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일지 / 분당에서

2013.02.05 12:52

성민희 조회 수:669 추천:35

서울 일지 / 분당에서

    
오늘 종일 눈이 올 거라고 한다. 뉴스를 듣자마자 부산발 KTX를 취소하고 고속버스를 타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은 고속버스를 취소하고 KTX를 탄다는데 나는 오히려 거꾸로 하고 있다.

 

하얗게 눈을 이고 논두렁에 걸터 앉은 벼 낟가리와 지붕 위에서 호호 불며 피어나는 굴뚝 연기를 볼 수 있을지도 몰라. 휙휙 창을 스쳐 지나는 함박눈의 촉감을 볼 수 있을지도 몰라. 눈 내리는 휴게소의 갓 찐 감자와 뜨거운 커피. 후루룩 가락국수를 먹을 수 있을지도 몰라.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치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표를 사며 알았다. 어느 좌석을 줄까 묻는 매표원 아가씨가 3번 좌석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아 있단다. 누군지 모르지만 그 사람하고 동생과 나. 세 명이 대형 고속버스를 전세 내어 가는 셈인가 보다. 잠시 불안한 마음이 스쳤지만 곧 마음을 부풀렸다. 에라. 모르겠다. 함박눈을 마주보고 달려 볼 기회가 언제 또 있을까. 맨 앞자리를 달라고 했다. 차가 떠나기 직전 두 명의 아저씨와 아줌마 한 사람이 더 탔다. 도합 여섯 명이다. 기사 아저씨까지 합치면 일곱. 럭키세븐인데 뭔 일 있을라고.

고속도로는 그야말로 라르고( largo). 트럭은 짐 위에 사뿐 내려앉은 하얀 축복이 쏟아질까 조심조심이고 연인을 태운 승용차도 마주 부딪쳐 오는 눈꽃이 다칠세라 살금살금 이다. 우리의 운전기사 아저씨만 눈송이가 부서지건 말건 사정없이 달렸다. 덕택에 서울 도착 시간이 그리 많이 늦진 않았다. 호텔에 첵인만 하고 바로 분당으로 향했다. 내일이면 엘에이로 가는데 그래도 그녀를 한 번 더 보고 가야지. 배 속에서는 꼬로록 소리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온다. 길가의 어묵꼬치와 떡볶이 냄새가 뒤통수를 마구 잡아당기지만 부지런히 지하철을 탔다.

남편이 와 계신다는 말에 커피숍에서 잠깐 보자고 했다. 잠옷을 벗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왔을법한 늦은 시각. 목도리를 두르고 길가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에 울컥했다. p선생샘은 어제 미국으로 들어가셨고, 남편도 내일 가신다고 하고. 나도 떠난다. 혼자 남아 또 얼마나 지리하고 외로운 시간을 견뎌야 할지.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으면 뭘 하나. 오롯이 혼자서만 감당해야하는 이 투병의 시간을.

커피를 마시고 길가로 나왔다. 헤어지는 시각. 인증 샷을 찍자는 내 말에, 그녀가 곁에 다가서며 낮게 중얼거리듯이 말한다. “찜질방에 갔는데 카운터 아가씨가 나보고 경로우대증 있느냐고 묻잖아요. 남편이 화가 나서 이 사람 아직 젊었어요. 하는데. 남편한테 미안하더라고요. “ 얼마나 가슴에 처절히 찍혔으면 이 바쁜 순간에……. 그 짧은 순간을 떠올렸을까. 미안하더라는 말이 내 귀에는 남편이 참으로 고맙더라는 뜻으로 들린다.

함박눈 속을 위험하게 달려온 고속도로의 여섯 시간보다 호텔로 돌아오는 한 시간이 더욱 길었다. 어서 봄이 와야 할 텐데. 기어이 오고야 말 그녀의 환한 봄이 간절히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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