그땐 특별히 왕메달 하나를 덤으로 받게 된다. 초등학교 이후로는 상 받을 일도 메달 걸 일도 없었는데, 마라톤 입문 이후로는 뛰기만 하면 메달을 걸어주니 이 아니 기쁜가.
   길은 가슴 열고 나를 반겨주고 파트너 없이도 즐길 수 있는 건강 달리기. 내 다리가 감당해 주는 날까지 펀 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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