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뿌리가 닿아 있는 곳, 예수님

 

 

C장로님 내외분이 다가오셨다. 시선을 우리가 아닌 탁자 위의 콜라 깡통에 고정한 채. 막 수저를 들려던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남편이 얼른 콜라를 따서 컵에 붓고는 들고 오신 쓰레기 봉지에 빈 깡통을 넣어드린다. 인사 할 틈도 없이 장로님은 어느 새 옆 테이블로 가서 역시 봉지를 열고 서 계신다. 작은 키에 검소한 옷차림. 부족한 것 없이 유복하신 분이,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빈 깡통에 생계를 의지하는 노인으로 비칠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

 

장례 예배를 마치고 몰려온 사람들의 허기가 수북이 쌓인 고기 위를 저벅거리는데 두 분은 마치 깡통을 모으기 위해 온 사람처럼 테이블 사이를 누비고 다닌다. 한 달에 한 번씩 교회 헌금난에 리사이클링 판매 액수가 발표되더니 저런 수고가 있었구나 마음이 뭉클하다.

장로님은 아무도 못 말린다며 껄껄 웃던 어느 집사님의 말이 생각난다. 연세가 드시면서 보청기를 껴도 잘 못 들으니 웬만한 남의 말은 그냥 뚝 잘라 버리고 당신 뜻대로 일을 처리하신단다. 어느 비가 많이 오는 날. 교회 파킹장에 자리한 리사이클링 박스로 깡통이랑 신문지를 꺼내러 가자는 말씀에 모두들 손을 내저었다고 한다. 맑은 날로 미루자는 젊은이들의 엄살을 전혀 못 들은 장로님이 저벅저벅 앞서 가시니 꼼짝 못하고 따라가야 했다는 이야기는 불평이 아니라 장로님을 존경합니다하는 기분 좋은 소리로 들렸다.

젊은 시절에는 미국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까지 하셨지만, 차림새나 말씨, 눈빛 어느 것으로도 옛날을 내비치지 않는다. 의례적인 인사에도 손을 귀에다 갖다 대곤 진지한 눈빛으로 화답한다. 작은 호의에도 감사의 카드를 보내주신다. 자신이 속한 단체와 사람들에게 이렇게 깊은 애정을 쏟으시는 C장로님 내외분의 헌신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소문이 우우 호들갑을 떨다가 잦아들곤 하기를 벌써 몇 년 째. 꼼짝 못하고 누워서 암과 투병 중인 분을 찾아갔다. 아들과 단 둘이서 살고 있는 외로운 분이다.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도 아무 기척이 없다. 아들이 집에 없는 모양이다. 병을 앓기 전 부터 청각에 이상이 있었는데 이제는 아예 못 듣는다. 이런 날은 음식을 문 앞에 두고 가야한다. 그런데 오늘은 곰국이라 그럴 수가 없다. 개미가 몰려올까 걱정되고 햇볕 아래에서 상할까도 걱정이다. 창문에 고개를 들이밀고 안을 들여다보니 벽 한 쪽 소파에 누워있는 그 분이 보인다. 소파 속으로 몸의 반쪽은 아예 녹아 들어간 느낌이다. 누렇게 변색된 휠체어, 숟가락이 걸쳐진 그릇. 스산한 바람만 살아 움직일 뿐 방안은 고요함. 그것뿐이다.

옆 아파트 벨을 눌렀다. 물이 뚝뚝 흐르는 고무장갑을 벗으며 젊은 여자가 문을 열어준다. 냉장고에 넣어야 되죠? 내가 미처 부탁하기도 전에 내 손에 들린 냄비를 얼른 받는다. 어제 저녁에도 누가 죽을 가지고 왔고, 오늘 아침에는 홍삼 달인 차를 가지고 온 사람이 있었단다. 나만 문을 두드린 줄 알았더니 매일 보이지 않는 손길이 다녀가고 있었나 보다. 긴 병에 효자 없다던데. 이제는 사람들의 호의도 지쳤으리라. 기억에서 지운 사람도 많으리라 하던 생각은 내게만 적용되는 무심함이었다.

비좁은 냉장고지만, 한 칸은 아예 옆집을 위해 비워두고 있는 이웃. 죽음을 눈앞에 둔 가난한 과부의 한 끼를 위해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 정승 집 애완견이 죽으면 문상객이 장사진을 이루지만 정작 본인이 죽으면 손님이 없다는 세상인심에 역행하며 사는 그들의 마음 뿌리가 닿아있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

 

세상에는 아직도 아름다운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마음이 훈훈해진다. 남의 필요에 세심하게 반응하며 배려하는 사람. 약한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사람. 힘든 이웃에게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내어 주는 사람. 모든 것 바쳐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사랑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 어떤 색깔도 고집하지 않는 넉넉함으로 공동체를 화합시키는 사람. 밝은 표정으로 긍정적인 기운을 몰고 오는 사람. 언제나 용서해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진리를 붙잡고 요동하지 않는 용기가 있는 사람. 어느 모임에서든 이런 분을 발견한 날은 정말 기분 좋다. 그 모임엔 자꾸 가고 싶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연꽃을 보고 아제염오라고 했다. 이것은 비록 진흙탕 연못에서 자라지만 결코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고고하고 순결하게 꽃을 피운다는 뜻이다. 나는 안다. 비록 몸은 세상에 담그고 있지만 사랑의 수고로 향기는 피우는 사람들의 마음뿌리가 닿아 있는 곳을. 그들과 함께 살고 있음이 새삼 고맙다.

 

"내가 죽으면 저기 있는 소나무 옆에 묻어주게. 저 소나무는 많은 씨앗들을 퍼뜨려 나를 따뜻하게 해주고 나를 감싸 주었어. 그렇게 해 주게. 내 몸이면 그들에게 아마 2년 치 거름 정도는 될거야. " *윌로 존 할아버지의 유언이 생각난다.

 

*윌로 존 할아버지: 포리스트 카터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 나오는 체로키 인디언 할아버지

 

<사람이 고향이다 2016>  <2016. 10. 20. 크리스챤 헤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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