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돈 오불로 산 행복

   단 돈 오불로 산 문고판 한 권이 이토록 큰 감명을 줄 줄이야. 상허 이태준(1904-?)의 수필집 ‘무서록’을 만난 것은 내 수필 인생에 있어서 잊지 못할 감격이요 행운이다. 1941년에 초판이 나왔다고 하니 나와는 근 오십 여 년만의 만남이다. 김용준의 ‘근원수필’과 함께 현대 고전 수필의 쌍벽을 이루는 ‘무서록’은 수록된 작품 한 편 한 편이  그야말로 수필의 진수였다. 한 홉의 흰 쌀이 귀하던 시절, 가난한 문사였던 박연구 선생이 고서점 <호산방>에서 물경 쌀 한 가마니 값을 주고 원본을 사들인 심경을 알 것만 같다.
   수필 초년생이던 시절, 나는 수필에 매료되어 좋은 수필집이라면 아낌없이 돈을 썼고, 수필 간행물이란 간행물은 모조리 정기 구독을 해서 받아보고 있었다. 그때는 수필을 잘 쓰기보다 좋은 수필을 읽으려는 욕심이 더 앞서 있을 때였다. 이러한 때에, 눈에 번쩍 뜨일 정도의 명수필을 만났으니 벅찬 가슴을 가누기 힘들었다. 손발이 부르트도록 강가를 헤매다 귀한 돌 하나를 발견한 수석 수집가의 기쁨이 이에 더할까. 누어서도 읽고, 앉아서도 읽고, 은행에 가서 줄을 서서 기다릴 때도 읽었다. 질기고도 긴 세월의 강물을 휘돌아 찾아온 님의 연서인 양, 핸드백 속에 들어있는 ‘무서록’이 그저 흐뭇하기만 했다.
   사실, 상허 이태준은 월북 작가로 전 후 세대인 우리들에게는 잊혀진 작가였다. 1988년 월북 작가에 대한 해금조치가 없었던들, 아니 영원한 수필인 박연구 선생과 범우사 사장인 수필가 윤형두 사장이 없었던들 그의 ‘빛나는 수필’은 영원히 사장되고 말았으리라. ‘무서록’은 생각할수록 귀한 책이다.
   미루나무가 강물에 제 몸을 풀어 물그림자를 드리우듯, 마흔 두 편의 작품 속에 자신의 심경을 담담히 풀어놓은 상허 이태준의 ‘무서록’. 독보적인 인물 창조와 탁월한 문장으로 이름을 드날렸던 소설가답게 수필에서도 읽어갈수록 “아, 바로 이 맛이야!”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 은은하면서도 멀리 퍼지는 향기, 서정적이면서도 감정이 절제된 문장 그 행간에 숨어있는 백 마디의 의미, 옛 것에 대한 해박한 지식, 일체의 선입감과 문헌을 배제한 직관력, 겸손함과 따스함이 배어있는 생활인의 성실, 인간미가 넘치는 민족애.......
   열 번 스무 번을 읽어도 그 감동은 매 한 가지다. "수필은 심적 나체다. 그러니까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 풍부‘와 ’자기의 미‘가 있어야 할 것이다“라고 ’문장강화‘에서 역설한 상허 자신이 작품을 통해 그 본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벽이 그립다. 멀찍하고 은은한 벽면에 장정 낡은 옛 그림이나 한 폭 걸어놓고 그 아래 고요히 앉아보고 싶다. 배광이 없는 생활일수록 벽이 그리운가 보다. <벽> -
   - 산, 그는 산에만 있지 않았다. 평지에도 도시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나를 가끔 외롭게 하고 슬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모든 것은 일종의 산이었다. <산> -
   - 어느 때나 웃자리가 어울리는 법은 아니다. 더러는 넌지시 말석에 물러섬도 겸양 이상의 자기 화장이 된다. <고완> -
   - 문단의 자리는 임자가 없다. 좋은 작품을 쓰는 이의 자리다. 흔히 지방에 있는 신진들은 자기의 기반이 없음을 한탄한다. 약자의 비명이다....... 예술가는 별과 같아서 나타나는 그 자리가 곧 성좌의 일부다. <누구를 위해서 쓸 것인가> -
   이렇듯 그의 글은 평이하나 뜻이 깊고, 지론은 날카로우나 표현이 유연하다. 한 점 백돌로 불계승을 거두는 바둑의 명인처럼 그는 정확한 자리에 가장 적합한 단어를 놓는다. 작품 길이에 있어서도 200자 원고지 두 서너 장이면 족했다. 그만큼의 길이면 수필 한 편으로서의 몫을 다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유행하는 꽁트식 수필이니 소설식 수필처럼 200자 원고지 스무 장을 넘나드는 길이와는 좋은 비교가 된다.
   그가 쓴 명저 ‘문장강화’를 통해 잠시 그의 수필관을 들어보면, 대강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 제목의 글로 너무 길어서는 안 될 것. 둘째, 상이나 문장이나 자기 스타일은 살리되, 이론화 하거나 난삽해서는 안될 것. 야채 요리와 같이 경미하고 담백할 것. 셋째, 음영적 관찰을 할 것. 보잘 것 없는 사람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도 인생의 음영이 있다는 것을 명심할 것. 넷째, 품위가 있을 것. 그러나 아는 체 하거나 선한 체 말고 겸허할 것. 다섯 째, 예술적이어야 할 것. 정확하게 기록해서 보도 전달할 생각은 금물. 자기의 감정에 충실, 주관적인 소회에서 서술할 것.
   역시 교수 출신답게 명쾌하고도 간결한 지적이다. 이것은 좋은 수필을 쓰려는 사람들이 한번쯤은 새겨들어야할 수필 작법의 충고라고 생각한다. 현대 수필의 대모격인 조경희 선생도 그의 제자였으니 혹 누가 알랴. 제2, 제 3의 명 수필가가 나와 그 맥을 이어갈지.
   우리 나라 가곡 중에 ‘아무도 모르라고’란 노래가 있다. 산 속 깊은 옹달샘을 발견하고서는 너무나 맑고 깨끗하여 보여주기조차 아까워 ‘아무도 모르라고’ 덮어두고 오는 내용이다. 상허 이태준의 ‘무서록’에 대한 나의 마음도 이와 같았다. 하지만, ‘무서록’은 혼자 보기에 너무도 아까운 책이다. 덮어두기에는 더더욱 귀한 책이다. 수필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수필 애호가는 물론, 수필을 ‘변두리 문학’으로 경원시하는 사람들에게도 꼭 한번 권하고 싶다. ‘자기 풍부’와 ‘자기 미’를 가지고 쓴 수필의 진미를 담뿍 맛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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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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