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앉을 자리

2007.09.08 07:11

성민희 조회 수:633 추천:51

알람 설치를 하라고 만날 때마다 성화를 부리던 동생이. 마음 먹고 전

화를 걸어왔다. 옆집에 도둑이 들어와 옷장이며 경대며, 아이들 방 책상

서랍, 심지어 이불보까지 뜯어내어 발 디딜 틈도 없더라는 흥분된 설명 뒤

에 또 당연한 잔소리를 했다. 나쁜 소문을 들어보지 못한 동네라 아직은

안심하고 살지만 세상이 너무 무서워졌다는 말이 쉽게 귓전에서 떠나지 않

아. 동생이 소개해 준 알람 회사에 연락을 했다. 금방 달려온 두 기술자가

이곳 저곳에 전선을 연결하고 뚝딱거리더니, 알람을 끄고 켜고 할 때 사용

할 비밀 번호를 달란다. 식구들이 잊어버리지 않을 번호 4개를 달라는데.

무엇으로 해볼까? 우리 집 전화 번호? 집 주소? 이것 저것 가져와 보는데,

왔다 갔다 정신 없던 남편 음력 생일이 떠올랐다. 매년 생신을 묻던 아이

들의 노고도 덜어줄 겸 양력으로 정해보니 명절에 가까운 날이다. “너희들

이 집을 떠나가 있더라도 잊지 말라고 비밀 번호를---“ 저녁에 모인 아이

들에게 생색까지 내었다. 아버지 생신을 비밀 번호로 정한 엄마의 영악한

배려를.

생일을 정해 놓고 보니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아이들이 결혼하고 나

면 다니러 오기가 쉽지 않을텐데. 아버지 생신이 명절에 붙어 있으면 두

번 다니러 올 일이 한 번으로 줄어버린다는 마음과. 만약 멀리 산다면 전

화 인사로 끝내기가 쉬울텐데 그나마 연휴니까 반드시 찾아 올거란 생각과.  

연휴에 묶어버리길 잘 했다는 만족감이랑 두 번 볼걸 한 번만 보나 하는

아쉬움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며칠을 보냈는데. 오랜만에 친구가 찾아왔다.

생각이 깊은 사람인지라 나의 심각한(?) 고민을 털어 놓았다. 내심으로는

잘못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하면서. “그냥 지네들 편하게 해줘라. 연휴에

잘 묶었다.” 순간 머리 속이 쨍 하고 차가워졌다. 귓등으로 듣던, 내 어머

니가 친구들과 나누시던 말씀이 바로 내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냥 아이

들 편하게 살도록 해줘라.) 많이 듣던 말이다. 자식들 이야기로 한숨을 섞

던 할머니들의 하소연 뒤에 내려지던 서러운 위안이다. 우리가 어느새 이

런 위안으로 마음을 덮어야 하는 나이가 되었을까.

친구의 대답이. 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멋진 엄마가 된

것 같아 명쾌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아이들의 삶과 내 삶이 이렇게 철저

히 분리될 수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서로 엉켜 무겁다. 주고 주고 또 주

고도 더 주고 싶고, 행여 세상 찬 바람에 상처 받을까 겹겹이 팔을 벌려

덮어주던 세월은 다 지나가 버렸나 보다. 오직 그들에게 부담이 될까 스스

로 움츠리며 비껴줘야 하는 시간이 왔을 뿐.

잊고 있었던 지난 9월의 서운함이 떠오른다.  뺨 속에 이상한 몽우리

가 생겨서 수술을 했었다. 남편과 딸은 당연히 병원을 들락거렸지만, 필라

델피아에서 대학을 다니는 아들에게는 연락하지 않았다. 달려오지도 못 할

텐데 괜히 마음 고생만 시키나 싶어서. 퇴원하는 날. 딸이 전화를 했다. 엄

마가 수술을 했다고. 전화를 바꾸고 목소리를 듣다 보니 괜히 서러움이 북

받쳐 내가 훌쩍훌쩍 울었다. 그랬더니 전화기 저쪽에서 아들도 흑흑 운다.

운동도 하면서 제발 건강 관리 잘하라며 울음을 다듬고는 한마디 던지던

꾸지람이 고맙고 대견했다. 내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니고 나를 보호하

는 존재 같아 든든하기도 하고 녀석의 사랑이 애틋한 것도 같아 행복했었

다. 그런데,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퇴원은 잘 했는지, 상처는 잘 아

물고 있는지. 전화 한 통 없었다. 어찌 이리 무심한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

점 괘씸해지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투덜거렸더니 “당신도 인제 늙었구나.

무소식이 걱정되지 않고 서운해지기 시작하면 그건 늙었다는 신호란다.”

세상을 다 살아본 사람처럼 태연하다.  듣고 보니 그랬다. 내가 돌봐줘야

할 사람의 무소식은 당연히 염려스러울텐데 괘씸한 마음이 든다는 건 상대

가 나를 돌보고 있지 않다는 섭섭함 때문이겠지. 여전히 나는 앞에 서서

씩씩하게 진두지휘 하며 그들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는 줄 알았었는데.  내

가 전혀 느끼지도 못한 사이. 어느 새 저만큼 밀려나와 바라만 보는 자리

에 앉게 되었나 보다. 내 도움이 더 이상 도움이 아니고 간섭이 되어버린

아이들. 세상 앞에 당당히 서서 제 목소리로도 노래 할 수 있노라 외치는

데도 나는 혼자서 그들의 튼실한 벽인양 착각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대학으로 직장으로 떠나면서부터 가끔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

는 모성(母性)을 본다. 그건 언제 어디서나 부르는 소리에 힘껏 튀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데. 얼마나 자주 불려질까 자신이 없다. (그러나 영원히

불려지지 않는다 해도 녹슬거나 지치지 않을 것이다.) 무조건 지네들 편하

게 살도록 던져두라는 말에, 관계라는 것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는 내 마음.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도무지 비낄 필요가 없

는 또 다른 자리를 찾아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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