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 뒤에 찾아온 성숙한 느낌

 

 

 아무래도 내가 비정상인 것 같다. 새벽에 눈을 뜨니 어제 친구의 딸 결혼 피로연이 있었다는 생각이 번쩍 든다. 그야말로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가 초청장까지 만들어 주었는데 어쩌면 이럴 수가 있나. 정작 그 시간에는 T.V.를 보면서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블랙아웃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음이 급하다. 이른 아침이지만 친구에게 솔직히 고백하는 카톡을 보냈다. ‘깜박 했어.’ 앙앙 우는 이모티콘 까지 넣고 보니 우리 나이에 이보다 더 이해가 되는 익스큐즈가 있을까 싶다. 
 이런 정신 상태라면 앞으로 매사에 얼마나 더 신경을 곤두세운 채 살아야할까. 옛날에는 음악을 크게 틀어 둔 채 옆자리 친구랑 이야기를 하면서도 앞서가는 친구 차를 따라가는 운전을 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옆자리 사람이랑 이야기만 하고 가도 길을 놓친다. 엄마가 옆에 앉아서 조용히 해라. 운전만 해라 하던 말씀이 그때는 귀찮더니 이제야 이해가 된다.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이 어제 내가 풀장에 수돗물을 틀어놓고 잠그지 않아서 자기가 나가 잠궜다며 혀를 끌끌 찬다. 돌아보니 전혀 수돗물 틀어두었다는 생각 없이 잤다. 농담처럼 치매인가 봐, 했지만 심각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에는 오직 한가지씩만 일을 처리하고 그것을 완전히 끝내고나서 다른 일을 한다며 딴에는 조심을 했는데.


 올 해 들어 부쩍 내가 나를 믿지 못 할 때가 많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놓고 다른 사람과 의견이 엇갈릴 때는 그냥 져 준다. 상대방이 맞을 거라며 마음을 비운다. 억울해서 펄펄 뛸 일도, 앞 뒤 순서 맞추며 따질 일도 크게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보니 별 일 아니다. 오해를 받더라도 이해해 달라고 변명하지 않는다. 나를 이기려는 상대방을 오히려 치켜 올려 주면서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다. 나를 온전히 체념하지 않으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정에 서서히 익숙해지고 있는 모양이다. 더 초라해지고 낮아지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없다. 바보 같은 나, 멍청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 때문일까. 엔간한 사람들의 실수나 잘못은 마음앓이 없이 이해하거나 덮어준다. 옛날에는 전혀 용납되지 않던 감정이 오히려 지혜로운 덕으로 느껴지니 우리의 육체만 늙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늙어 가는가 보다.

 

  87세의 나이로 미국의 대학교를 졸업한 로즈 할머니 이야기가 인터넷에서 화제다. 그녀는 힘든 대학 공부를 마치고 졸업식을 한 일주일 후에 죽었다고 한다. 장례식에 2,000명이나 되는 동급생 대학생들이 문상을 왔다고 하니 얼마나 멋진 노년을 보냈나 싶다. ‘나이를 먹는 것은 무조건적이지만, 성숙한다는 것은 선택적입니다.’ 그녀가 남긴 말을 마음에 담는다.

 

  이제 슬슬 머릿속 용량도 적어지고 기억장치도 깜박깜박 쉬고 싶어 하니 더 무엇을 기대하랴. 나의 마음문도 헐렁헐렁 열어두고 살고 싶다. 어떤 말이든 마음대로 들락거리게 하고 가끔가다 마음에 드는 녀석 있으면 그것 붙잡고 웃기도 하면서.

  어떤 노래 가사에서 그랬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곧 익어가는 거라고. 그러고 보니 맞다. 익은 과일일수록 맛있는 향기를 내는 것. 이제  '깜박 했어' 하는 나의 변명이 앞으로 얼마나 더 자주 사용될 지 걱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조차도 익어하는 한 과정이니까. 과일은 익을수록 향기를 내지 않는가. < 8/3/16 이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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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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