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잠자리야 미안해 (제 1 동화집)

2007.10.15 08:47

홍영순 조회 수:1587 추천:171


솔이가 엄마랑 시골 할머니 댁에 가는 날입니다.
버스에서 내린 솔이는 시골길로 들어서자 입을 다물지 못했어요.
“엄마, 이 게 뭐야?” 엄마, 저건 뭐야?”
밭머리에 주렁주렁 열린 동부! 빨갛게 영글어 고개 숙인 수수이삭! 풀밭에 방아깨비! 모두가 솔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어요.
솔이랑 엄마가 방아깨비를 잡으며 개울둑에 올라서자 코스모스들이 아주 곱게 피어 있었어요.
“와~아, 예쁘다! 엄마 이 꽃이 무슨 꽃이야?”
“코스모스! 참 예쁘지? 할머니가 솔이 오면 보라고 심으셨대.”
“정말? 우리 할머니 최고야!” 앞장서서 쫄랑쫄랑 코스모스 길을 가던 솔이가 개울가를 손짓하며 물었어요.
“엄마, 저 빨간 잠자리는 무슨 잠자리야?”
“고추잠자리! 고추처럼 빨개서 고추잠자리라고 해.”
솔이랑 엄마가 개울둑을 내려와 막 개울을 건너려고 하는데, 개울 건너편에서 할머니가 손을 흔들며 솔이를 소리쳐 불렀어요.
“솔이야, 개울 건너지 말고 거기 있어. 할머니가 건네줄게.”
할머니는 징검다리 돌들을 편편하게 고쳐놓으며 개울을 건너오셨어요.
“우리 강아지 많이 컸구나! 자 할머니한테 업혀라.”
할머니가 등을 돌려대고 개울바닥에 쪼그리고 앉자, 솔이가 할머니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어요.
“할머니, 솔이 이제 애기 아니에요. 내년에 학교 가요.”
“오~호호호! 그럼 개울에 빠지지 말고 잘 건너야한다.”
솔이는 할머니 손을 잡고 폴짝 폴짝 징검다리를 잘 건넜어요.    
  
점심을 먹은 후 할머니가 다래끼를 허리에 차며 말했어요.
“솔이야, 엄마랑 할머니는 고추 따러 가는데 너도 갈래?”
“나도 고추 딸래요. 소쿠리 주세요.”
“고추 따면 매운데?”
“괜찮아요. 내가 고추 다 딸게요.”
할머니는 예쁘고 작은 종다래끼를 솔이 허리에 채워주며 말했어요.
“고추나무 부러뜨리지 말고 빨간 고추만 따라.”
“할머니, 이 소쿠리 귀여워요.”
“귀엽지? 이 건 종다래끼야. 소쿠리하고는 모양이 조금 다르지? 허리에 찰 수 있도록 이렇게 끈이 있거든. 소쿠리를 들고 다니며 고추를 따면 힘드니까 다래끼를 차고 두 손으로 고추를 따는 거야. 한 손으로는 고추나무를 잡고, 한손으론 고추를 따면 쉽거든. 할머니 것처럼 큰 건 다래끼고, 작은 건 종다래끼라고 해.”
고추 밭은 마당가 채마밭이라 가까워서 좋았어요.
솔이는 맨 앞에서 크고 빨간 고추만 땄어요. 그런데 솔이 종다래끼 안에는 빨간 고추와 파란고추가 섞여있었어요.
‘난 빨간 고추만 땄는데 왜 파란 고추가 있지?’
솔이는 머리를 갸우뚱 하며 엄마에게 물었어요.
“엄마, 누가 내 종다래끼에 파란고추를 넣었어?”
“누가 파란고추를 넣었겠냐? 네가 빨리 따려고 한 옴큼씩 따니까 파란고추도 같이 따진 거지. 아유, 그래도 우리 솔이 많이 땄네!”
엄마가 솔이가 따온 고추를 큰 소쿠리에 쏟으며 말했어요.
“솔이야, 힘들면 고추 안 따도 돼. 허리 아프고 손 아프지?”
“조금 아파. 그래도 고추 다 딴다고 했는데?”  
“괜찮아. 이렇게 많이 땄잖아.”
“엄마, 그럼 나 새 쫓아도 돼?”
할머니가 허리를 펴고 웃으며 말했어요.
“올해는 허수아비대신 비싼 마네킹을 사다놨는데도 새를 못 쫓는다. 네가 새를 쫓아볼래?”
“할머니 걱정하지마세요. 제가 새 다 쫓을게요.”
솔이는 채마 밭 옆에 있는 텃논으로 뛰어갔어요. 벼가 노랗게 여문 논에는 마네킹이 두 팔을 떡 벌리고 서있었어요. 마네킹 허수아비는 잘 생긴 남자인데 무엇이 좋은지 씽긋 웃고 있었어요.  
“아저씨, 이렇게 웃고 있으면 어떻게 참새를 쫓아요? 참새들이 반가워서 웃는 줄 알고 같이 놀자고 하겠어요.”
“아저씨 나처럼 이렇게 무섭게 해보세요.”
솔이가 책에서 본 도깨비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무서운 얼굴을 했어요. 그러나  마네킹 허수아비는 다정하게 웃기만 했어요. 한참 머리를 갸울 거리며 생각하던 솔이가 집으로 뛰어가더니 매직펜을 가지고 왔어요.    
“아저씨는 참새 쫓는 허수아비니까 내가 얼굴을 무섭게 그려줄게요.”
솔이는 까만 매직펜으로 웃고 있는 마네킹 얼굴을 도깨비처럼 그렸어요. 마네킹 머리에 뿔까지 그린 솔이는 머리를 끄덕이며 웃었어요.  
“이제 새들이 오면 도망가겠다.”
혼자 킬킬거리며 웃던 솔이가 마네킹도깨비처럼 무서운 표정을 하더니 그 옆에 나란히 섰어요. 때마침 한떼의 참새가 날아오다가 솔이와 마네킹을 보고 놀라 후루루 날아갔어요.
할머니와 엄마가 참새 떼가 놀라 날아가는 걸 보자 마주보며 웃었어요.
“어머니, 솔이가 어떻게 새를 쫓았을까요?”
“그러게 말이다. 솔이한테 가봐라.”
허수아비 옆으로 살금살금 가던 엄마가 갑자기 논두렁에 주저앉아 배를 잡고 웃었어요.
“아~하하. 아~하하!”    
마네킹을 도깨비처럼 그려놓고, 그 옆에 도깨비시늉을 하고 서있는 솔이가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귀엽고 익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엄마, 이 마네킹허수아비 도깨비처럼 무섭지?”
“그래, 이제 도깨비허수아비가 새 쫓으니까 넌 가서 쉬어라.”
솔이가 고추밭으로 뛰어가며 소리쳤어요.
“할머니 새 다 쫓았어요.”
“우리 솔이가 큰일 했구나!”
“할머니 이제 또 뭐 도와드릴까요?”
“이제 그만 집에 가서 시원한 요구르트 먹고 쉬어라.”
“할머니 도와 드린다고 약속했잖아요.”
“우리 솔이 착하기도 해라. 그럼 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에서 파란고추를 골라 주겠니? 할머니가 혼자 하려면 힘들거든.”
“예, 할머니. 솔이가 할머니 도와드릴게요.”    
마당으로 깡충깡충 뛰어가던 솔이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언제 왔는지 빨간 고추잠자리들이 바깥마당 가득히 날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와아! 진짜 많다. 몇 마리나 될까?” 솔이는 입을 반쯤 벌린 채 중얼거렸어요.
“뭐 하는 걸까? 왜 모였을까?”
솔이는 고추잠자리들을 세어보려고 했지만, 너무나 많은 잠자리 들이 한데 어울려 마당을 빙글빙글 돌며 날기 때문에 셀 수가 없었어요.
솔이는 파란고추 고르는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아예 마당가 꽃밭에 앉아 고추잠자리 구경을 했어요.
날쌔게 날아다니던 잠자리들은 빨래 줄이나 화단에 잠시 앉아 쉬기도 했어요. 그중에 유난히 빨간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솔이 어깨에 살짝 앉았어요. 솔이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어요.
큰 눈으로 두리번거리던 고추잠자리가 안심한 듯 날개를 내리고 쉬었어요. 솔이는 가만가만 잠자리 날개를 잡았어요. 깜짝 놀란 고추잠자리가 얇은 날개를 파르르 떨며 바동거렸어요.    
“잠자리야, 가만히 있어. 날개 다 부서지겠다.”
솔이는 방에 들어가 실을 가지고 고추 따는 할머니한테 달려갔어요.
“할머니, 할머니. 고추잠자리 잡았어요.”
“아이고, 우리 솔이 재주도 좋구나! 어떻게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잡았니?”
“고추잠자리가 내 어깨에 앉아서 살그머니 잡았죠.”
“네가 예뻐서 꽃인 줄 알았나보다. 그런데 잠자리를 잡아서 뭐하게?”
“할머니, 이 실로 잠자리 묶어 주세요.”
“너도 엄마를 꼭 닮았구나!”
고추를 널던 엄마가 웃으며 말했어요.
“솔이야, 고추잠자리 놔줘.”
“겨우 잡은 건데 왜 놔주래? 엄마도 어렸을 때 잠자리 잡았다면서?”
“그래, 나도 너처럼 잠자리 잡아가지고 놀다가 여러 마리 죽였거든.”
“난 안 죽일 거야. 할머니, 빨리 잠자리 묶어주세요.”
할머니는 고추잠자리 꼬리를 묶고 실을 길게 끊었어요.
솔이가 실 끝을 잡고 잠자리를 날려 보냈어요. 잠자리는 힘껏 하늘로 날았지만 조금밖에 날 수가 없었어요.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실 길이만큼 밖에 날아 갈 수가 없으니까요.  
고추를 널던 엄마가 걱정스레 말했어요.
“솔이야, 이제 그만해. 잠자리 꼬리 잘라지겠다.”
“엄마, 잠자리 안 아프게 할게.”
솔이는 실 끝을 잡고 잠자리가 날아가는 대로 이리저리 뛰어다녔어요.
밭으로 마당으로 뛰어다니던 솔이가 잠자리를 들고 왔어요.
“할머니, 할머니! 잠자리가 안 날아요.”
할머니가 잠자리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어요.
“어이구, 꼬리가 잘라지겠네. 이렇게 상처가 났는데 아파서 어떻게 나니?”
솔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울먹이며 말했어요.
“할머니, 잠자리 약 발라주세요. 빨리 약 발라주세요.”
“그래, 약 발라줘야겠다.”
할머니가 잠자리를 묶었던 실을 조심조심 풀었어요. 고추잠자리 꼬리는 거의 잘라 질만큼 패이고 진물이 났어요. 솔이가 울기 시작했어요. 할머니는 잠자리 상처에 연고를 발랐어요.
“할머니, 고추잠자리 아프니까 반창고 붙여주세요.”
“반창고? 반창고 붙이면 무거워서 날아갈 수 있을까?”
“가늘게 잘라서 붙이면 되잖아요.”
할머니는 반창고를 가늘게 자르려고 했지만 자꾸만 끊어졌어요. 몇 번이나 실패를 한 후, 드디어 할머니가 반창고를 실처럼 가늘게 잘랐어요. 할머니와 잠자리 꼬리에 반창고를 붙인 솔이가 훌쩍거리며 말했어요.
“할머니, 잠자리 집 만들어 주세요.”  
“여치 집은 봤지만 잠자리 집은 한번도 못 봤는데 어떻게 만들지?”
“할머니 잠자리 집 만들어 주세요.” 솔이는 울며 떼를 썼어요.
한참 생각하던 할머니가 큰 빈병을 가지고 나왔어요. 고추잠자리를 병 속에 넣은 후 공기가 통하도록 망사로 덮고 고무줄로 묶었어요.
솔이가 고추잠자리 병을 방으로 안고 가자 엄마가 말했어요.
“솔이야, 잠자리 놔줘라. 밤에 죽으면 어떻게 하니?”
“싫어. 내일 서울 데려 갈 거야.”
“서울 가도 먹을 게 없어 굶어죽어. 그냥 지금 살려줘라.”
“싫어, 내가 약 발라줘야 해.”
엄마와 할머니가 무슨 말을 해도 솔이는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렸어요.  

다음날 아침입니다.
할머니가 애호박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가며 엄마에게 물었어요.
“솔이는 아직도 자니?”
“예. 어제 고단했나 봐요.” 엄마가 호박을 받으며 말했어요.
할머니가 방에 가보니 솔이는 꿈을 꾸는지 끙끙거리며 울고 있었어요.
“솔이야, 솔이야! 해가 떴는데 무슨 잠꼬대를 하니? 어이고 이 눈물 흘리는 것 좀 봐.”
할머니가 흔들어 깨우자 솔이가 울며 말했어요.
“할머니, 고추잠자리가 죽었어요.”
“우리 솔이가 꿈꾸었구나! 고추잠자리 아직 안 죽었어. 여기 있잖아.”
할머니가 고추잠자리가 든 병을 솔이에게 안겨 주었어요.
“우와! 정말 고추잠자리가 살았네!”
솔이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조심스럽게 고추잠자리를 꺼냈어요. 고추잠자리가 날개를 파르르 떨며 잔뜩 겁먹은 눈으로 솔이를 봤어요.
“미안해. 고추잠자리야. 정말 미안해. 서울 안 데리고 갈게.”
솔이는 마루로 나가 고추잠자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어요. 고추잠자리는 날개를 늘어뜨린 채 꼼짝도 하지 못했어요.
“고추잠자리야, 날아가.”
솔이가 잠자리를 “후” 불었어요. 고추잠자리는 날개가 파르르 떨리는데도 날아갈 생각을 안했어요.  
“고추잠자리야, 날아가. 어서 날아가!”
솔이가 울며 다시 “후, 후” 불었어요. 고추잠자리가 날갯짓을 몇 번 하더니 조심스레 날아올랐어요. 그리고 천천히 날아갔어요.
“잘 가. 고추잠자리야!”
솔이가 고추잠자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어요.
고추잠자리는 하얀 반창고를 붙인 채 울타리를 넘어 멀리 날아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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