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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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할머니

2007.09.17 16:41

최향미 조회 수:874 추천:103

     

                                                                            할 머 니

 

       주일 아침 운전 길은 한결 여유롭다. 하늘이 어제와는 다르게 퍽 이나 높아 진 것 같다. 아주 드물게 뭉게 구름이 떠있거나 하늘이 높고 맑은 날이면 어김없이 한국이 그리워 진다. 오늘 하늘은 정말 한국의 가을 하늘과 꼭 닮았다.

        예배가 끝난 열 두시 반경이면 교회에서 준비한 점심식사를 한다. 내가 예배시간만큼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시간이다. 비록 일회용 그릇에 담긴 국밥이나 닭고기가 늘상 반복되어 나오는 식단이지만 내가 맛있게 먹는 것만 바라봐도 행복해 하는 사람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국밥이 반쯤 비워질 시간에, 성경공부를 마친 딸아이가 식탁으로 다가 왔다. 맞은 편에서 식사를 하시던 할머니께서 숟가락을 내려 놓으며 가방을 뒤적이신다. "이거 현아 줘라. " 귀가 어두운데도 행여나 누가 들을까 소근소근 속삭이신다. 받아 들고 보니 지난번에 한복 집에서 영수증을 넣어 공짜로 준 헝겁 지갑이다. '할머니도 차암, 이제는 별것도 다 가져 오시네' 하며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아차 싶어 지갑을 열어 보았다. 촌스런 지갑 안에는 깨끗한 지폐가 몇 장 들어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반인 증손녀에게 '어린이날 기념' 용돈도 건네주는 분이신지라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가늠이 안되는 용돈이다. 눈으로 '뭔데요?' 하니 손으로 당신 입을 가리시며 나즈막히 "현아 자동차 기름은 내가 댈게" 하신다. 순간 목구멍이 뜨거워졌지만 늘 하던데로 "아이고, 현아는 좋겠네" 하며 철없는 아이처럼 활짝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운전을 시작한지 한달이 채 안되는 딸아이의 얼굴이 순간 발갛게 상기 됐지만 이내 제 에미를 따라 아주 기쁘고 고마워 하는 모습을 증조 할머니께 지어 드린다. 늘 그러던대로.  

       우리 할머니는 딸은 하나도 없이 아들만 넷을 두셨다. 그리고 마흔 중반에 얻은 손녀딸이 바로 나다. 우리 엄마가 시어머니에게 드린 최고의 선물이 아마 첫 손녀딸을 안겨 드린 것이리라. 엄마는 나를 낳자마자 할머니에게 나를 뺏겨 버리고 마셨다. 나는 할머니 품에서 할머니를 그대로 빼닮아 가며 키워졌다.

        전쟁이 할머니의 처지를 나락으로 떨어 뜨렸어도 세상과 타협하며 살기를 거부한, 어쩌면 더불어 사는 방법을 몰라 그렇게 외롭게 사신 건지도 모르겠다. 구차해진 처지를 스스로 받아 들일수가 없어서 외로움을 즐기며 사는 사람처럼 안으로 숨어 버린 건 아니었을까. 할머니의 외로움이 사무치던 밤에 당신을 쏙 빼 닮은 손녀딸의 어떤 재롱으로 그 긴 밤을 위로 받으셨을까. 옹알이 하는 젖먹이의 얼굴을 들여다 보시며 북으로 떠난 젊은 남편을 원망하며 또 그리워 하셨을까? 어쩌면 부대끼며 사는 것조차 버거워 손을 놓고 싶을 때 아장 아장 걸어와 품에 안기는 막내같은 손녀딸을 꽈악 움켜잡으시지는 않으셨을까. 아직도 받기만 하는 내가 할머니에게 드린 것이 그나마 무엇이 있는지 헤아리면 할수록 할머니의 아픔만 묻어 나온다.

        어렸을 적에 할머니 등에 업히기를 무척 좋아했다. 할머니 등에 업드리면 아무리 졸음이 쏟아져도 잠에 빠지지 않으려고 무진히 애를 썼다. 나를 재우려고 할머니가 두런 두런 건네주는 말들은 등울림이 되어 나를 편하게 해주었다. 그 소리는 할머니의 평상시 목소리 보다 더 아늑하고 따뜻했다. 마치 동굴에서 울려오는 깊은 마음의 소리, 숭늉처럼 구수한 그런 맛이 있었다. 내가 젊은 엄마였을 때 아이들을 등에 업으면 할머니의 그 등울림 소리가 기억나서 일부러 말을 건네곤 했다. 나의 따뜻한 추억을 내 새끼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난 지금도 할머니로부터 받기만 하고 있다. 용돈도 주신다. 철마다 행여 남이 보고 책잡을까봐 꼬기 꼬기 접어서 건네주신다. "지난번에 심은 대추 나무는 틀렸다. 아무래도 벌레가 먹은 것 같애. 요즘 나무 심기 좋은 때니 시간 나면 뭘 심을까 가서 봐 나 알았지?" "지난 번에 보니까 화장실 바닥 깔개가 안 좋더라. 꼭 새로 사 놔라 시간 나면..."할머니가 이렇게 조목 조목 대시며 돈을 내미시면 그저 " 네, 알았어. 시간 나면 사 놀게" 대답은 잘 하지만 정작 할머니 말씀대로 해놓은 것이 반도 안 된다. 하지만 한번도 나의 게으름을 탓 하신 적이 없다. 공연히 바쁜 아이 신경 쓰게 한 건 아닐까 미안해 하는 눈치시다. 할머니와 나는 말로 하지는 않았어도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 이번에는 뭘 해 줄까' 생각하면서 딸 챙기는 엄마의 기쁨을 막지 않는 마음을, '할머니 내가 모시고 죽을 때까지 나랑 같이 살꺼야.' 나풀 나풀 떠들던 손녀딸이 아직도 건네 주시는 손길 마다하지 못하고 어린 아이처럼 받기라도 해야 하는 아린 마음을 말이다.

        할머니는 요즘 당신 물건 가지 수를 자꾸 줄이고 계신다. 선물이 들어오면 이 사람 저 사람 나눠 주신다. 옆집 할머니가 하도 답답해서 아깝지 않냐고 물어 보셨다. 우리 할머니가 이렇게 대답하셨단다. " 현아 에미가 원래 약골이야. 내가 가고 나면 내 물건 하나씩 붙잡고 진 빼고 울텐데 힘들어서 안되..  

       나보다 무거운걸 더 잘 들던 할머니가 작년부터 부쩍 약해지신 것 같다. 틈틈이 우리 집에 오셔서 살림 정리도 해 주셨는데 근 일년간은 ' 기운 없어 안 간다.' 하시며 집에도 안 오신다. 손녀딸 집에 가서 도움도 못 줄 것, 가서 뭐 하나 싶어하시는걸 나는 알고 있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배도 타러 가야하고, 기차 여행도 해야 하는데 할머니 걸음걸이는 자꾸 느려지고 있다.

        뜨거운 국밥을 다 먹어도 땀이 나지 않는걸 보니 이제 여름이 다 간 것 같다. 조금 더 선선해지면 할머니랑 짧은 여행이라도 떠나야겠다. 이번에는 꼭 우겨서라도 가야지. 그래서 할머니 등에 귀라도 대고 말을 해야지. 등울림 소리가 어떤 건지 할머니한테도 들려 드려야지. 그리고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내 어릴 적 이야기랑, 할머니의 사랑 이야기까지 모두 들어야겠다. 할머니 기억 속에 있는 살 같은 손녀딸의 이야기를 모두 내 가슴에 남겨야지. 그때 할머니가 젖먹이 내 얼굴을 보며 혼자 이야기를 하신 것처럼, 나도 혼자 남을 어느 날에 맑은 하늘이라도 보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조금 더 높아 진 것 같다. 귀가 어두운 할머니께 큰소리로 늘 해드리는 말을 나직이 밷어 본다. "할머니 오래 오래 사셔야 되요. 그래야 저 용돈 주시죠. 할머니 없으면 누가 저 용돈 주겠어요. 그러니까 저-엉-말루 오래 오래 내 옆에 있어야 되에. 알았지이...."                                                                                                                        

 

     2004  문학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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