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새 (제 1 동화집)

2007.02.14 08:12

홍영순 조회 수:972 추천:114

  


                  할아버지의 새들  

                                            
토요일 아침이다.
새들이 아까부터 창 밖에서 탐을 깨웠다. 침대에서 뒤척이던 탐이 일어나 드르륵 창문을 열었다. 깜짝 놀란 새들이 후르르 날아갔다. 새들이 날아간 뜰에는 봄 햇살이 놀고 있었다.
집안은 빈집처럼 조용했다. 탐 아빠는 세탁소에 갔고, 탐 엄마는 밤새도록 수선한 옷을 세탁소에 보내고 새벽에야 잠들었다.  
탐은 배가 고팠다. 그렇지만 혼자 우유에다 시리얼을 먹는 건 배 고픈 것 보다 더 싫었다.
탐은 엄마를 깨울까 하다가 그냥 집을 나섰다. 밖에도 새소리뿐 조용하기는 집안이나 마찬가지다. 이 산동네엔 어른들만 사는 게 아닐 텐데 어디에도 아이들은 안 보였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바로 동산 밑에 넓은 태평양 바다가 있다는 것이다. 산을 내려가 길을 건너면 풀꽃 피는 작은 들판이 있다. 거기서 곧장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바닷가다.
탐은 현관 앞에 있는 나무 계단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 봤다. 아침 바람이 바다에서 해초 냄새를 안고 올라왔다.
까만 딱정벌레 한 마리가 느릿느릿 탐 앞을 지나갔다. 탐이 발로 딱정벌레 길을 막았다. 딱정벌레는 잠시 더듬이를 이리저리 흔들더니 여유만만하게 탐의 발을 지나 숲으로 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탐 엄마가 부스스한 얼굴로 나오며 말했다.
“탐, 너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니?”
힐끗 엄마를 쳐다본 탐이 바다를 보며 말했다.
“엄마, 우리 다시 이사 가면 안 돼요?”
“탐, 너 또 그 아파트 애들 생각하고 있지?”
“엄마, 난 그 친구들이 좋아요. 다시 그 아파트로 이사 갔으면 좋겠어요.”
“탐, 넌 우리가 왜 이리로 이사 왔는지 알면서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니?”
“나 때문에 이사 왔다는 것 알아요. 그렇지만 좋은 학군이면 뭐해요. 난 맨 날 외톨인데.”    
“좋은 친구 사귀면 되잖아.”
“어떤 친구가 좋은 친구인데요? 얼굴 하얗고 부잣집 아이들이요? 그런 아이들이 왜 얼굴 노란 날 좋아한대요?”
“탐, 너만 힘든 게 아니지 않아? 지금 엄마 아빠도 힘들단 말이야.”
“그러니까 도루 가자고요. 아빠는 바빠서 얼굴도 못 보고, 엄마 기다리느라고 날마다 학교에 여섯시까지 남아 있는 것도 지긋지긋해요. 그리고 ......”
점점 목소리를 높이던 탐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엄마의 눈이 빨개지며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탐은 쏟아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바다를 향해 내달렸다.

교내 수학 경시대회에서 탐이 일등을 했다. 탐은 상을 받고 카운티 대항 수학 경시대회에도 학교 대표로 나가게 되었다.
그날 점심시간이다. 수학을 지지리 못하는 매튜가 탐 옆자리에 있었다. 공연히 피식피식 웃던 매튜가 종이를 꺼내더니 탐을 그리기 시작했다. 팬케이크처럼 둥그런 얼굴에 두 눈을 위로 쭉 찢어지게 그리고 코는 납작하게 그렸다. 탐이 못 본 척 하자 얼굴 전체를 노랗게 칠하기 시작했다. 참고 있던 탐이 그림을 뺏으려하자 매튜가 그림을 들고 도망갔다. 탐도 매튜를 쫒아서 책상 사이를 뛰어다녔다. 아이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모여들어 구경했다. 그때 밖에서 들어오던 마이클이 도망가는 매튜 앞을 막아섰다. 마이클은 그림을 확 잡아채더니 꾸깃꾸깃 꾸겨 쓰레기통에 확 던져버렸다.
얼떨결에 그림을 뺏긴 매튜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마이클, 네가 뭐야? 네가 진짜 폴리스라도 되는 줄 아니? 웃기지 마. 너 같은 건 하나도 겁나지 않아. 너 그냥 안둘 거야.”
마이클이 매튜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마음대로 해라. 그렇지만 이런 비겁한 짓은 못 봐준다.”
매튜가 마이클 가슴을 확 밀며 소리쳤다.
“야, 폴리스. 못 봐주면 어쩔 건대? 감옥에라도 집어넣을래?”
얼떨결에 옆으로 밀려났던 탐이 두 팔을 벌리고 매튜를 막아섰다. 매튜가 기다렸다는 듯 탐을 향해 힘껏 발길질을 했다. 탐이 재빨리 몸을 피하자 몸집 큰 매튜가 제바람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매튜가 다시 일어나 탐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탐이 매튜의 손을 콱 잡더니 발을 걸어 가볍게 땅에 눕혔다.
때마침 수업 벨이 울리고 브라운 선생님이 왔다. 매튜가 울며 선생님에게 말했다.
“미스터 브라운, 탐이 날 때리고 밀었어요.”
그러자 마이클이 선생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선생님! 아닙니다. 탐은 잘못 한 게 없어요.”
부라운 선생님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누가 잘못 한거니?”
마이클이 아이들을 둘러보며 호소하듯 말했다.
“너희들도 다 봤잖아. 탐이 잘 못 한 게 아니고 매튜가 잘못 했잖아.”  
둘러선 아이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탐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탐은 입을 굳게 다문 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튜가 다시 울며 엄살을 부렸다.
“미스터 부라운! 탐과 마이클이 한패가 되어 날 때렸어요.”  
그때까지 자리에 앉아 보고만 있던 요한이 선생님 앞으로 오며 말했다.
“미스터 브라운, 제가 다 봤습니다. 처음부터 잘못 한 건 매튜였어요. 탐과 마이클은 잘못한 게 없어요.”
그제야 아무 말 없던 아이들이 너도나도 탐을 두둔했다.  
그 사건은 그렇게 별일 없이 끝났다..  
  
야생화가 산과 바닷가에 지천으로 핀 토요일이다.
탐은 산을 내려가 길 건너 숲에 있는 마이클 집으로 갔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가 초인종을 누르자 까만 고수머리 마이클이 하얀 이가 다 보이도록 웃으며 나왔다.
“탐, 반갑다. 어서와.”
“요한은 아직 안 왔어?”
“저기 오잖아.”
요한이 저만치 걸어오면서 손을 흔들었다.
마이클 집은 밖에서 보기엔 낡아보였지만 안에 들어가자 깨끗하고 아늑했다. 마이클 엄마가 부엌에서 나오며 말했다.
“어서 와라. 우리 마이클이 너희들 자랑을 많이 해서 보고 싶었다. 이건 방금 구운 컵케이크인데 먹어보겠니? 쉘터에 가져가려고 많이 구웠다.”
“쉘터(shelter)요?”
탐이 의아하게 묻자 마이클이 설명을 했다.
“쉘터는 집 없고 갈데없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야. 한달에 한번씩 쉘터에 음식을 해가지고 가는데 마침 오늘이네.”
컵케이크를 먹던 요한이 마이클에게 물었다.
“마이클, 궁금한 게 있어. 네 별명이 왜 폴리스니?”
"참 너희들은 여기 온지 얼마 안 되었으니 모르겠구나. 우리 아버지는 경찰관이셨어. 할아버지도 증조할아버지도 경찰관이셨대. 3대가 다 이집에 살면서 마을을 지키신 거야. 그런데 5년 전 마을에 들어온 강도를 잡다가 우리 아버지가 강도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나셨어. 그 때 난 6살이었어.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를 빼닮은 나를 꼬마경찰관이라고 불렀어. 사실은 쉘터에 가는 것도 아버지가 하시던 일을 엄마와 내가 계속하는 거야.”
“그럼 너도 경찰관이 될 거니?” 탐이 물었다.
“응, 나도 경찰관이 되어 이 마을을 지키고 싶어.”
마이클이 일어나 탐과 요한을 데리고 서재로 갔다. 서재에 들어가자 경찰관 세 명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그 밑에는 많은 훈장들이 잘 진열되어 있었다. 마이클이 사진과 훈장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탐과 요한은 아버지 사진 밑에 서 있는 마이클을 보며 감탄했다.
“야, 정말 넌 너희 아버지와 똑 같이 생겼다.”
마이클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머리를 힘 있게 끄덕였다.

탐과 마이클이 피어에 가자 요한이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새파란 아침 바다엔 하얀 보트 하나가 떠 있었다. 그 보트 뒤에는 백 마리도 넘는 갈매기들이 오리처럼 따라다녔다. 할아버지가 빵을 떼어 던지자 갈매기들이 낚아채듯 받아 물고 하늘로 솟구쳤다.  
“저 할아버지 참 멋있다. 나도 갈매기한테 빵을 줘 봤으면 좋겠다.”
탐이 부러운 듯 말하자, 마이클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야, 저 빵 맛있겠다. 빵을 보니까 배고파진다.”
마이클이 침까지 삼키며 빵 타령을 하자 요한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우리 집에 가자.”
요한네 집은 피어에서 가까운 바닷가에 있었다. 이층집인데 밑에 층에서 계단 다섯 개를 내려가면 바로 바닷가 모래사장이다. 거실 앞면은 유리창으로 되어있어 먼 바다까지 한눈에 보였다.  
“와! 이게 너희 집이니?”
“우리 할아버지 집이야. 우리 집은 미시시피에 있어.”
“그럼 왜 여기 사는데?”
“엄마 아빠가 아프리카로 선교하러 가셨는데 난 공부 때문에 안 따라가고 할아버지한테 왔어.”
“그럼 얼마동안 여기 살 건데?”
“2년 동안 살 거야.”
발코니에서 보는 바다는 정말 아름다웠다. 조용한 파도는 한가롭게 모래톱을 드나들고, 다리가 길고 가느다란 물새들이 물가에서 놀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갔던 요한이 맛있는 빵을 한 소쿠리 들고 나오며 말했다.
“탐은 갈매기에게 빵을 주고, 마이클은 실컷 먹어.”
“우아! 이렇게 많은 빵이 어디서 났니?”
“아침에 친구들이 온다고 했더니 할아버지가 많이 만드셨어.”
“할아버지가 직접 빵을 만드셨어?”
“응, 우리 할아버진 빵을 잘 구우셔. 빵 굽는 오븐도 따로 있어.”      
탐이 빵을 떼어 발코니 밑으로 던지자 순식간에 갈매기들이 모여들었다. 마이클은 아예 소쿠리를 안고 앉아 빵을 먹고 있었다.
피어 쪽에서 하얀 보트가 다가오자 요한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야.”
탐도 보트를 향해 손을 흔들다 소리쳤다.
“어? 아까 보트를 타고 갈매기에게 빵을 주던 할아버지잖아!?”
“맞아. 그 할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야.”
“보트도 너희 할아버지 거야?”
“응, 보트타고 다니며 갈매기에게 빵 주는 게 우리 할아버지 취미야.”
잠시 후 요한 할아버지가 집에 왔다. 키가 큰 할아버지는 베이지색 바지에 초록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탐과 마이클이 인사를 하자 요한 할아버지는 악수를 하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는 점심으로 피자를 사 주고는 바쁜 일이 있다며 나갔다. 탐과 마이클은 재미있게 놀다 저녁때가 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 해가 바다 끝으로 숨을 무렵 요한 할아버지가 집에 왔다.  
“요한, 아까 그 아이들이 네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들이니?”  
“예, 탐은 저 산 위에 살고, 아버지가 한국에서 영어 선생님이었대요. 지금은 세탁소를 하세요. 마이클은 큰길가에 있는 옛날 집에 살아요. 아버지가 경찰이었는데 마을에 들어온 강도를 잡다 총에 맞아 돌아가셨대요.”
“그럼 그 마이클이 꼬마 경찰관인가 보구나.”
“맞아요. 애들이 마이클 보고 꼬마 경찰관이라고 불러요.”
“좋은 아이들이겠구나. 그런데 더 좋은 친구는 없니?”
“다른 친구들도 있지만 탐과 마이클이 제일 친한 친구에요. 그 애들은 공부도 잘하지만 의리 있고 착한 애들이에요. 혹시......?”
“난 네 친구가 모든 면에서 너와 어울렸으면 더 좋겠다는 것뿐이야.”
“저는 할아버지는 사람차별 안 하시는 분이라고 믿었어요. 그래서 탐과 마이클을 집으로 놀러 오라고 했어요.”
“그래도 우리와 같은 백인이면 더 좋지 않겠니?”
“그럼 왜 아빠와 엄마는 아프리카에 선교 하러갔어요?”
“선교 하는 것 하고 친구를 사귀는 것하곤 다르지.”
요한이 슬픈 눈으로 할아버지를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집안이 조용해졌다.
시계 초침소리가 ‘재깍재깍’ 크게 들렸다.
바닷가에 등불이 하나 둘 켜졌다.
할아버지가 조용히 일어나 요한 방으로 갔다. 할아버지는 책상에 엎디어 있는 요한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요한아, 내가 잘못했다. 탐과 마이클이 좋은 애들인걸 알면서도 왜 쓸데없는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요한이 할아버지 품에 안기며 말했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전 할아버지가 제 친구들을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이젠 탐과 마이클을 좋아하시는 거죠?”
“그래, 그래! 네 친구들인데 내가 왜 좋아하지 않겠니?”
  
봄이 지나고 여름도 갔다.
9월이 되고 탐은 5학년이 되었다.
탐 아빠는 여전히 밤중에 왔다가 새벽에 나가고, 엄마의 재봉틀 소리는 탐이 잘들 때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제 탐은 외톨이가 아니다.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는 요한과 마이클이 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의 9월답게 하루 종일 더운데다 바람까지 불었다. 숙제를 마친 탐은 엄마의 재봉틀 소리를 들으며 불을 껐다. 그런데 어디선가 소방차 소리가 들렸다. ‘앵앵 앵’ 소방차 소리가 점점 커지고 경찰 사이렌 소리까지 들리자 탐이 일어나 엄마에게 갔다.
“엄마, 왜 이렇게 소방차 소리가 많이 나지요?”
“어디서 불이 났겠지. 어서 가서 자거라. 내일 아침에 늦잠 잘라.”
탐은 다시 잠을 청했지만 소방차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리는 것 같아 잠이 오지 않았다. 탐은 다시 바느질 하는 엄마에게 갔다.
“엄마, 저 소방차 소리 가까이서 나는 것 같지 않아요?”
탐 엄마는 그제야 허리를 펴며 재봉틀을 멈췄다. 그때 헬리콥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창문 앞을 스치듯 지나갔다. 헬리콥터는 푸른빛을 쫙 내리비추며 자꾸 빙빙 돌았다. 탐이 창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무 타는 냄새가 훅 들이닥쳤다.
“엄마, 아빤 어디계세요?”
“아빤 오늘 샌디에이고에 가셨잖아.”
그때 오른쪽 산위로 검은 연기와 함께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다.
“엄마, 저기 좀 봐요! 불이에요!”
탐이 소리치며 창문을 닫았다. 놀란 엄마가 허둥지둥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아빠가 뭐래요?”
“빨리 이곳을 피하란다. 탐, 어떻게 하면 좋으니?”
엄마는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더니 다시 위층으로 뛰어 올라왔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가 허둥지둥 전화기를 들었다.  
“여기는 911입니다. 어서 빨리 그곳을 피하세요. 불길이 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길이 막힐 것이니 지금 떠나세요.”  
전화를 끊은 엄마가 가방을 꺼내 탐에게 던지며 소리쳤다.  
“탐, 빨리 네 짐을 싸.”
탐은 가방에다 숙제 한 것과 책을 넣기 시작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무얼 가방에 넣어야 할지 잘 생각이 안 났다. 이번에는 현관 초인종이 요란히 울렸다. 탐이 문을 열어보니 마이클이 엄마와 와있었다.
“마이클! 어떻게 왔니?”
“너를 데리러 왔어. 여기서 빨리 빠져나가야 돼.”
백을 든 채 계단을 오르내리던 탐 엄마가 의아한 얼굴로 탐에게 물었다.
“탐, 누구니?”
그러자 마이클 엄마가 먼저 인사를 했다.
“저는 마이클 엄마입니다. 마이클이 탐 걱정을 해서 같이 왔습니다.”
탐 엄마는 약간 당황했다. 그동안 탐은 단 한번도 흑인 친구가 있다고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멈칫하던 탐 엄마가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어서 오세요.”
마이클 엄마는 재치 있게 탐 엄마를 돕기 시작했다.
“탐 어머니, 우선 중요한 짐을 저희 집으로 옮기시면 어떨까요?”
“고맙습니다. 그렇게 해도 되겠어요?”
“물론이죠. 중요한 것부터 현관에 내놓으세요. 제가 차에 싣겠습니다.”
점점 연기가 집안으로 스며들면서 눈이 아프고 기침이 났다. 마이클도 아주 침착하게 탐을 도와 짐을 싸고 현관으로 날랐다.  
다시 현관벨이 울려 탐이 나가보니 요한이 할아버지하고 서 있었다.
“요한! 네가 어떻게 왔니? 할아버지도 오셨어요?”
“너를 도우러 왔어.” 요한이 말했다.
요한 할아버지가 탐 엄마에게 인사를 했다.
“요한 할아버지입니다. 불길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으니 어서 여기를 빠져나가세요.”
요한 할아버지가 돕자 훨씬 일이 쉬워졌다. 요한 할아버지는 옮길 수 없는 물건들을 물에 젖지 않도록 포장을 하고 가스도 잠갔다. 모두 서둘러 차에 짐을 싣자 요한 할아버지가 말했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가세요. 저는 집에 물을 뿌려놓고 전원을 끄고 가겠습니다.”
“할아버지, 나도 할아버지를 돕겠어요.” 요한이 땀을 씻으며 말했다.
요한이 할아버지를 돕겠다고 하자 탐과 마이클도 남아서 돕기로 했다.
탐 엄마와 마이클 엄마가 짐을 싣고 산을 내려오자 숨이 막혔다. 겨우 마이클 집으로 짐을 옮겨놓고 다시 산동네로 가려하자 소방관들이 길을 막았다. 불이 점점 더 번지자 산으로 가는 길을 모두 막았다. 탐 엄마가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며 말했다.
“큰일 났네요. 요한 할아버지와 아이들이 아직 산에서 안 내려왔잖아요.”
“탐 어머니, 너무 염려 마세요. 소방관들이 도와줄 겁니다.”
탐 엄마의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 우리 지금 내려가요. 마이클 집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마이클 집에 커피 냄새가 나고 스토브에선 야채수프가 끊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아이들과 요한 할아버지가 무사히 마이클 집으로 왔다.  
“요한 할아버지 정말 감사합니다.”
탐 엄마가 요한 할아버지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천만 에요. 탐은 우리 요한의 아주 친한 친군걸요. 친구가 어려울 때는 도와야죠.”
아이들과 할아버지가 야채수프를 먹고 있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
탐 아빠였다. 탐 아버지는 머리를 숙여 요한 할아버지와 탐 엄마에게 인사를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길이 막혀서 빨리 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들 도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요한할아버지와 마이클 엄마는 탐 아버지와 인사를 나누며 위로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요한과 할아버지는 돌아가고 탐네 식구는 마이클 집에서 자기로 했다. 탐과 마이클은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어른들은 계속 지방 텔레비전 뉴스를 봤다. 다행스럽게도 차차 바람이 수그러들면서 불길이 잡히기 시작한다고 했다.  

길고 무서운 밤이 지나갔다.
아침이 되어 밖에 나가자 새까맣게 타 버린 산엔 아직도 군데군데 흰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탐 가족과 마이클 가족들은 서둘러 탐네 집으로 향했다. 산에는 새까맣게 탄 나무들이 앙상하게 서있었다. 처음에 불이 났던 오른쪽 언덕 위에 큰 집들은 다 타버렸다.
드디어 탐네 집이 보였다. 사람들은 일제히 기쁜 함성을 질렀다. 시꺼먼 재와 물로 집이 엉망이 되기는 했지만 탐네 집은 하나도 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과 할아버지도 도넛과 음료수를 사가지고 왔다. 탐 아버지는 요한 할아버지에게 몇 번이나 인사를 했다. 탐 엄마는 마이클 엄마를 안고 눈물을 글썽이며 고마워했다.
커피와 도넛을 먹고 난 요한 할아버지가 바지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  
“자, 다들 들어가 청소를 합시다.”
요한 할아버지 말에 모두 정신이 난 듯 비와 걸레를 들고 청소를 시작했다.

산새들이 창 밖에서 재잘대자 탐이 빙그레 웃으며 창문을 열었다.
“새들아, 깨워줘서 고마워. 오늘은 토요일이지만 내가 바쁘거든.”
탐이 옷을 갈아입고 현관문을 열자 빵이 담긴 봉지가 문에 매달려 있었다. 빵 봉지를 열던 탐은 비밀스런 미소를 띠며 혼잣말을 했다.
“누굴까? 누가 이 맛있는 빵을 매일 갖다 놓을까? 나를 아는 사람일까? 설마 숲 속의 요정은 아니겠지?”
탐은 빵들을 식탁위에 꺼내놓고 식빵 하나를 들고 피어로 갔다. 요한은 늘 그렇듯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있자 마이클이 빵 봉지를 휘두르며 뛰어왔다. 요한이 탐과 마이클이 들고 온 빵 봉지를 번갈아보며 물어봤다.
“너희들 왜 빵을 가지고 왔니?”
마이클이 하얀 이가 보이도록 활짝 웃으며 말했다.
“갈매기 주려고.”
탐도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너희 할아버지가 오늘 배 태워 주신다고 해서 갈매기 줄려고 가져왔어.”
탐과 마이클의 말을 들은 요한이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 할아버진 이제 갈매기에게 빵을 안 주셔.”
“왜? 그러고 보니 요즘 너의 할아버지가 빵 주시는 것 못 본 것 같다.”
“요즘 우리 할아버진 바다 갈매기 대신 산새한테 빵을 주신데.”
“산새?”
“산새한테 빵을 주신다고?”
마이클과 탐이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빵을 꺼냈다. 둘이 꺼낸 빵은 똑같았다.
빵을 보던 요한이 갑자기 ‘으하하’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바로 그 산새들이었구나! 그 빵은 우리 할아버지가 만드신 빵이야. 그리고 그 빵 봉지는 우리 할아버지가 직접 디자인 하신거야.”
얼떨떨해 하던 탐과 마이클이 서로 쳐다보며 동시에 말했다.
“그럼, 너희 집에도 누가 빵을 갔다 놨니?”
“그럼, 너희 집에도 누가 빵을 갔다 놨어?”
탐과 마이클은 빵 봉지를 들고 마주 선체 멋쩍게 웃었다. 그들은 혼자만 알고 있던 행복한 비밀이 들통 나 서운하기도 하고, 궁금한걸 알게 되어 기쁘기도 했다.
한참을 웃던 요한이 두 팔을 벌리고 뛰어가며 외쳤다.
“날아라, 산새들아! 할아버지 기다리시겠다.”
탐과 마이클도 팔을 벌리고 따라가면서 소리쳤다.
“우리는 빵 먹는 산새다!”
                                      
 &nbs
p;                            2003년 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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