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라도 스프링스

2016.03.29 09:20

성민희 조회 수:209

콜로라도 스프링스



6-8-03

  남편 회사 conference가 올해는 Colorado Springs에서 열렸다. 비행장 터미널을 빠져나오자 우리 이름의 피켓을 든 직원이 멀리 서있는 까만 세단차를 가리킨다. 차 문을 열고 서있는 정장 차림의 청년을 가까이서 보니 씩씩한 금발의 여자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고운 눈웃음을 흘리며 팔을 턱 벌려서 우리를 차 안으로 에스코트 하니 마치 우리가 마피아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마피아단 두목 쯤 되면 상당히 사는 게 즐겁겠다는 둥 철없이 농담을 하며 차에 올랐다.


  싱싱한 산 공기를 마시며 40분을 달려 해발 4000피터 높이에 있는 Broadmoor이라는 호텔에 도착했다. 1918년에 지었다는 이 호텔은 녹음이 짙은 산 아랫자락을 딛고 웅장하게 서 있다. 본관 뒤편으로는 큰 호수를 중심으로 또 다른 건물이 서 있는데, 산자락을 깔고 앉아 호수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은 스위스의 어느 산장에 온 기분을 갖게 해준다. 산은 건물로 인하여 더 신비하고 장엄하며, 건물은 산으로 인하여 더욱 고풍스럽다. 호수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골프장이 시원하게 펼쳐져 또 다른 느낌의 풍경을 보여준다. 자연과 인공의 독특한 조화가 이런 아름다움을 연출해 낼 수도 있구나. 건축가의 안목과 상상력이 감탄스럽다.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갔다. 주식 시장이 많이 침체된 탓인지 해마다 보던 얼굴이 올해는 별로 없고 새 얼굴이 몇 명 보인다. 뷔페 음식 둘레로 건장한 청년들이 앵무새, 펠리컨을 비롯한 이름 모를 여러 종류의 새들이랑 여우와 늑대 가죽옷을 입힌 당나귀까지 데리고 재주를 부린다. 조금 후에 서커스단의 묘기가 시작되었다. 두 남자가 나와서 고무줄처럼 몸을 늘려 기계 체조를 한다. 원통 위에 원통을 여섯 개나 더 올려놓고 그 위에 나무판자를 깔고 흔들리는 원통 위에 올라서서 춤을 춘다. 인간 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 인지 가늠할 수 없게 하는 밤이다.


  방에 들어오니 house keeper가 우리가 훌렁 들어가기 쉽도록 침대를 정리해서 반쯤 벗겨 놓고, 불빛도 은은한 가운데 고운 멜로디의 음악을 틀어놓았다. 민트 초콜릿 두 개도 베개 위에 단정하게 얹혀있다. 도대체 이 민트 초콜릿을 먹고 마음을 흔드는 음악을 들으며 몽롱한 조명 아래에서 무엇을 하라는 건지...



6-9-03

  남편은 아침 식사 후 세미나에 들어가고, 나는 미국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등정을 했다는 Stacy Allison의 강연을 들었다. 남편을 세미나로 들여보내고 무료히 있을 아내를 위한 회장 와이프의 배려였다. 그녀가 올라와서 “여러분은 이 팀과 여러분 배우자가 이룬 성공이 중요한 일원입니다.(You are the important part of this team and your spouse’s success!)”라며 우리를 막 추켜 세워준다. 괜히 한 일도 없으면서 내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기분은 좋다.

  곧 이어 등산가답게 깡마르고 새까만 40대의 여자가 올라섰다. 자기와 가족 소개를 먼저 한다. 의외인 건 남편 소개인데 ‘이 남자는 나의 마지막 남편이자 지금의 남편, 아이들의 아빠랍니다. (He is my final husband, current husband and my children’s father.)’ 라고 한다. 정말 우리들은 상상도 못할 말을 여기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해서 문화의 차이를 또 한 번 느낀다. 어떤 서류든 작성할 때는 몇 번 결혼했느냐고 묻는데 결혼을 몇 번씩 한 것은 전혀 흉이 되지 않는 세상이다.


  에베레스트 산은 해발 29,035 피트(약8,850 미터)인데, 정상을 정복하는 사람들은 도전자들의 25%미만이라고 했다. 자기도 처음 도착해서 산꼭대기를 바라보고는 울고 싶었단다. 거대한 산과 그 산 끝에 걸린 하늘을 보는 순간 자신은 정말 아무런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이 그렇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올라가야하나 말아야하나 심한 갈등을 하다가, 이혼해도 좋다. 나는 나다. 하고는 올라가기로 결심을 했단다. 갑자기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들은 남편의 비전에 얹혀 있지 말고 당신 자신의 비전을 한번 가져보라고. 순간 내 마음이 숙연해졌다. 나는 뭔가?

  처음 산에 오르면서는 몸은 계속 ‘stop’ 을 외치고 마음은 ‘go’를 외치고 있었단다. 45일간 등정을 했는데, 그때 마침 40년만의 강풍이 불어왔다. 시속 100마일의 바람에 눈이 쓸려 다니는데, 도저히 그대로 진행할 수가 없어서 동반 남자와 같이 snow cave에 5일간을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 우리보고 생각해보란다. 자연 생리 현상을 어떻게 처리했겠냐고. 옆에 구멍을 파고 서서 볼일을 보고는 덮어 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등산가들의 rule은 ‘no laughing’이란다. 전혀 남남인 남자하고 단 둘이서 45일씩이나 등산하고 먹고 자고, 또한 그런 좁은 공간에 갇혀서 지낸다는 사실이 참 건전하게 느껴졌다. 남자와 여자가 아닌 독립된 인격체로 대등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게 또한 이 나라의 멋진 문화다.

  해발 17,600피트에 베이스캠프가 있는데, 거기서는 출발하기 전에 불교식의 offering celebration을 2시간 30분간 한다. 그리고는 새벽 2시에 출발하는데, 출발하면서 “Your adventure changes your mountain!" 하고 외친다고 한다.

  해발 20,000피트에 두 번째 캠프가 있는데, 그곳에 가려면 얼음 계곡 사이를 아슬아슬한 그네 사다리를 타고 지나가야 한다. 좁고 깊은 계곡이라 떨어지면 바로 지옥행인데, 마음속으로 I’m all right! I’m balanced! Don’t fall down!을 끝없이 외치며 공포를 달랬단다. 사진 영상을 보니 정말 아찔하다. 그 곳을 지나고 나면 얼음 위에다가 125개의 프라스틱 학이 꽂혀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긴장에 지친 사람들이 동화 속을 걷은 것 같아 미소가 나온다고 하니 아이디어가 괜찮은 것 같다. 자막에 비치는 학들의 색깔이 화려하다. 비록 싸구려 유치한 프라스틱이지만 마음이 푸근해진다. 해발 26,000피터에 있는 마지막 캠프를 거쳐, 드디어 정상에 올랐는데, 미국 국기를 꽂으며 감개가 무량했다고 한다. 최초의 미국 여성 에베레스트 정복 순간이.


  오후에는 Broadmoor 골프장의 East Course에서 골프를 쳤다. 이곳은 마흔 다섯 개의 홀이 있고, 세계 골프 챔피언 대회가 자주 열린다고 했다. 1918년에 처음으로 18홀의 골프장으로 출발하여 지금까지 계속 키워 나왔는데, 그때 첫 PGA대회의 상금이 500불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5백만불이다.

  처음 호텔에 도착해서 로비마다 커다란 통에 우산이 꽂혀 있기에 웬 우산이 곳곳에 있나 했는데 그 이유를 오늘에야 알았다. 골프 토너멘트는 매 홀마다 골프팀이 각각 산재해 있다가 한꺼번에 게임을 시작하는 방식인 샷건으로 진행되었다. 진행자가 게임 규칙 설명 끝에 골프를 치다가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즉각 중지하고 돌아오라는 말을 덧붙였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올 거니까 위험하다는 말이었다. 이렇게 맑은 날씨에 무슨 천둥 번개?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시작할 때는 맑고 화창하던 하늘이 7번 홀부터 갑자기 흐려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며 다시 맑아지나 했더니 12번 홀부터는 슬슬 보슬비가 날렸다. 정말 변덕스런 날씨다. 아니나 다를까 14번 홀 그린 위에 공을 올리고는 퍼팅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며 빗방울이 세어졌다. 남편은 심각하게 말했다. ‘계속 칠 수 있을까?’ 같이 치던 상대팀 남자도 하늘을 쳐다보며 ‘글세... ’ 남자 둘은 걱정을 하며 하늘을 쳐다보고, 나는 두 손을 모아 비를 받고, 상대 여자는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 앉아서 퍼트 라인을 재었다. 그 와중에 드디어 웽~~~하고 사이렌이 울었다. 나는 또 한 번 미국 사람들한테 놀랐다. 암만 사이렌이 울어도 나 같으면 공을 툭하고 쳐서 홀에 넣고 일어날텐데 그 여자는 사이렌 소리를 듣자마자 ‘오, 스탑!’ 하면서 그냥 공을 주워 일어났다. 그리고는 부리나케 카트를 타러 쫒아간다. 천둥이 치는 것도 아니고 번개가 번쩍이는 것도 아니고 그냥 비만 오는데도 사이렌이 울었다고 일제히 클럽하우스를 향하여 돌진하고 있는 카트들을 보며 이 나라 사람들의 준법정신을 또 한 번 보았다.

  클럽하우스에 돌아와 빗물을 모두 닦기도 전에 하늘이 말갛게 개었다. 호텔로 돌아가겠다고 신발을 바꿔 신고 있는데 종업원이 와서 물었다. ‘계속 치러 갈 거예요?’ 겨우 두 세 홀 남았는데도 마저 치겠다고 자기 홀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돌아오며 참 순진하고 반듯한 사람들, 좋은 나라에 내가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6-10-03

  US Olympic Training Center엘 갔다. 한국으로 치면 태능 선수촌 쯤 되는 곳이다. 점심을 먹자마자 서둘러 버스에 타고 보니 노인 부부들만 열 쌍 정도 앉아 있다. 올림픽에 출전할 선수들 훈련 받는 곳이라 젊은 사람들이 많이 흥미 있어 할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보다. 가이드조차도 할머니다. 일흔 살 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빨간색 티셔츠에 옆이 터진 진 치마를 입었다. 샌들구두 위에 얹힌 야윈 발가락에서 빨간 메니큐어가 반짝인다. 하얀 머리 안쪽에도 빨간색 귀걸이가 딸랑인다. 이렇게 차려 입어도 왜 미국 할머니들은 왜 추해보이지 않을까? 나이가 들어도 화려한 색깔에 입술이랑 손톱을 빨갛게 칠하며 멋을 부리고 다녀도 어색하지 않다. 그리고 열심히 일한다. 관공서건 개인 사업체건 가리지 않으며 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 할머니도 약 50분간을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줄 곳 서서 설명을 해주었다. 얼마나 힘이 들랴 싶은 맘에 고개를 돌리고 있기가 짠해서 열심히 쳐다보니 귀로만 얘기를 듣고 눈은 바깥 풍경을 감상하라며 도로 우리를 배려해준다.


  올림픽 선수촌이 있는 동네는 1871년에 생겼다. 선수촌은 전체가 32 에이커나 되며 1975년에 세워졌다고 했다. 버스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화단 앞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왁 하고 비명을 질렀다. 무심코 걷던 한 여자가 화단 한 쪽 끝에 발을 헛디뎠다. 그곳은 잘못 디디면 발목이 부러질 만큼 땅이 많이 파여 있었다. 가이드가 조심하라며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는 사이 어느 새 일행 중 한 남자가 돌멩이를 주워 와서 구멍을 막는다.

정문에 들어서니 건물 큰 벽에 Olympic Committee Corporate Sopnsors라는 큰 글씨가 보인다. 이런 곳을 후원해 줄 정도면 엄청나게 큰 기업체 이겠구나 싶어 살펴보니 미국의 큰 기업체가 몇 개 있고 일본의 Kodak, Panasonic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삼성도 있다. Sam Sung이라고 적힌 글자를 보는 순간 마음이 환해지며 내가 바로 한국 사람이라고 큰소리로 말하고 싶었다.

  건물 안에는 태권도 동상도 보인다. 그것 역시 반갑다. 그러나 더 반가운 건 각종 대회 신기록 기념으로 수여된 상패들이 있는 전시장에 있었다. 각국에서 수여한 기념패들 한 쪽에 누런 금관이 앉아 있다. 전체 분위기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금빛 왕관이 암만 봐도 경주 불국사에서 본 신라시대 왕관이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가까이 가 봤다. 아니나 다를까 금관 설명 자리에 한글이 가득 적혔다. 제목은 Korean Crown Trophy. 2002년도에 300미터 Rifle Shooting Championship 세계 신기록 기념으로 그 당시에 Organizing Committee 회장으로 있던 박종규라는 사람이 기증한 것이다. 남편은 ‘아! 박종규, 미국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권총잡이지.’ 아는 체를 하는데 나는 도통 처음 듣는 이름이다. 허지만 이런 외진 곳에서도 한국은 색깔을 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은 뿌듯하다.

  수영장도 둘러보았다. 넓은 수영장 바닥에 열 두 개 각도로 수중 카메라가 설치되었다. 선수들의 움직임을 열 두 군데서 찍어 분석하며 연구한다니 과학적이고 치밀한 훈련을 할 수 있는 이런 경제적인 뒷받침을 어찌 가난한 나라들이 따라올 수 있을까 싶다. 구경을 마치고 나오니 들어올 때 누가 땅이 파였다고 신고를 했는지 일군들이 와서 그 땅을 메운다.


  저녁에는 Formal Party가 있다. 남자들은 턱시도에 정장, 여자들은 이브닝드레스 차림의 시상식이 있는 파티다. 남편은 해마다 같은 옷에 같은 보우타이를 매면 되지만 나는 똑같은 드레스를 입고 나갈 수가 없어 그게 항상 부담이다. 새 드레스를 찾아다녀도 땅딸한 한국 아줌마를 빛내어 줄만한 옷, 더군다나 어깨와 등을 가려줄 얌전한 것은 고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올해는 에라 모르겠다 옛날에 입었던 것 누가 기억하랴 하는 마음으로 오 년 전 드레스를 들고 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가 나를 너무 몰랐던 것이다. 드레스를 입고 나니 뒤에서 보던 남편이 고개를 자꾸만 갸우뚱거린다. ‘이기 와 이리 자꾸 덜뜨노.’ 고개를 뒤로 젖혀서 보니 지퍼 위를 덮어주는 천이 붕 떠있다. 손으로 누르면 지퍼를 얌전히 덮어주는데 손을 놓으면 또 붕 뜨는 것이다. ‘어서 벗어봐라. 오는 길에 잘못 눌려졌나보다. 다리미로 한번 다려보자.’ 남편은 드레스 위에 타월을 깔고 있는 힘을 다 해 다리미를 눌러서 다시 입어보라고 주는데 문제는 그냥 있으면 얌전히 덮혀 있는 것이 내가 입으면 슬며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나는 상황 파악이 빨리 되었다. 그러니까 오 년의 세월을 흘리면서 서서히 늘어난 내 허릿살을 이 드레스는 수용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옷이 작으니까 지퍼 잠그는 부분은 늘어질 데가 없어 들뜨고 일어설 밖에. 남편은 그걸 눈치 채지 못하고 계속 이상하다 소리만 연발하며 조금이라고 누르고 있으면 갈아 앉으려나 싶어 내가 화장을 다 마칠 때까지 손바닥으로 지퍼를 덮고 있다.


  보통 날의 디너는 뷔페로 좋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먹지만, 오늘은 한 테이블에 여덟 명씩 주최 측에서 정해주는 대로 앉아야 한다. 사교성이 전혀 없는 나는 늘 이 저녁이 불편하고 싫다. 한국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처음 보는 사람하고는 몇 마디 인사를 나누면 할 말이 없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는데, 하물며 미국 사람들 상대로야 어찌 말로 다 할까.

  다행히 오늘 옆에 앉은 부부는 어머니가 이태리 사람이라며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다. 자기 엄마는 영어를 잘 못하는데, 영어를 하면 이태리 엑센트가 묻어나서 참 귀엽다고 한다. 그리고는 자기 이름을 부르는 엄마의 발음을 흉내 내며 좌중을 웃겼다. 내 영어 엑센트 흉내를 내는 우리 아이들을 보는 것 같다. 친구들을 초청한 생일 파티에서 영어 노래를 부르는 내 입을 기겁을 하며 막던 아들 얼굴도 떠오른다. 하기야 경상도 사투리 발음이니 아이들 듣기에 오죽 하랴. 미국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내가 근무하던 사무실 동료들은 나보고 경상도 영어한다고 놀려대었다. 혹 집안 식구하고 전화를 할 때면 사무실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모두 시선은 딴 데 두고 안 듣는 척 했지만 수화기로 들여보내는 내 말에 몰래 킥킥대었다. 나는 그때 경상도 사투리와 영어에 이중으로 시달려야 했다.


  식사 후 시상식이다. 사회자가 “Mr. Berry Laufman and his supporter Mrs. Brenda Laufman” 하고 수상자를 호명한다. 여기서는 남편의 성공은 전적으로 아내의 내조 덕분임을 인정해준다. 이름이 불린 남편은 아내를 에스코트하여 나가고, 먼저 무대에 올라선 아내가 호들갑을 떨면서 꽃다발을 받으며 사장과 포옹을 한다. 남편이 상을 받고 나면 무대 위에서 당당하게 키스를 한다. 무대 위의 사람들이나 관중석 사람들 모두 ‘이 모든 영광을 아내에게’ 하는 분위기다.

  오늘은 특별히 40년을 근무한 Mr. Maclean이 은퇴식을 겸한 자리다. 자막에서 그의 젊은 시절 활동 슬라이드가 비치는 동안 무대 위에 가수가 나와 Frank Sinatra의 ‘My Way’를 중후하게 부른다. ‘이제 끝이 다가 오는 군. 마지막 커튼도 내 앞에 있어.’ Mr. Maclean이 그의 아내 손을 꼭 잡고 천천히 무대에 올라온다. 둥그런 배를 감싸고 있는 턱시도의 넓은 허리띠(gummerbund)가 불빛 아래 반들거린다. 그가 살아온 세월이 줄줄 스크린 안에서 불빛을 타고 걸어 나오는 것 같다. ‘나는 충만한 삶을 살았어. 모든 고속도로를 다 달리면서.’ 회장은 감사패를 증정하며 악수와 포옹을 하고. 회장 부인은 그의 목에 양팔을 걸치고 볼에 다정한 키스를 해준다. 옆에서 회장과 가벼운 포옹을 끝낸 아내를 향하여 몸을 돌린 주인공이 뜨겁게 아내를 끌어안으며 입을 맞추자 앉아서 박수를 치던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지른다. 손바닥이 깨어지듯 하는 힘찬 박수에 넓은 ball room이 열기로 꽉 찬다. 곧 이어 아기를 안은 딸 부부와 아들 부부도 올라온다. ‘사랑했고 웃었고 울었지. 가질 만큼 가져도 봤고, 잃을 만큼 잃어도 봤어. 이제 눈물이 가신 뒤에 보니 모두 즐거운 추억일 뿐이야.’ 식구들이 모두 무대에 올라와 서자 일어선 사람들은 앉을 줄을 모르고 손뼉을 계속 보낸다. 머리가 허연 그가 아기를 안고 활짝 웃는 젊은 날의 자기 모습을 배경으로 서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는다. 관중석에서도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이 보인다. 나도 눈물을 닦는다.


6-11-03

  파이크스 픽(Pikes Peak)라는 곳에 갔다. 기차를 타고 간다기에 나는 일반 기차를 생각했는데, 모양만 기차지 Cog Train이라는 관광용 트램이다. 한 시간 동안 무려 해발 14110 피트까지 올라갔다. 얼마나 높은 산인지 짙은 수목이 우거진 골짜기, 콜로라도 도시, 숲에 쌓인 산들이 구름 사이로 내려다보여 마치 비행기를 탄 것 같다. 높이 올라갈수록 시야에 들어오는 누런 돌산들은, 화씨 30도의 낮은 기온과 매정하게 불어오는 바람 탓에 나무들은 자랄 수가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산을 3분의 1쯤 올라가니 그 높은 곳에도 집이 몇 채 보인다. 돌 사이사이 하얀 눈들이 녹지 않아 몹시 황량한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는 모양이다. 가이드의 말을 빌면 그들은 매일 17마일씩이나 나가서 메일을 가져 온다고 한다.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과 위스콘신에서 왔다는 고등학교 수학 여행단까지 잔뜩 실은 트램은 마치 곡예를 하듯 구불구불 산길을 타고 올라간다. 산 정상을 향해 끝없이 이어진 철길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철도 공사하는 일은 언제까지나/ 철도 공사하는 일은 끝이 없구나/ 우렁찬 기적 소리 울려퍼지면/ 곡괭이를 내려놓고 즐거운 식사) 고등학교 때 부르던 노래를 불렀다. 옛날 미국의 동부에서 서부까지 철도를 놓을 때 중국 사람들과 흑인들이 많이 동원되었다던데. 사막 위로 끝없이 이어지는 선로를 바라보며 가족 생각, 고향 생각에 얼마나 마음이 슬펐을까. 이 노래를 부르면서 향수를 달랬나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시시한 비행기 한 대 운영하는 것 보다 이 트램 한 대 운영하는 게 훨씬 이익이겠다. 이 트램. 참 아이디어 좋네. 우리나라 제주도에도 한라산으로 올라가는 트램 만들면 사방이 바다니 그 경치는 얼마나 좋을까.” 바깥만 내려다보던 남편이 갑자기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한라산에다 이런 트램을 설치하면 자연 훼손이잖아. 멋진 산은 산 그대로 잘 보존하면서 감상해야지.” 뜬금없는 남편의 말에 나도 한마디 했다. “무슨 소리야? 스위스에 가봐라. 그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알프스 산에도 정상에 올라가는 트램 만들어 놓고 얼마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는데?” “... 당신 알프스 산에 가봤어?” “ 아니, 말만 들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경사가 무척 심하다. 앞자리에서 물병과 사과, 심지어는 신문지까지 굴러 내려온다. 속도 메스꺼운 게 멀미 현상도 생기기 시작한다. 드디어 산 정상에 온 모양이다. 사람들이 환호를 지르며 내리는데 우리는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 자리에 앉았다. 옆 사람이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산소 부족 때문이니 빨리 물을 마시라고 일러준다. 어떤 사람들은 병에 든 산소를 사서 코에 대고 숨을 들이쉰다. 산소도 바닐라향, 딸기향 등 향을 넣어 만들었다고 한다. 장사치들의 아이디어가 놀랍다. 먼저 다녀 온 사람들이 산 정상에서 사먹은 도넛 맛이 일품이라고 하도 자랑을 하기에 우리도 그 와중에 도넛 하나씩 샀다. 머리가 아파 맛도 모르겠다.


  저녁에는 영화 캐릭터 의상 파티가 있다. 사람들은 파티 의상 대여해주는 집에 가서 빌려오고, 혹은 자기들이 코디해서 재미있게 꾸며 입고 나오는데 우리는 전혀 그런 문화에 익숙지 않을 뿐 아니라 또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해마다 준비 없이 구경만 한다. 올해는 1980년대 영화 캐릭터 옷이라 별 신통한 것이 없다. 입구에서 주최 측이 해주고 있는 얼룩덜룩 펑크 머리를 한 사람들이 눈에 뜨일 뿐 독특한 차림이 없다. 몇 년 전 1950년대 영화 캐릭터 의상일 때에는 크레오파트라, 시저 등 고대 옷들이 참 멋있었는데.

  음식을 들고 식탁에 앉으니 단발머리에 빨간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게슴츠레 눈을 반쯤 감은 여자가 나비 같이 손을 벌리고 날아다니다가 우리 자리로 와서 인사를 한다. 나는 한 눈에 마릴린 먼로구나 싶어 “마릴린 먼로?” 아는 척을 했다. “노~ 아이 엠 마돈나!” 깔깔 웃으며 날아가 버린다.

  옆의 남자가 나보고 1980년대에는 뭘 하고 있었느냐고 묻는다. 그냥 1980년 하니까 엊그제 같은데 막상 돌아보니 무려 30년이라는 엄청난 과거의 시간이다. 빨간 모자를 쓴 남자가 와서 우리 보고 마돈나의 히트곡을 세 개 말하면 상을 주겠다고 한다. 옆 사람은 하나씩 찾아내지만 나는 전혀 생각이 안 난다. 조용필 노래는 많이 아는데, 설훈도 노래도. 심수봉 노래도... 남편하고 둘이서 마주보며 웃고 있는 사이로 까만 복장에 모자를 쓴 마이클 잭슨이 어느새 곁에 와서 내 볼에다 키스를 막 퍼붓고는 달아난다. 오 마이 갓! 세상에 이런 일이.


  1980년대의 춤과 노래로 왁자지껄한 가운데 시중을 들어주는 웨이트리스 중 한 사람이 아무래도 한국사람 같다. 다 먹고 난 접시를 거두어가는 그녀의 명찰을 보니 Cha인 게 분명히 한국 사람이다. 그리고 또 한 편에서 연회장 전체를 둘러보고 서 있는 메니저도 역시 한국사람 같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저녁도 만두, 잡채, 갈비, 김밥 등이 섞여있었다. 한국 사람이 여기서 일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남편과 나는 벌떡 일어나 그 남자에게로 갔다. “혹시 한국 분이세요?” 그가 우리보다 더 깜짝 놀란다.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이런 곳에 한국 사람이 섞여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단다.

  그 분은 1974년도에 이민을 왔다고 한다. 이 호텔을 첫 직장으로 그의 새 삶이 시작되었다. 그때는 먼저 일하고 있던 한국 사람의 소개로 줄줄이 연결 되어 이곳이 마치 이민 정착의 관문처럼 되었지만 이제는 교민들이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어 리커스토어 (한국의 편의점)등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단다. 엘에이에도 이민 초창기에는 봉제 공장에서 많이 일했듯이 여기서는 이 호텔이 한국 사람들의 첫 정착지였나 보다. 그러고 보면 참 고마운 호텔이다.

  지금도 주방에는 일곱 명의 한국 여성들이 일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의 메뉴에 한식이 섞여 있었나 보다. 한국 사람임을 알고 난 후부터 그 메니저는 열심히 우리 테이블에 와인과 쥬스를 갖다 주며 많이 먹으라고 한다. 같은 핏줄의 당김이 참 따뜻하다.


  파티를 마치고 돌아오며 남편이 말했다. “우리도 만약 처음에 여기 떨어졌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 얼굴이 어두워졌는지 남편이 히히 웃는다. 남의 나라에 와서 정착한다는 게 얼마나 서럽고 힘든 일인지, 살아야한다는 절박감이 어떤 건지 실감이 났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딛고 일어서는 이민 1세들의 땀방울을 2,3세들은 알기나 할까? 내일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나면 이국 땅 깊숙이 뿌리를 내린 우리들이 참 장하다고 자화자찬을 해야겠다.

<사람이 고향이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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