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라는 이름의 문학기행

2016.10.21 12:37

성민희 조회 수:91

욕망이라는 이름의 문학기행

 

 

  너무 덥다. 올해는 가뭄이 심해 공기조차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다. 담장을 타고 오른 부겐베리아 붉은 꽃잎도 바싹 말랐다.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켠다. 여행을 다녀온 뒤 바쁘다는 핑계로 덮어두었던 사진이랑 메모지를 뒤적여 테네시 윌리엄스를 컴퓨터 화면에 불러낸다. 그의 묘비 앞에서 5박 6일 동안 함께 즐거웠던 얼굴들이 활짝 웃고 있다.

 

  한국서 오신 임헌영 교수님과 고경숙 사모님, 엘에이는 물론 보스턴, 애틀란타, 하와이, 심지어 아부다비에서 날아 온 27명의 문인들이 시카고의 사부야 식당에서 이른 아침에 만났다. 첫인사를 나누는 자리인데도 마치 해묵은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는 분위기였다. 비록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글을 쓴다는 공통의 강이 서로의 마음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시카고 대학과 Oak Park의 헤밍웨이 생가 방문을 시작으로 뉴올리언즈까지 고속도로로 약 1,600Km를 버스로 다녔다. 링컨 묘지와 박물관이 있는 스프링필드, 마크 트웨인의 유적지 한니발, 미국 최고의 위스키 JIM BIM 공장, 멤피스의 마틴루터 킹이 피살된 모텔과 박물관, 테네시 윌리엄스의 묘지와 살던 아파트, 멤피스의 엘비스 프레슬리 집 그레이스랜드, 윌리엄 포크너의 생가와 묘지 방문 등, 작가들의 흔적을 뒤지느라 국도를 달린 것 까지 합치면 2,000 Km는 족히 넘는 것 같다.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약 417Km 라고 하니 무려 5배나 되는 거리를 여행한 셈이다.

 

  미시시피강을 따라 내려오다가 닷새째 되는 날 드디어 테네시 윌리엄스의 생가가 있는 콜럼버스에 도착했다. 우리들은 물론 여행사에서 나온 가이드조차 전혀 낯 선 길이라 지도와 인터넷 정보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늦은 오후에 도착하여 작가의 생가를 찾았지만 같은 길을 서 너 바퀴 뱅뱅 돌다가 포기했다. 한때는 <유리 동물원>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발표하여 전 세계의 연극계는 물론 영화계까지 들썩거리게 만들던 작가.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작가의 생가가 이렇게 허술하게 취급을 받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짠했는데, 그의 묘지에 가서는 실망이 더욱 컸다.

  해가 어스름 지는 시간. 다섯 시간을 꼬불꼬불 달려와서 생가도 못보고 가는 길이라 묘지조차 구경을 못하면 어떻게 하나 안달이 났다. 한 시간 남짓 더 달려서 도착한 그곳은 많은 사람들이 묻혀있는 공원묘지였다. 안내소는 이미 문이 닫힌 시간이라, 우리가 찾아야 할 묘지의 위치도 모른 채 가로수가 짙은 입구로 무작정 들어갔다. 넓은 언덕에 두 방향으로 갈라지는 길과 똑 같은 크기의 묘비들을 보며 막막한 심정이 되었다. “이 넓은 곳 어디에 가서 테네시 윌리엄스를 찾나.” 실망한 얼굴로 서로 수런거리는데 세 명의 인부들이 빗자루로 길 위의 나뭇잎을 쓸고 있었다. 구세주를 만난 듯 가이드가 뛰어내렸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묘를 찾는다고 하니 그 자리에 서서 손가락으로 비석하나를 가리켰다. 바로 우리 버스가 머리를 대고 있는 길가 맨 끝에 있는 묘비다. 모두들 반가워 환호성까지 질렀다. 이런 경우를 두고 하나님이 도우셨다고 하나보다.

 

  긴 사각형의 회색 돌에 ‘테네시 윌리엄스’라는 이름이 큰 글씨로 찍혔다. 시인, 극작가라는 설명도 있다. 원래 테네시 주의 주지사, 상원의원을 지낸 상류층 집안이었으나 할아버지 대에 몰락해 구두 외판원으로 살아가는 아버지와, 목사의 딸로서 전형적인 남부지역 여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가 뉴욕의 허름한 호텔에서 사망하기까지 1911~1983년이라는 기간도 표기되었다.

  그의 죽음은 파티에서 코케인을 섞은 와인을 마신 때문이다, 알콜 중독자인 그가 만취 상태로 토하다가 질식해서 죽었다, 혹은 병뚜껑이 목에 걸려 죽었다는 등 이유도 분분하지만 어찌 되었든 미국 극문학의 금자탑을 이룬 작품의 저자, 체호프 이 후 가장 위대한 작가라는 칭송을 받았던 사람의 무덤치고는 너무나 평범했다. 꽃 한 송이 없이 먼지만 뒤집어쓴 채 도로와의 경계 자리에 서 있는 묘비는 자폐증과 절망, 고뇌와 고통으로 가득했던 주인의 지난 세월을 말해 주는 듯했다.

 

  그는 다섯 살 때 디프테리아 후유증으로 2년간 걷기가 불편하게 되면서 수줍고 얌전한 성격으로 변했다고 한다. 여덟 살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샌 루이스로 이사를 했다. 내성적인 성격의 그는 남부의 전통적 가치가 살아있던 시골에서 번잡한 도시로 이사를 감으로써 그때까지 지녀왔던 경험과 삶의 방식과는 전혀 생소한 도시 문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도박을 즐기는 무절제한 아버지와 의지력이 강하고 히스테릭한 남부 여인인 어머니 대신 누나는 그의 정신적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어느 날 실연을 당한 누나가 신경쇠약으로 힘들어지자 그는 현실을 도피하듯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누나를 향한 깊은 애정은 여성 인물 묘사에 도움을 주었고 부모의 이질적인 성격도 그의 작품 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1944년에 발표한 <유리동물원>은 어머니와 누나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자전적인 작품이다. 주인공 로라 윙필드도 누나를 모델로 그린 인물이다.

 

  그는 미조리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던 중 학업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신발가게에서 창고 일을 하기도 했다. 단순 노동이 주는 무료함은 그로 하여금 많은 작품을 쓰게 만들었다. 그 후 아이오와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1939년에 자신의 이름 토마스 러니어 윌리엄스를 ‘테네시 주’에서 따와 테네시 윌리엄스로 개명하였다. 그는 <유리동물원>의 주요 주제와 인물을 더 발전시킨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1947년에 발표하여 퓰리처상과 뉴욕 극비평가상을 수상하면서 유진 오닐 이후 최고의 미국 극작가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는 28세 때에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발견했다. 동성애자로서 함께 했던 프랭크 멀로가 죽은 후에는 10년간이나 우울증을 헤매며 알코올 중독으로 치료를 받기도 했다. 한 때는 키웨스트에 머물며 헤밍웨이와도 교분을 나누는 위치였지만 1945년부터 1961년 사이에는 잔인하고 비도덕적이며 성도착증 환자들을 다루는 천박한 작가라며 문학비평가들의 혹평을 받았다. 인간의 내면에 잠재한 본능을 인정하고 그것을 동정과 사랑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매도를 당한 것 같아 나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사진을 찍고 묘지 곁을 걸어 나오는데 비석 아래쪽의 짧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The violet in the mountains have broken the rocks’ 란 문구다. <Camino Real>이라는 그의 작품 속에서 한 말인 것 같다. 직역을 하면 ‘산의 바이올렛 꽃이 바위를 부순다.’ 인데 무슨 뜻일까 한참 생각 했다. 집에 와서 인터넷도 뒤지고 아이들에게도 물어보았다. 조카가 빠르게 답장을 보내주었다. 어떤 여자가 미국 여배우 패트리샤 클락슨의 연설에서 이 구절을 처음 듣고 감격해서 썼다는 에세이였다. 패트리샤가 말했다고 했다. "내게 있어서 이 글의 의미는 참 간단합니다. 어떠한 힘들고 차갑고 나를 압박하는 일도 시간이 지나면 아름다움과 자연과 화려함과 살아있는 것(beautiful, nature, colorful, alive)들의 힘에 의해서 부서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바위를 부수는 바이올렛 한 다발이 있습니다. 미움과 허위로 형성된 바위는 결국 부서져버립니다.“

  글을 쓴 여자는 자기에게 바이올렛은 무엇이며 바위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고 했다. 사람에 따라서 모두 다르겠지만 테네시 윌리엄스에게 있어서의 바위는 무엇이었을까. 동성애와 어릴 적부터 따라다니던 질병, 가정불화에서 오는 정서적인 불안정, 누나의 정신병, 작가로서의 명성 뒤에 따라오는 불안감, 우울증 등이 아니었을까. 그는 그것을 이겨보려고 글을 쓰며 극 중 인물들을 통하여 그의 내면을 분출하고 치유하려고 애를 썼을 지도 모르겠다. 그의 고뇌에 무엇이 바이올렛이 되어주었을까. 그는 얼마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묘지를 지나 아름답고 부드러움이 넘치는 영혼의 고향 ‘엘리지안 필드’에 내리고 싶었을까.

  그는 과거로의 집착, 이중적인 성격, 외로음을 이기기 위해 술과 섹스를 탐닉하는 블랑쉬의 모습을 통해 ‘인간 본연의 고독과 내면의 욕구를 시정적인 언어로 잘 형상화했다’는 평은 물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잔인함과 냉혹함을 능숙하고 무리 없이 조율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공감하게끔 만드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주제로 글을 쓰는 천박한 작가라는 비난도 받았다. 세상의 평가가 어찌되었던 나는 비석에 새겨진 글에서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은 아름다움과 순결을 갈망한다는 그의 생각을 읽는다. 이번 여행은 테네시 윌리엄스라는 작가를 진정으로 만난, 그의 사진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해 준 고마운 여행이 되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지만 테네시가 어린 시절 살던 집은 보고 가야했다. 우리는 서둘러 묘지를 빠져나와 도심의 골목길을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좁은 길에 줄지어 선 아파트 앞에 버스가 섰다. 창문마다 전등불이 켜진 시간. 테네시 윌리엄스가 소년시절에 살던 집은 커다란 서민 아파트였다. 마구 자라난 누런 잔디 위에 ‘테네시의 어린 시절 집’이라는 팻말이 서 있다. 아파트를 팔기도 하고 전세도 준다는 문구도 있다. 이 집을 보려고 열심히 달려온 우리들은 누구인가 싶다. 테네시 윌리엄스가 어느 층 몇 호에 살았는지 전혀 안내도 없는, 그에 대해 아무런 흥미도 느낌도 없는 누군가가 살고 있는 이 아파트 앞에서 플래쉬를 터뜨려가며 회색빛 낡은 건물 사진을 찍고 있는 우리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혼자 픽 웃었다.

 

  다음날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러갔다. 뉴올리언즈의 프랜치쿼터 시내 관광을 하며 걸어가니 뎅뎅거리는 전차 소리가 들렸다. 신작로 한 복판을 지나는 레일 위로 ‘desire’라는 이름표를 이마에 붙인 전차가 지나갔다. ‘1835년부터 운행을 시작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스트릿카 라인’이라는 팻말도 가로수 밑에 서 있다. 우리는 모두 지갑을 뒤져 1달라 25센트를 손에 쥐었다. 거스름돈을 돌려주지 않으니 정확히 25센트짜리를 챙기라는 가이드의 말에 동전이 앞사람에서 뒷사람, 옆 사람에게로 막 돌아다녔다. 백인들만 북적이는 거리를 동양여자들이 우루루 전차에 올랐다. 한국의 입석 버스처럼 서로 좌석이 마주보고 있는 전차를 우리 일행이 모두 점령했다. 블랑쉬는 이것을 타고 동생을 찾아 갔구나. 동생조차 그녀의 구원이 되지 못하고 결국은 정신병원으로 가야 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그녀가 앉았음직한 좌석을 찾아보았다. 파티복같은 하얀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목걸이까지 했으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며 제일 한복판에 앉았을까. 아니면 구석자리에 얌전히 앉아서 갔을까.

  운전수가 뒤를 돌아보며 내리라고 했다. 우리는 또 우루루 내렸다. 크리올이라는 거대한 문화를 형성할 만큼 다양한 문화가 뒤섞인 뉴올리언즈. 가이드는 재즈가 흥겨운 거리를 걸으며 검보를 꼭 먹어야한다며 우리를 재촉했다. 검보는 오랜 세월동안 아프리카, 미국 원주민, 유럽의 요소들이 합쳐진 수프와 비슷한 음식이다. 우리는 블랑쉬에게도 테네시 윌리암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구수한 된장국 같은 검보를 정신없이 먹었다. 미국의 작가들 삶을 섭

렵하겠다던 우리들의 욕망은 이 맛있는 스프를 먹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2016년 한국산문 가을호) (재미수필 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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