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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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창포물에 씻어내고

2008.06.03 01:53

최향미 조회 수:613 추천:85

      



        요즘 들어 흰 머리가 부쩍 늘었다. 게다가 머리를 뒤로 묶고 다니다보니 흰 머리가그대로 들어나 보인다. 내 흰머리를 보면 자기의 나이를 새삼 깨닫게 되어 괴로우니 제발 자기를 위해서라도 염색을 해달라며 장난을 치는 동갑내기 친구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흰 머리가 이사 간 동네의 새 유행이라며 친구의 너스레를 받아쳐 버리곤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나이든 사람을 좋아했다. 젊음이 주는 풋풋함 보다는 인생의 연륜이 쌓여서 삶의 지혜가 가득해 보이는 나이 지긋한 점쟎은 사람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의 흰 머리카락은 그 지혜가 변해서 만들어진 왕관처럼 느껴졌었다. 말수 적은 남편에게서 어느 날 흰 머리카락을 발견 했을 때 난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었다. 절대 뽑지 않기, 염색하지 않기...라며 철없이 구는 아내를 보면서 남편은 헛웃음을 쳤지만, 영리한 남편은 아직까지 머리에 염색을 한 적이 없다.

        나 역시 처음 흰 머리카락을 발견했을 때는 그제서야 어른이 된 듯한 기분도 들었다. 처음에는 긴 생머리 사이로 삐죽이 들어나 보이는 흰머리가 어색해 보여서 뽑아보기도 했지만 곧 내버려 두게 됐다. 가끔씩 만나는 친정 엄마는 내 흰 머리를 보면서 공연히 안쓰러워 하셨지만 난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새로 사귄 교인 한명이 “최집사님...머리 염색 좀 하셔야겠네요. ” 라며 걱정스런 얼굴로 소근대듯 한마디 하셨다. 얼떨결에 장난 끼 섞인 목소리로 ‘그러게 말이예요’ 라며 간단히 대꾸 하고 넘겼는데 기분이 묘했다. 가슴 한구석이 불편했다. 그 기분이 오래 가진 않았지만 자꾸 생각나는 순간이다. 친구가 큰 목소리로 떠들어도, 친정엄마가 혀를 끌끌 차셔도 끄떡 않던 내 흰 머리가 순간 초라하게 느껴졌었다. 내가 아무리 지혜, 연륜, 왕관이라며 추켜세웠어도 흰 머리카락은 결국 염색으로 변장을 해야만 하는 존재였던가. 나 스스로 귀하게 여기고 흡족해 하던 것을 한순간에 초라한 존재로 여긴 것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곧 단오절이 다가온다. 창포물에 머리감고 그 뿌리로 비녀를 삼아 머리를 단장하던 우리 옛 여인들이 생각난다. 나쁜 귀신을 쫓기 위해 그렇게 단오빔을 했던 그네들처럼 나도 올 단옷날에는 단장을 해야겠다. 귀 옆으로 내려앉은 흰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어 넘기고 창포물에 씻어 내린 듯한 맑은 마음으로 그렇게 단오절을 보내고 싶다.




미주 한국일보 [여성의 창] 06-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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