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를 보았다.

2007.09.21 23:12

성민희 조회 수:757 추천:50

딸이 Netflix라는 회사에서 영화 CD를 우편으로 받아 빌려 보고 있다. 덕택에 나도 스토리같쟎은 시시한 영화에서 부터 흘러간 명화까지장르와 수준을 막론하고 부담 없이 영화들을 즐기고 있는데 어제는 한국 영화를 하나 빌렸다고 했다. 스토리의 전개가 빠르거나 심각한 대화가 지나가면 반드시 부언 설명을 들어야하는 엄마의 탐구심(?)이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오랜만에 눈에 힘주지 않아도 들리고 신경 쓰지 않아도 척척 내용이 이해되는, 오아시스 같은 시원함을 맛보라고 제목조차도 '오아시스'로 빌렸단다.CD를 보자마자 옛날 신문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나서 아는 척을 했다.
"그 영화는 뇌성 마비가 심한 아가씨와 어떤 남자가 사랑하는 이야긴데, 한국서 굉장히 인기를 끌었다고 하더라."
그렇게 좋은 영화를 왜 여태 안 봤냐는 듯 딸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쳐다본다.&
추운 겨울날 한 남자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건들거리며 다가가 담배 한대 달라고 한다. 무심코 건네주는 담배를 받아 물고는 불도 빌려달라고 한다. 귀찮은 표정의 남자에게 또 자기 행선지로 가는 버스 노선을 묻는다. 영화를 보는 나도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하는 느낌이 든다. 남자가 눈을 올려 홍종두(설경구)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그를 피해 멀리로 걸어 가버리고. 머쓱해진 종두는 작은 옷가게로 가 주인과 흥정을 한다.
"엄마, 겨울인 데 저 남자는 여름옷이네?"
나보다 훨씬 딸의 관찰력이 뛰어나다.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으니 눈으로 이해하고 있나 보다. 옷을 사고도 계속 얇은 남방 차림으로 추위에 벌벌 떨며 두부를 사먹는 모습에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왜 갈아입지 않지?"

몇 년 만의 출옥에도 마중 나오지 않은 가족을 찾아 옛집으로 가보니 이사를 가버렸다. 감정 없이 실실 웃으며 건들건들 거리를 배회하던 그가 무전취식으로 붙들려 간 경찰서에서 정체가 밝혀진다. 폭력, 강간 미수, 음주 운전으로 인한 과실 치사. 연락을 받은 동생이 찾아오고, 가족들의 한숨 소리와 형수의 노골적인 구박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주섬주섬 비닐 가방을 뒤진다. 아까 가게에서 사 온 옷은어머니 것이었다.
"삼촌 없이 살 때 는 정말 편안했어요."
모진 말을 하는 형수에게 엄마 선물 밖에 못 샀는데, 형수 선물은 다음에 사 주겠다고 한다. 한없이 맑고 순수한 종두의 영혼을 처음 대면케 해주는 장면이다

자장면 배달부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다 어느 날 자기의 음주 운전으로 인하여 세상을 떠난 피해자 집을 찾게 되고, 거기서 중증 뇌성 마비로 사지가 뒤틀린 채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는 피해자의 딸 한 공주(문소리)를 만나게 된다. 남자는 모자라는 지능으로, 여자는 육체적인 장애로.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두 사람의 만남은 그들만의 오아시스를 만들어가게 한다공주의 방 높은 곳에 걸린 오아시스 그림. 밤이면 그 위에서 일렁이는 창밖 나뭇가지 그림자가 무섭다는 공주를 위해 종두는 ‘수리수리 마수리’를 중얼거린다. 그림자가 사라지라는 전화 속 마술에 공주는 정말 사라지는 그림자를 환상으로 보며 그녀 안에서 서서히 자리 잡아가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 한다. '일하는 사람이 부럽다'는, 꺽꺽거리며 음절을 겨우 잇는 공주의 말을 마음에 담고 카센터에 취직한 종두. 기술을 배우며 삶 속에 발을 디딘다. 니네들에게는 밥을 팔지 않으니 나가 달라는 식당 주인의 푸대접을 받으면서도 종두는 공주를 휠체어에 태워 다니며 데이트를 한다. 사랑이라는 상상 안에서 그들은 예쁘고 사랑스런 정상의 여자가 되고
듬직하고 씩씩한 남자가 되어 춤도 추고 싸우기도 한다. ‘수리수리 마수리’가 정말로 실현되어 저렇게 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며 만화 같은 스토리의 반전을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 꿈꾸었다.

어머니의 생일잔치에 휠체어로 공주를 밀고 가서 결국은 내 인생의 방해자가 되지 말아달라는 동생의 호소를 듣게 되던 날, 너무나 절망한 종두는 눈동자도 제멋대로, 손발도 뻣뻣이 허공을 휘젓는 공주를 발가벗기고 사랑의 밤을 보낸다. 좋다는 표현의 괴성에 '아프냐? 그럼 그만둘까?' 말할 수 없는 배려로 둘이 한 몸이 된 순간, 공주의 오빠와 올케가 들이닥치며 아름다운 사랑의 정원을 엄청나게 추악한 범죄 장소로전락시킨다. '성욕이 생기더냐. 너 변태냐'며 경찰은 파렴치한 강간범으로 조롱한다.

종두의 억울함을 호소하려 왁왁 거리는 공주의 몸부림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며 달래는 올케. 아무도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변명이나 설명 같은 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결코 만날 수 없는 두 세계가 거기에 있었다. 자신의 잘난 장래를 위해 동생을 음주 운전범으로 만들어 대신 감옥으로 보낸 야비한 형과, 장애 동생 이름으로 좋은 장애자 아파트를 분양받아 살고 있는 오빠. 그들에게 동생의 희생은 희생이 아니었다. 타성과 이기심과 폐쇄된 사고의 강한 자들과, 아무에게도 아무 영향도 끼칠 수 없는 약하고 무능력한 사람들. 범죄자가 되기에는 무능력과 못가진 자라는 것만으로도 충분요소가 충분하다. 거기에 더하여 장애자니 더 무엇이 필요하랴. 정신 장애자에게도 지순한 사랑이 있고, 지체 장애자에게도 욕정이 있음을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 어린 양을 불쌍히 여기시고---"
감옥에 면회 온 어머니와 목사님의 기도를 받던 중 탈출한 종두는 밤이면 나뭇가지 그림자를 무서워하는 공주를 위해 창 앞 나무 위에 올라가 톱질을 한다. 밑에서는 형사들이 내려오라 총을 들이대며 고함을 지른다.오아시스 그림 위에서 하나하나 없어지는 나뭇가지 그림자를 보고 종두임을 알아챈 공주는 라디오 볼륨을 높여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온몸을 뒤틀며 넘어지며, 창밖을 향해 소리 지를 수 없는 자신의 목소리 대신 라디오를 들여대는 공주. 마지막 가지를 떨군 채 말끔해진 나무 위에 올라앉아 환호하는 종두. 사랑의 힘에, 사랑의 아름다움에, 사랑의 슬픔에, 사랑의 애절함에 가슴이 저려 주인공은 웃고 있는데 나는 울었다. 딸도 옆에서 훌쩍거리며 울고 있다. 이해를 하고 우는 것인지, 내가 우니까 따라 우는 것인지

역시 이창동 감독이었다. 소설가 출신답게 시나리오도 튼튼했고 메시지도 분명했다. 설경구의 무심하고 천연덕스러운 건달 연기, 문소리의 완벽한 중증 지체 장애자 연기도 프로였다. 문소리는 이 영화를 찍고 나서 뒤틀린 몸을 바로 잡느라 무척 힘이 들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옥에 티라면, 공주의 방에서 인도 여자와 아이가 코끼리와 함께 나타나 두 사람과 같이 춤추는 장면인데, 상상 속의 장면이 좀 더 환상적으로 처리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었다. TV를 끄고 나서도 한참을 생각나게 하고 또 보고 싶은 찡한 마음이 들게 하는 영화를 오랜만에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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