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도토리(제 2 동화집)

2008.02.15 03:16

홍영순 조회 수:958 추천:149

                                                                    
                       막내 도토리
                                                
난 도토리나무 맨 꼭대기에 열린 막내도토리입니다.
높은데 열려서 좋겠다고요?
글쎄요, 맨 꼭대기에 있어서 하늘이 잘 보이는 건 좋지만, 바람 부는 날이면 거의 기절할 만큼 흔들리는걸요.    
그것 보다 걱정은 다른 도토리들은 잘 여물었는데 나만 작고 초록색이라는 겁니다.
그렇지만 난 동글갸름하고 예쁜 도토리가 틀림없어요.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지더니 도토리들이 아람이 벌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도토리들이 떨어질 때마다 엄마나무는 몇 번이고 당부를 했어요.
“땅에 떨어지면 다람쥐나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잘 숨어야 한다.
그리고 봄이 되면 뿌리를 내리고 싹을 만들어 꼭 도토리나무가 되어라.”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도토리가 떨어지는 족족 다람쥐나 사람들이 주워갔어요.
어느 날, 드디어 내 몸도 잘 여물어 반들반들 윤이 났어요.
엄마나무는 곱게 물든 잎으로 나를 어루만지며 말했어요.
“막내야, 이제 네 차례다. 너라도 꼭 좋은 도토리나무가 되어라,”
나는 엄마나무를 떠나는 게 너무 슬펐어요. 그래서 울며 엄마나무에게 졸랐어요.
“엄마, 난 엄마하고 살래요. 땅에 떨어지기 싫어요.”
엄마나무는 나를 달랬어요.
“막내야, 너는 엄마와 겨울을 날 수 없단다. 도토리들은 여물면 땅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해.”
“엄마도 없이 어떻게 혼자 땅에서 살아요?”
“막내야, 걱정하지마라. 모두 널 도와줄 거야.”
“모두 도와준다니요? 누가 나를 도와줘요?”
“흙과 해님, 그리고 비와 눈과 이슬이 널 도와줄 거야.”
“내 친구 별들도 놀러오나요?”
“그럼, 지금처럼 별들이 저녁마다 놀러오지. 그리고 바람도, 구름도, 새들도, 곤충들도 모두 그대로 네 친구가 될 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라.”
“정말요?”
“그래. 오늘이 막내인 네가 떨어지기 좋은 날씨다. 땅에 떨어지거든 얼른 저 바위 앞으로 때구루루 굴러가라, 우묵하여 숨기도 좋고 햇볕도 잘 드는 곳이다. 알았지?”      
엄마나무는 지나는 바람을 불러 가지를 흔들어주며 외쳤어요.
“막내야, 내가 셋을 세면 뛰어내려. 하나 둘 셋!”  
나는 눈을 꼭 감고 깡충 뛰어내렸어요.
땅바닥에 딱 떨어지는 순간 정신이 아뜩하고 온몸이 깨지듯 아팠어요.
그래도 나는 정신을 바싹 차리고 재빨리 때구루루 땍때굴, 때구루루 땍때굴 바위 앞 우묵한 곳으로 굴러갔어요.
나를 지켜보고 있던 엄마나무가 얼른 나뭇잎을 떨어뜨렸어요. 나뭇잎이 내 위에 수북이 덮이자 난 ‘후유!’ 안도의 숨을 쉬었어요.
그러나 잠시 후, 다람쥐가 오더니 코를 발름거리며 말했어요.
“어디서 싱싱한 도토리 냄새가 나는데?”  
나는 다람쥐한테 들킬까 봐 나뭇잎 속에서 달달 떨고 있었어요.
“이제 내가 늙어서 냄새도 못 맡나? 분명 맛있는 도토리 냄새가 나는데 없네.”
다람쥐는 ‘훔 훔! 훔 훔!’ 냄새를 맡으며 나를 찾더니 허탕치고 돌아갔어요.
그 후로도 사람들과 다람쥐가 몇 번 왔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못했어요.
얼마 후, 겨울이 되고 눈이 펑펑 쏟아졌어요.
내 위에 수북이 덮인 가랑잎 위에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였어요.
눈이 오면 더 추울 줄 알았는데, 눈 덮인 가랑잎 속은 바람도 안 들어오고 오히려 아늑했어요.
만일 눈이 가랑잎을 덮어주지 않는다면 쌩쌩 부는 겨울바람에 가랑잎이 다 날아갈 거예요. 그럼 나는 꽁꽁 얼겠지요.
눈도 나를 도와 줄 거란 엄마 말이 맞았어요. 앞으로도 모두들 나를 도와준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난 길게 하품을 하고는 눈 덮인 가랑잎 속에서 콜콜 잠들었어요.

포근한 가랑잎 속에서 깊이 잠들었던 나는 시끄러운 소리에 깼어요.
“누가 이렇게 떠드는 거야?”
내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투덜거리자 바로 옆에 있던 진달래가 말했어요.
“다들 봄을 준비하는데 너는 잠만 자니?”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들 바쁘게 일하고 있었어요. 난 봄도 되기 전에 추위에 떨며 일하는 나무나 꽃들이 바보 같다고 생각됐어요.
“아직도 추운 겨울인데 무슨 봄이 온다고 야단법석이야요?”
나는 꽃망울을 만든다고 열심히 분홍색 물감을 준비하는 진달래를 비웃었죠.
“봄은 땅속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우리가 준비하지 않으면 봄은 올 수 없어.”
“그럼 난 무엇을 준비 해야지요?”
“어디보자. 넌 먼저 그 딱딱한 껍데기를 깨야 갰다.”
  “껍데기를 깨면 아플 텐데요?”
"아파도 껍데기를 깨야 도토리나무가 될 수 있어."
"이렇게 딱딱한 껍데기를 어떻게 깨요?"
"아프다고 껍데기를 못 깨면 넌 그대로 썩게 돼. 그동안 그런 도토리 많이 봤거든."
"예? 썩는다고요?"
나는 너무 무서워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어요. 그때 가랑잎 위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어요.  
“우리가 도와줄게.”
그 목소리는 겨우내 찬바람을 맞으며 나를 덮어준 눈이었어요.
“고마워. 그런데 눈이 어떻게 내가 껍데기 깨는 걸 도와 줄 수 있니?"
“우리가 녹아서 네 껍데기를 적시면 부드러워 질 거야. 그때 껍데기를 깨면 훨씬 쉬워.”
“안 돼. 눈은 녹으면 없어지잖아.”
“괜찮아. 우린 녹으면 물이 되고, 또 이슬과 구름도 될 수 있어. 그러다 겨울이면 다시 눈이 되니까 괜찮아.”
“아, 그렇구나! 그럼 도와줘,”    
눈들이 녹으면서 내 껍데기를 촉촉이 적셔 부드럽게 해줬어요.  
나는 엄마나무에 매달렸던 힘까지 내서 껍데기를 깨트렸어요.
"우지지~직!"
드디어 딱딱했던 껍데기가 갈라졌어요.
“장하다, 도토리야. 이제 나한테 뿌리를 내려라.”
보드라운 흙이 얼른 깨진 나를 감싸 안으며 말했어요.  
“고맙습니다.”
나는 촉촉한 흙에다 뿌리를 내렸어요.
“자, 이젠 나한테서 필요한 건 다 가져가라.”
흙이 엄마처럼 다정하게 말했어요.
며칠 동안 흙이 주는 맛있는 것들을 먹었더니 내 몸에서 떡잎 둘이 나왔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떡잎이 초록색이 아니고 엷은 연두색이었어요.
‘너무 약해서 도토리나무가 못되면 어떻게 하지?’
내가 걱정하고 있는데, 누군가 썩은 가랑 잎 사이로 들어오며 날 불렀어요.
“막내 도토리야! 막내 도토리야!”
아~아, 그 건 반짝반짝 빛나는 따듯한 햇살들이었어요! 내가 조그만 도토리 때부터 빨갛게 익어 떨어질 때 까지 날 도와준 친구들입니다.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걸 알았니?”
“엄마 나무가 너 여기 있다고 가서 도와주라고 해서 왔어. 나뭇잎이나 풀은 햇빛이 있어야 초록색으로 튼튼하게 잘 자라거든.”
“엄마나무? 엄마나무가 날 기다리고 있니?”
“그래. 우리가 도와줄게 빨리 빨리 자라라. 그럼 엄마나무를 볼 수 있어.”
“고마워. 너희들이 오니까 정말 따듯하다.”
봄 햇살들이 찾아와 도와주자, 하얗고 약하기만 하던 내 떡잎은 날이 갈수록 튼튼한 초록색 잎이 되었어요.

따뜻하고 상쾌한 봄날입니다.
내가 기지개를 쭉 켜자 갑자기 세상이 환해졌어요. 드디어 내가 썩은 나뭇잎을 들추고 세상으로 나온 것입니다.
“아! 눈부셔라! 아름다운 봄이구나!”
동산에는 꽃들이 아름답게 피고, 새들은 나뭇가지에서 즐겁게 노래를 불렀어요.  
마침 봄바람이 지나다가 날 살짝 건드리며 말했어요.
“얘, 꼬맹이야! 넌 도토리나무구나!”
그 순간 나는 얼른 엄마나무를 쳐다보며 소리쳤어요.
“엄마, 내가 도토리나무가 됐어요?”
“막내야, 이제 너는 도토리가 아니고 도토리나무다!”
엄마나무가 연둣빛 새 잎들을 흔들며 축하해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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