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사띠엠뽀의 달

2013.03.23 08:12

성민희 조회 수:493 추천:35

빠사띠엠뽀의 달



독립 기념 연휴를 맞아 떠나는 23일의 골프 여행이다새벽길을 달려온 사람들이 두 대의 여행사 버스에 나누어 타고 페블비치 쪽으로 떠난다. 찬 공기가 아직 가시지도 않은 새벽. 버스에 오르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휘파람 소리가 난다.    

엘에이 도심을 벗어나니 에어컨 바람조차 청량하게 느껴진다. 포도밭을 안고 있는 산 등 허리의 초록이 점점 짙어지며 스치는 바람에서 포도 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먼 데서 풀을 뜯는 젖소의 등에 구름 한 조각 내려앉고 있다.    

예정된 세 군데의 골프장 중 첫날은 Spy Glass Hill이다. 한 낮인데도 골프장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안개에 가려진 울창한 숲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금방 소나기를 뒤집어쓴 것처럼 촉촉이 젖은 숲을 몽환적이라는 단어 외에는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잔디 위를 구르는 공의 유희에 물방울이 통통 튕겨 오르며 화답한다. 나지막이 가라앉은 하늘 아래 출렁이는 파도와 바다냄새. 숲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에 취해 언제 18홀이 끝났나 싶다. 와인을 부상으로 준다는 크로스핀(Cross-Pin)을 우리 팀에서 두 사람이나 했다. 덕택에 내일 오후에 근사한 와인 파티를 열자며 모두 즐거워한다.  

이튿날은 전체 여행객들과 따로 행동하기로 했다. 와이너리를 들러 골프장으로 가는 대신 우리 일행은 Santa Cruz에 있는 빠사띠엠포 골프장(Pasatiempo Golf Club)으로 간다. 우리 팀 열 명을 위하여 중형 버스가 특별히 배정되었다. 약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환경이다. 햇볕이 무척 따갑다. 헛헛한 바람에 아침부터 시달리고 있는 잔디 위를 달리며, 우리는 연신 물을 마셔대야 했다.

라운딩을 마치고 330분에 오기로 한 버스를 기다렸다. 얼른 호텔에 가서 샤워하고 와인파티를 하자는 기대로 부풀어있는데, 네 시를 훌쩍 지나 다섯 시가 되어도 차가 나타나질 않는다. 교통체증이 너무 심해서 아직도 중간 지점까지밖에 못 오고 있단다. 여기에 있으나 호텔에 가서나, 수다로 시간을 보내는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누군가를 기다리며 보내는 시간은 정말 지루하다. 교통체증을 예상 안 하고 늦게 출발한 기사 아저씨의 불성실에 화도 난다. 여섯 시가 넘어서야 허둥지둥 차가 나타났다. 벌겋게 익은 운전기사의 모습이 엔간히 고생한 듯하다. 우리의 짜증스러운 마음은 그 얼굴 앞에서 모두 흔적 없이 달아나 버렸다. 무사히 차를 탔다는 것에 감사해 할 뿐.
그런데. 기사가 계속 부릉부릉 시동을 거는데도 차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모자를 벗어 던지고 차 밑을 들여다본 그가 한숨을 쉰다. 라지에이터가 터져 기름이 새고 있단다. 급히 주차장으로 들어오다가 유달리 높은 입구 둔덕에 바닥이 심하게 부딪혔다고 한다. 어이가 없다. 도로 내리라는 기사의 당혹스런 표정 앞에서 싫은 내색도 못하고 내렸다. 소식을 들은 여행사 사장이 다른 차를 수배해 두었으니 기다려 달라며 전화를 했다. 어느새 일곱 시가 되었다. 프로샵이랑 골프장 문을 닫는 시각이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건물 한 귀퉁이에 모여 서서 새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다.

뜨겁던 햇살이 사라지자 바닥에서 서늘한 기온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연휴인 관계로 어느 회사의 버스도 빌릴 수가 없다고 한다. 안절부절 하던 기사는 렌트 회사에 가서 밴을 빌려 오라며 아내에게 전화를 한다. 얼마나 더 배고픔에 시달려야 하는지 기사가 원망스럽다.
두어 시간을 기다렸을까. 밴 한 대가 급하게 들어와 구세주를 만난 듯 모두 와 일어났다. 그리곤 또 난감해졌다. 8명이 정원인 밴에서 여자에 이어 아이가 세 명이나 따라 내린다. 우리 팀만 열 명에 기사까지 모두 열 한 명인데. 네 명의 식구까지라니. 연휴라 영업을 하는 렌트 회사도 찾기 어려웠고 큰 차도 없더라며 여자가 미안해한다. 더구나 꼬마들을 집에 두고 올 수가 없었단다. 서로 멍하니 얼굴만 쳐다본다. 대책이 없다.
작은 사내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있던 여자가 아이들을 데리고 고장 난 버스 쪽으로 걸어간다. 남편이 버스에서 기다리라고 한 모양이다. 오히려 우리가 기다릴 테니 가족을 집에 데려다 주고 오라고 했다. 그들의 집도 두 시간은 가야 한다며 한사코 사양이다. 아이들은 신나는 모험이라도 하는 양 다투어 버스에 오른다.  
휑한 파킹랏 한구석에 그들을 두고 나왔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깜깜한 바깥 풍경에만 시선을 줄 뿐 차가 달리는 내내 아무도 말이 없다. 손님들을 싣고 허둥대며 떠나는 남편을 보는 아내 마음은 어떨까. 쓸쓸하고 어둡고, 한편 춥기까지 한 무인도에 어린아이들과 여린 아내를 남겨두고 나오는 가장의 마음은 어떨까.  
호텔에 도착하니 11시가 넘었다. 호텔 지붕이 부옇게 보이기 시작하자 누군가가 한숨을 쉰다.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 너머로 환한 달이 보인다. 달 속에 아이들의 모습도 오글오글 보인다.  빠사띠엠뽀 골프장 달도 저렇게 밝게 떠 있겠지. 우리는 서로 한마디 인사도 하지 못한 채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길고도 피곤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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