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바심과 잔소리

2007.10.28 02:13

성민희 조회 수:682 추천:82

 

조바심과 잔소리

 

 

  컴퓨터가 바이러스를 먹었는지 자판기를 두드려도 모니터에 글자가 뜨지 않는다. 눌러보고 또 눌러 봐도 아무 흔적이 없으니 답답해서 그만 전원을 꺼 버렸다. 그리곤 또 다시 전원을 넣고 하기를 벌써 며칠 째. 생각 같아서는 내다 버리고 싶지만 그래도 오늘은 인내심을 가지고 살살 달래며 한번 작업을 해보리라 마음먹고 앉았다.

 

  글자 한 자를 치고는 가만히 기다리면 꾸물거리며 글자가 뜬다. 답답하지만 나타나주니 고맙다. 반드시 글자가 나타난다는 컴퓨터의 상태를 알고, 믿고, 이해하고, 기다리고 있으려니 '옛날 아이들 사춘기에도 이런 마음으로 기다려 주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정말 아무 소용도 없는 애간장을 혼자서 많이도 태웠다. 언제나 저 TV를 끄고 공부하러 들어갈까. 속이 부글부글 끓어 인제 그만 끄고 방에 들어가 공부해. 소리가 목까지 차는 걸 누르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지. 그 말을 참으려고 할 일도 없는 부엌을 들락날락 하며 5분을 더 있으니 아들은 TV를 끄고 방에 들어갔다. 한 발 늦추기를 정말 잘 했구나.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고, 그 잠깐을 못 참고 TV 끄라는 소리를 질러 서로 마음이 상한 적도 있었다. 돌아보면 아이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계획도 있는 걸 언제나 내가 앞질러 가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얼마 전, 고등학교 한인학부모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미세스 민이 전화를 했다.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청소년 범죄'에 관한 세미나를 위해 경찰을 연사로 초빙했다고 했다. 이미 우리 아들은 대학생이 되었지만 학부모 활동 선배라며 가끔 나를 부른다. 그 날도 세미나 장소에 나갔다. 경찰은 마약을 하는 아이들의 태도, 마약을 하는 아이를 발견했을 때의 주의 점, 갱단에 가입하면 일어나는 사건들, 실제 갱단이 저지른 범죄사실 등을 아주 적나라하게 교육을 시켜주었다. 내가 학부모일 때도 이런 세미나를 연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내놓고 보면 그 세미나를 듣는 학부모의 자식들에게는 아무도 해당 사항이 없는 내용이었다. 갱단에 연루되거나 마약을 하는 아이들은 전체 아이들의 1%도 안 되는 숫자다. 그리고 우등생도 상위 1~2% 밖에 없다. 그 외는 모두 중간에서 평범하게 학창시절을 보내는 아이들이다. 그러나 엄마들은 아이가 모범이 아니면 갱이 되는 걸로. 중간 지대를 인정하지 않고 속을 끓인다. ALL A를 받던 아이 성적표에 어느 날 B가 하나 보이면 낙망이 대단하다. 아이가 혹 갱단에 가입한 건 아닐까 하고.

 

  경찰과 일정을 맞추느라 전화로 대화를 하는 미세스 민 등 뒤에서 딸이 말하더란다. “엄마, 경찰을 부를 게 아니라 카운슬러를 불러야 해. 우리가 무슨 범죄를 저지른다고 경찰을 불러? 우리들이 경찰의 교육을 받을 만큼 나쁜 아이들이야? 우리보다 엄마들이 먼저 상담을 받아야해. 엄마들이 더 문제야."

  학교에 가면 우울증으로 약을 먹는 아이들도 있고, 집이 싫다며 밖에서 빙빙 도는 아이들이 많은데, 모두가 다 엄마의 잔소리 때문이라고 한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 “죽고 싶어.” “외로워.” 가 요즘 아이들의 현주소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 그 정도일까? 설마 하지만 옛날의 나를 돌아보면 아들이 얼마나 숨 막혀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잠시라도 책상에 앉아 공부하지 않으면 곧 성적이 떨어질 것 같고, 친구들이랑 놀면 그냥 빈둥거리는 걸로 보여 공부에 흥미가 떨어지면 어쩌나 싶고. 실력 있는 과외 선생님을 찾아줘야 할 텐데. 커뮤니티 서비스를 해서 봉사 점수를 올려야 할 텐데. 내 마음엔 언제나 조바심이 있었다. 그 조바심과 애태움이 가져다 준 결과는 아무 것도 없었는데도 말이다.

지금도 생생히 생각나는 말이 있다. “엄마, 이 세상에서 나보다도 더 내 성적 땜에 고민하는 사람 있음 나와 보라고 해!” 11학년 들어 성적이 떨어졌다고 나무라는 내게 방문을 쾅 닫으며 던진 아들의 말이다.

 

  성적이 나쁘다며 야단을 친다고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하기 싫은 공부 억지로 하라고 해서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는 느긋이 믿고 아이가 철들어 쫒아와 주기를 기다리는 게 최선이라고 한다면 너무 안일한 생각인가? 어른이 되고 나서 철들면 뭐해요? 하고 따지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그 시절, 나의 잔소리 때문에 내 아들이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잠시라도 살았다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사람이 고향이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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