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숙제

2008.03.26 04:29

성민희 조회 수:754 추천:106



마지막 숙제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예전과는 달리 얼굴이 까칠하다.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줄줄이 하소연을 쏟아놓는다.

 

작년부터 한국에 계신 친정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리면 올케가 반지를 훔쳐 갔다는 둥, 팔찌를 훔쳐갔다는 둥 속상해 하며 부쩍 올케를 미워하셨다. 그렇게 좋던 고부 사이가 이렇게 깨어져버릴 수도 있나 싶어 한국으로 나갔다고 했다.

몇 년간 뵙지 못한 사이 어머니는 신경 쇠약 증세로 몸과 마음이 몹시 피폐해지셨다. 혼자 사는 노인의 외로움이 너무 깊어 병까지 얻었단 생각에 어머니를 미국으로 모셔왔다. 혹시 무슨 병에라도 걸린 걸까 싶어 종합 검진을 했더니 신경 쇠약에다 치매의 조기 증세까지 겹쳤단다신경 쇠약을 고칠 것인가 치매의 진행 속도를 늦출 것인가 둘 중 하나를 택일하라는 의사의 말에 종잇장처럼 마른 몸부터 회복 시켜드릴 양으로 신경 쇠약 치료를 시작했다.

몇 주가 지나면서 조금씩 살이 오르며 보기가 좋아지긴 했지만 치매기는 진행되고 있어 금방 한 일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니 그것 또한 마음 아픈 일이었다발톱이 살을 파고들어서 의사가 발톱을 빼어낸 벌건 발가락을 보고 언제 봉숭아물을 들였는지 고개를 갸우뚱 하시더란다. 공원에 나가 봄 꽃들의 화사함에 감탄을 연발하신 분이 집에 돌아와선 까맣게 잊어버리고 또 경치 좋은 곳에 놀러 가자고 조르고. 당신의 물건을 도둑 맞을까 봐 종이에 싸고 또 싸고 어디로든 숨기기 바쁘다. 방문을 열면 돌아앉아 물건을 싸고 계시는 모습에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어머니의 보폭에 맞춘 느린 아침 산보, 목욕. 그 모든 일상에 친구는 힘들어하고 있다.

뇌수술 하신 시어머니를 돌보며 한국에 홀로 계신 친정어머니를 안쓰러워하는 친구나, 구순 시어머니 손을 꼭 잡고 건강하게 살아계시는 것을 축복으로 생각하는 친구나, 치매를 마주한 어머니가 불쌍하다며 마음 아파하는 친구를 보며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도 언젠가는 나를 보며 우울한 마음을 가지겠지 하는 서글픔이 생긴다. 그런 날이 멀리 있지 않다는 초조함도 함께.

어느덧 중년 고개도 한참 넘어온 나이. 노년의 시간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시간을 텀벙거릴 때 좀 더 힘 있고, 깨끗하고, 우아하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건강한 신체 어느 부분 하나 나빠지지 않은 채 잘 듣고 잘 보고, 젊었을 때의 그 총기마저 간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식들이 전혀 보호해드려야 한다는 마음이 들지 않을 만큼 씩씩하게 살고 싶다.

자식들이 모두 내 곁을 떠나 시간이 풍성해진 지금부터 열심히 준비해야 할 삶의 마지막 과제가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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