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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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봄이 오는 골목

2007.02.19 10:24

최향미 조회 수:790 추천:53

    
        정원 손질 한다며 점심 먹고  밖으로 나간 남편이 갑자기 궁금해진다. 잔디 깎기며 나무손질등 밖의 일을 하는 남편을 늘 내몰라라 하던 내가 오늘은 꼭 같이 거들어 줘야 할 것만 같은 사명감이 드는것은 왠일일까. 살랑대는 봄기운이 나를 밖으로 유혹하는 또다른 이유 때문인것도 같다.

        도로변에 자라고 있는 커다란 뽕나무의 뿌리가 보도위로 솟아 나왔다. 보도 공사를 해도 계속 솟아 나올 뿌리가 위험하다고, 지난 초가을에 아예 집앞 도로 주변에 있는 일곱 그루의 뽕나무를 시에서 뽑아내 버렸다. 여름에는 그 커다란 나뭇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고 가을이면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들을 이사온 첫해 동안 은근히 즐겼는데 이참에 모두 뽑아 버리자는 주변 이웃들의 의견에 혼자 반대 할수 없어서 우리 집 앞 뽕나무도 지난 가을에 뽑혀 버리고 만 것이다. 나무가 뽑히고 그 자리를 잔디로 시에서 깔아줄 줄 알았는데 도로도 반듯하게 해줬으니 나머지는 집주인이 알아서 하란다.

        나무가 뽑혀지고 남은 붉은 흙 위에 잔디를 어떻게 깔까 궁리하다가 남편이 두 팔을 걷어 부치겠단다. 봄에 직접 흙을 고르고 잔디 씨를 뿌려 새 단장을 하겠다는 것이다.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라 나는 속 편하게 잘 자란 잔디로 덮고 말자고 했지만 결국 남편 고집에 손을 들고 말았다.

        밖에 나와 보니 오늘이 그날인가보다. 이미 흙은 보기좋게 다듬어져 있고 이제 잔디씨를 뿌리고 있다. 속으로 '에고.. 저리 수고하는데 생각대로 잔디가 예쁘게 안나오면 어쩌나'라며 혀가 끌끌 차진다. 남편이 애쓰는데 나는 뭘 좀 할까 둘러본다. 요 며칠새로 날씨가 포근한게 등위로 닿는 햇볕이 제법 따끈하다.

        우리 집 앞뜰 잔디가 끝나는 자리에 예쁘게 단장한 사철나무들이 방 창문 앞으로 낮은 담장처럼 심어져 있다. 그 사이로 단풍나무와 Fresno 나무( 내가 사는 동네에 흔한데, 가을이 되면 불이 붙은 듯 빨갛고 주황빛으로 단풍이 곱게 지지만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어 내가 그냥 이름 붙인 )가 있다. 그사이 사이에 지난가을에 떨어져 쌓인 낙엽이 눈에 들어온다. 남가주에서는 그리 흔히 볼수 없는 가을 낙엽이 이곳에는 환상적인 멋으로 나에게 낭만을 주고 있다. 지난가을에는 뒷뜰에 떨어지는 낙엽을 일부러 가득 모아놓고 소리를 내어 밟기도 하고 떨어져 있는 낙엽을 오래 오래 즐기고 싶어서 낙엽 청소도 한동안 미루기도 했다.

        나무 사이에 떨어진 낙엽이 이불처럼 포근하게 땅을 덮고 있으라고 일부러 긁어내지 않았었는데 겨울이 지나는 동안 땅과 한몸이 된듯 색깔도 이제 땅색이다. 낙엽 긁는 갈쿠리를 꺼내들고 이곳 저곳을 살피는데 아! 탄성이 나온다.

        흙 위에 작은 나무 부스러기가 깔려 있고 그 위에 낙엽이 덮였는데 그사이로 초록빛 식물이 여기 저기에 빼꼼이 올라와 있다. 갈쿠리를 던져놓고 주저앉는다. 손으로 조심스럽게 헤치고 보니 지난번 늦가을에 심은 수선화이다. 아직은 여린 초록빛이지만 땅을 뚫고 힘차게 솓은듯한 수선화에는 정말 싱그러운 힘이 묻어 있다.

        중학교 다닐 때 좋아했던 연속극 제목이 '수선화'였다. 기억나는 장면은 커녕 내용  조차 기억 할수 없지만 간호원으로 나오던 여자 주인공의 갸날프지만 강인한 모습은 잊을수 없는 드라마이다. 그후로 수선화는 내가 좋아하는 꽃 중에 하나가 되 버렸다. 아마 여주인공과 수선화가 닮은 꼴로  사춘기 소녀에게 그냥 사랑으로  다가 왔나보다.

        결혼 후 처음 집 장만을 하고 나서 처음 맞는 겨울이 지나갈 즈음에 뒷뜰 장미나무 사이로 피어있던 노란 수선화를 보고 얼마나 흥분했었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봄이라고 하기에는 아직은 이른 이월 초 순경 이었던 것 같다. 그후 그 집에 살던 십년 동안 초봄이면 어김없이 수선화가 이른 봄소식을 알려주고 식탁 위엔 노란 수선화가 싱그런 초록줄기와 함께 꽂혀 있었다.

        다음에 이사간 집 뒷뜰에도 전 주인이 심어 놓았던 수선화가 봄소식을 전해주었다.결혼후 거의 이십년 가량을 별 수고도 없이 내가 좋아하는 수선화를 해마다 즐길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곳 Fresno로 이사온지 일년 반이 지나간다. 지금 살고 있는 집뜰에도 수선화가 피었지만 잘라서 식탁 위를 봄기운으로 장식하기에는 너무 적은 꽃이 피었었다.

        작년 늦가을에 용기를 내어 수선화 구근을 사고 심는 방법을 배운 뒤에 앞뜰과 뒷뜰에 정성들여 심었다. " 내가 아마츄어라 엉터리로 심는지는 몰라도 너희들은 똑똑하게 자라서 썩지 말고 내년 봄에 꼭 나와야된다." 입으로 중얼 대면서 구근을 심었다.

        생각 날 때마다 물도 주곤 했지만 과하면 썩을까, 적으면 마를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지난 겨울엔 얼음이 얼도록 기온이 떨어져서 올봄엔 수선화를 볼수 있을까 가끔씩은 조바심이 나곤 했다. 그랬던 수선화였는데 이렇게 '나 살아있어요' 하고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니 고마운 마음마져 드는 것이다.

        책에 써 있던대로 나무 그늘 밑에 떼를 지어, 욕심을 내어 꽤 많은 수선화를 심었었다. 빼꼼히 솟은 수선화를 따라 심었던 자리를 찿아 보았다. 세상에... 심었던 만큼의 수선화가 고개를 내민채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다. 아직은 꽃망울도 없이, 짙은 초록빛도 띠지 못한 어린 싹들이지만 자기의 존재를 분명하게 밝히듯 고개를 내밀고 있다.

         피어있던 꽃이 아니라 마른 구근을 심었기에 썩을까, 말라버릴까 조바심을 냈었는데 그동안 수선화 구근은 새로운 모습으로의 탄생을 위해 겨울내 움직이고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드니 '아이구 장한 내 새끼들...'하며 칭찬이 절로 나온다. 이제 꽃망울이 도톰해지고 키가 쑥쑥 자라서 노랗고 하얀 수선화 꽃을 펴 보이면 우리 집 식탁에는 봄이 올라 앉을 것이다.

        기특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 보이며 겨울을 이겨낸 수선화가 내 가슴에도 봄을 심어 주는 것 같다. 이십 육년을 넘게 살던 정든곳을 떠나 이곳으로 이사와서 아직도 적응하느라 애쓰는 내 마음속에, 겨울 땅속에서 조금씩 꿈틀 대며 제 모습을 찿던 수선화 처럼 일어서는 나를 찿고 싶다. 아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남편은 이제 잔디씨 뿌리기를 마쳤나보다. '쭈그리고 앉아 뭐해?' 하며 다가온다. 어린 수선화의 모습들을 자랑해야겠다. 내 마음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봄바람 때문에 내 목소리에 콧소리가 묻어날 것만 같다. 남편이 뿌린 잔디씨가 머슴아 머릿카락처럼 자라면 그때는 내 마음에 불기 시작한 봄바람도 향기를 날릴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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