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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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사랑하기에 좋은 계절

2007.02.05 10:30

최향미 조회 수:764 추천:52

  
                                                          
        요즘 많은 사람들이 '알러지' 한 두 가지는 갖고 있는 것 같다. 나에게도 그 괴물 같은 것이 한가지 붙어 있는데, 이름도 웃기게 '썬 알러지'다. 풀어서 말하자면 자외선이 강한 봄부터 가을까지 햇빛에 피부가 노출이 되면 두드러기가 나는 것이 다. 가려운 것은 견딜만한데 남에게 혐오감을 줄만큼 피부가 흉해지고 상처가 오래남아있다. 덕분에, 워낙 게으른 성격에 밖으로 나돌아다니지  않을 구실이 확실해 졌다. 그래도 운전중이나 여행 중에 얻는 피해는 피할 길이 없다.
        '알러지' 때문에, 또는 그 외의 여러 가지 이유로 여름을 유난히 싫어한다. 그 여러 가지 이유라는 것이 고작 노출이 싫어서라든지 또는 아무리 벗어도 계속 더우니까 등등 나름대로 있지만 가장 큰 숨은 이유는 아마도 여름이 주는 눈부신 정열이 나에겐 너무 버거운 것 같다. 어쩌면 자신 만만하고 활기찬 여름의 활동들이 내가 감당하기에는 벅차다고 스스로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늘 기운 없어 비실대는 체력이 여름을 즐길수 없었던 큰 이유도 될 것이다.
        봄은, 힘든 여름의 전주곡 같아서 별로 반갑지가 않다. 그리고 가을은 '아, 여름이 허망하게 지나가는구나' 하는 쓸쓸함이 짙어서 슬프다. 지겨운 여름아 안녕! 하고 보내기에는 웬지모를 아쉬움과 허망함이 남아있다. 이제 남은 마지막 겨울... 솔직히 한국의 겨울과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캘리포니아의 겨울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빙판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한국겨울'에 비하면 이곳의 추위는 '새발의 피'도 안 된다.
        맨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비가 억수로 내리던 일월이었다. 처음 학교에 간날 신기한 여러 가지 모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 중에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다. 한국의 겨울에 비하면 포근한 봄 날씨인데, 같은 반의 여자아이가 발목까지 오는 긴 털 코트를 입고 온 것이다. '이런 기온에 털 코트라니... 미국아이들은 참을성이 없는 건지, 아니면 저렇게 멋을 내고 싶은 건지...'하며 비웃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 인가 나도 그 아이처럼 변해가고 있음을 느꼈다. 겨울이니까 입을만하면 입었다가 더우면 벗는 거지, 털 코트든 수영복차림이든 무슨 상관인가 말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름대로의 겨울을 즐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곳의 겨울은 참 싱겁다. 그런 느낌은 추운 겨울에 한국을 떠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그리운 한국의 모습은 대부분이 겨울의 기억들이다. 긴 겨울밤에 '웃으면 복이와요'를 보다가 스뎅 주발을 하나들고 쪼르륵 장독대에 간다. 엄마가 들통에 담아놓은 살얼음 낀 식혜를 톡톡 쳐서 한 사발 담아 얼른 한 모금 삼킨다. 그러다가 문득 하늘에 걸린 달을 보면 왜 그렇게 시리도록 달빛은 밝은건지, 어쩌면 엄마는 매번 보름달 뜰 때만 식혜를 담가 놓으신 건지도 모르겠다.
        동네 구멍가게 앞에 김이 모락 모락 나는 '호빵통'은 지금 생각만 해도 구수하고 따뜻한 호빵 냄새가 나는 듯 정겹다. 스케이트 타다가 친구들과 어울려 먹는 오뎅과 그 국물 맛은 늘 친구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억이 떠오른다. 빙판에 미끄덩하고 자빠졌던 기억과 길 위에 연탄재를 던지고 있는 아저씨도 언제나 함께 떠오르는 추억이다.
        모두다 지금은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들이다. 어쩌면 이제는 한국에서도 볼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춥고 고생스러웠던 겨울이 왜 이렇게 따뜻한 마음으로 기억되어 있을까. 이제 다시는 되돌아 갈수 없는 추억이기 때문만 일까.
        난 뜨거운 차를 무척 좋아한다. 커피든 녹치든 가리지 않고 따뜻한건 모두 즐긴다. 김이 오르는 차가 옆에 놓여 있으면 마시지 않아도 마음이 훈훈해지는 것만 같다. 두 손을 꼭 대고  향을 음미하며 마시기에는 겨울이 제격이다. 찻잔의 따사로움이 마치 나를 사랑해주는 애인의 마음 같다.
        얼어죽지 말라고 가지만 남은 나무 밑둥이를 짚으로 감싸주는 따뜻한 정성이 포근하다. 아이의 목덜미가 시릴까봐 털 목도리로 꽁꽁 둘러주는 엄마의 사랑이 꼭 필요한 계절이다. 차가운 애인의 손을 자기의 코트 속에 집어넣고 마주보고 웃으며 길을 걷는 연인의 사랑이 따뜻하다. 가게 앞을 지나는 행인들의 안전을 생각하며 연탄재를 던지는 구멍가게 아저씨의 무뚝뚝한 얼굴 속에서도 말없는 사랑을 느끼는 계절이다. 추운 겨울을 핑계삼아 팔짱을 껴도, 손을 감싸안아도, 옷깃을 여며 주어도 밀어내지 않고 서로 사랑하기에 따뜻한 계절이 아닌가.
        겨울이 좋다. 가만히 있으면 지는 석양에도 눈물이 나게 외로움을 타는 내가 맘껏 부둥켜안고 사랑을 표현해도 티 나지 않는 겨울이 좋다. 아무리 햇볕을 쪼여도 두드러기가 안 나는 겨울이 난 좋다. 햇빛조차 티 안 나게 나를 사랑해주는 은근한 겨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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