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속 사람 사는 이야기

2018.12.26 14:35

성민희 조회 수:10

[이 아침에] 재난 속 사람 사는 이야기

성민희 / 수필가
성민희 / 수필가  

[LA중앙일보] 발행 2018/12/10 미주판 18면 기사입력 2018/12/09 13:25

 
캘리포니아는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면 한바탕 치르는 홍역이 있다. 오랜 가뭄으로 인한 고온 건조한 날씨가 만드는 산불이다. 우거진 고사목을 태우는 불에 샌타아나 바람까지 가세하면 걷잡을 수 없는 대형 산불로 번지니 재물 손실은 물론 인명 피해도 비껴갈 수가 없다. 
신문은 강풍, 산불 등의 단어로 지면을 채우고 TV는 지붕 위로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꽃과 공중에서 물을 뿌려대는 헬리콥터, 차 위에 짐을 묶어 얹고 피난민 행렬처럼 동네를 떠나가는 주민을 비춰준다. 비록 내가 겪는 일은 아니지만 연일 눈과 귀를 사로잡는 뉴스에 마음이 몹시 심란한데, 진흙에서도 말갛게 피어나는 연꽃처럼 그 북새통 속에서도 가끔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미담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지난 9월, 유타주의 우드랜드 힐스 지역에도 산불이 났다. 결혼식을 하루 앞 둔 한 커플이 결혼식장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자신의 집을 버리고 탈출을 해야 했다. 웨딩에 필요한 모든 물품은 물론 장소까지 잃은 그들의 사연이 이웃으로 퍼지고 페이스북과 트위트에 오르자 500명이나 되는 사람이 그들을 돕겠다고 나섰다. 면식도 없는 어떤 커플의 결혼을 위하여 자원봉사자들은 장소를 제공하고 새벽부터 데코레이션을 하고 케이크를 구웠다. 기억에 남을 환희의 날을 만들어주겠다는 낯선 사람들의 온정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큰 선물을 암담한 신혼부부에게 주었다. 인간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훈훈한 사랑이다. 
작년 9월, 내가 사는 오렌지카운티에도 산불이 났다. 매캐한 연기가 바람을 타고 다니는 그 와중에 코미디 같은 이야기를 듣고 오후 내내 웃고 다녔다. 
불이 난 애너하임힐스 동네 가까운 곳에서 기러기 부부로 사는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사업 때문에 한국에서 노모와 함께 살면서 아내와 자녀를 만나러 자주 들어왔다. 어느 날 저녁상을 물리고 뉴스를 보던 노모가 깜짝 놀라며 아들을 불렀다. "저기가 너희 동네 아니니?? 내가 미국 갔을 때 많이 보던 곳 같은데?"
TV 화면에 비친 주택가가 자기 동네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단다. 평화로운 정원을 끼고 있는 집 뒤의 산이 불에 활활 타고 있는 모습이라니. 정신이 번쩍 들어 미국의 아내한테 전화를 했다. "응, 아직은 괜찮은데 혹시 바람이 이쪽으로 불면 우리 동네도 무사하진 못할 거래. 경찰이 와서 그러는데 귀중품만 일단 챙겨 두라네. 여차하면 그것만 들고 나가야 해."
으악, 순간 숨겨둔 비자금 생각이 났다. 곧 이어 아내의 말. "혹시 당신 거 뭐 챙겨둘 만한 거 있음 말해."
그는 고백을 안 할 수가 없었다. " 응, 그…내 책장 끝에 꽂힌 '100살까지 사는 법'이란 책 있지? 그 책만 좀 챙겨줘."
얼마 후, 출장을 겸하여 미국에 온 남자는 너무나 무사한 집에 들어와서 비자금이 빠져나가 아무 소용이 없어진 '100살까지 사는 법'을 열심히 열심히 뒤적거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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