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도도 가르쳐야 한다

2016.09.02 14:55

성민희 조회 수:141

효도도 가르쳐야 한다

성민희 / 수필가

 

무심코 켠 TV 화면 속에 군인아저씨들이 무대를 바라보고 와글와글 앉았다. “만일 죽을 때까지 시간이 일 년 밖에 남지 않았는데 5억이라는 돈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방송사 MC의 말에 솜털 보송보송한 군인들이 킥킥 거린다. 남은 시간이 일 년뿐이라는 건 안중에도 없고 공짜 돈 5억에 몹시 흥분 되었다.

 

MC가 마이크를 들고 군인들 사이로 다닌다. 옙! 팔등신 미녀와 크루즈여행을 가겠습니다. 옙! 저는 여친과 세계 일주를 하겠습니다앗! 옙!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가겠습니다. 모두 우렁차게 대답한다. 벌써 하와이 야자수 나무 아래에서 파티라도 하는 듯 앞뒤로 서로 마주보며 신이 났다.

이윽고 느리고 낮은 배경 음악이 나온다. 대형 스크린에 머리가 히끗히끗한 엄마가 자주색 소파에 앉았다. 질문이 반복되었다. 예, 제대하고 돌아오는 아들에게 주겠습니다. 아이고, 그 돈을 내가 우째 쓰겠심미꺼. 아이들한테 나눠줄낍니더. 네. 아들의 사업 밑천으로 주겠습니다. 상상의 돈이지만 행복을 나눠주는 느낌인지 부모들은 모두 환하게 웃는다.

모자가 들썩거리며 천정으로 솟아오를 것 같던 분위기가 순간 조용해진다. 다시 카메라 앵글이 움직여서 무대 아래를 천천히 비춘다. 어느새 고개를 숙인 무리들 가운데 한 아이가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는다. 여기저기에서 쿨적이는 소리도 들린다. “부모님을 모시고 크루즈여행을 가겠습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누가 말하자 다른 아이들의 대답도 모두 애인이 부모님으로 바뀐다. 환상적인 크루즈여행이 효도관광으로 급선회했다. 그 모습이 너무 천진스러워 나는 혼자서 깔깔 웃는다.

 

천방지축으로 나대던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마음을 읽자 숙연해진다. 그들에게 부모란 어떤 존재이기에 금방 이런 눈물을 보일까. 진심어린 ‘아이 러브 유’를 보고 마음을 적시는 그들을 보니 자녀의 마음 밑바닥에는 이미 부모에 대한 연민의 강이 흐르고 있구나 싶다.

아들이나 딸의 무관심과 무례를 섭섭해 하는 사람을 주위에서 가끔 보았다. 그러나 오늘은 자녀의 행동을 섭섭해만 할 게 아니라 애정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현명한 어른 노릇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아이들 안 깊은 곳에서 흐르고 있는 강물을 두레박으로 퍼 올리는 것은 순전한 부모의 몫이다. 부모 노릇을 배우지도 못한 채 엄마 아빠가 된 우리들처럼 아이들도 효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다행히 집안에 어른이 있어서 섬기는 모습을 보았다면 그나마 롤모델이 있지만 핵가족으로 사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 천재라고 불리려면 적어도 아이큐가 171.3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약 100만 명 중에 한 명꼴인 셈이다. 배우지 않았는데도 부모에게 잘하는 자녀는 효도의 천재성을 타고 난 것이 아닐까. 100만 명 중에 한 명으로...

 

내 사위는 대만 사람이다. 부모가 일찍이 미국 유학 온 사람들이라 그 역시 중국말은 한마디도 못하고 동양 문화도 모른다. 볼 때마다 그저 ‘하이’하고는 뻘쭘하게 서 있어서 한 식구가 된 지 4년이 다 되어도 도무지 정이 들지 않았다. 어느 날 가르쳤다. 한국 사람한테는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하고, 나보고는 장모님이라 부르라고 했다. 요새는 활짝 핀 얼굴로 안녕하세요, 큰소리로 말하고는 슬며시 옆에 와서 앉기까지 한다. 텍스트 메시지를 보낼 때는 용건만 쓰던 녀석이 얼마 전에는 앞에다 ‘Chan Mo Nim’이라고 써서 보냈다. 내 촌스런 경상도 말이 찬모님으로 들렸나보다. 다음에 만나면 장모님이라는 확실한 발음도 가르칠 작정이다.

 

<2016.8.26 중앙일보 이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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