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발길이 머무는 곳

2003.12.07 04:48

장태숙 조회 수:812 추천:58

눈물을 뚝뚝 떨군다는 동백을 만나러 선운사에 갔다.
겨울 선운사.
텅 빈 진입로를 1월의 바람이 쓸고 있었다.
한껏 잡아당긴 고무줄처럼 탱탱한 바람은 내 뺨을 후려치며 달아나곤 했다.
한적한 고요...
겨울 산사는 고독한 섬과 같다.
산이라는 바다에 둘러싸인 섬.
사천왕이 험상궂은 얼굴로 버티고 있는 천왕문을 들어 설 때부터 내 온 몸은 풀먹여 말린 창호지처럼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천왕문 옆 마당 구석에 하늘로 솟을 듯한 감나무 몇 그루가 눈에 띈다. 이파리 하나 남지 않고 조각의 뼈대 같은 감나무는 누가 하늘에 붉은 구슬을 뿌려 놓은 듯 올망졸망한 감을 그대로 매달고 있었다. 그 동안 눈이 내려도 몇 번은 내렸음직한 1월에, 이파리는 전부 떨구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다운 빛깔을 잃지 않고 혼신의 힘으로 실가지 끝에 머물고 있는 주홍빛 감이 여간 대견스러운 게 아니었다. 끝이 아득한 꼭대기의 감들은 검은콩들이 하늘에 박힌 듯 하다.
흔히들 꼭대기의 감들은 그냥 둔다. 까치 밥이라고 하던가? 하찮은 새들의 월동까지 걱정하는 우리 조상들의 마음씀이 따뜻하다. 그러나 까치 밥 정도가 아닌, 손 하나 대지 않는 듯한 감나무를 보노라니 자연 그대로를 지키려는 선운사 스님들의 넉넉한 마음을 보는 것 같다.
대웅전 쪽으로 돌아서려다 문득 감나무 밑에 공중전화 부스가 보였다.
청색 테두리를 두른 네모난 유리상자.
많이 보아 온 낯익은 물체가 왜 이곳에서는 생소하게 느껴질까? 마음까지 자연 속으로 스며드는 산 속에서, 현대문명의 하나가 그 곳에 자리하고 있음은 묘한 거부감과 어색함을 느끼게 한다.
있지 않아야 될 곳에 있는 것.
그러나 현대의 삶은 그것까지도 필요로 하리라. 어쩜 저 전화부스까지도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 속으로 들어 온 내가 자연의 일부가 되었듯이...
대웅전 앞뜰에 발을 딛으니 마치 집주인 허락 없이 남의 집에 객이 들어선 것처럼 민망함이 앞선다. 사죄하듯 대웅전 불상에 머리를 수그리는데 '데-엥'하고 종소리가 울린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스님들이 머무는 집인 듯한 마루에서 웬 스님 한 분이 종을 치고 있다.
저녁 공양을 알리는 종소리일까?
종소리는 수심 깊은 바다 속 같은 절의 앞마당을 출렁이게 했다. 화들짝 놀란 적막이 흩어지며 날개를 펼치고 계곡 사이로 날아간다. 몇 개의 소리빛은 내 가슴에 달려들어 박히고...
그것은 살갗까지 파닥이는 전율을 일으켰다.
종소리의 여운을 가슴에 담고 뒤뜰로 돌아서니 섬진강 강물 같은 담록색 숲이 일렁인다.
대웅전 뒷산 한 자락을 온통 뒤덮은 동백나무 숲은, 얄포롬한 나일론 천 같은 겨울햇살을 머리에만 가득 이었을 뿐, 빛 한 줄기 땅에 스미지 못할 정도로 빽빽하다. 어둡고 습했다.
처음에는 동백나무 숲 속에 쥐가 사는가 했다.
"찍 찍 찌르르~ " 요란한 금속성의 새 소리...
한, 두 마리가 아닌 무리지어 내는 소리였다.
자세히 보니 짙은 녹 빛으로 반짝이는 동백 잎, 잎들이 바람에 팔랑이는 사이사이를 동백 잎 만한 새들이 누비고 있었다. 바다 속의 날치 떼처럼 동백나무 숲 속에 잠겼다가 튀어 오르기도 한다. 서로가 서로를 부르는 듯 뒤엉킨 소리는 마치 여러 가지 현악기를 모아놓고 조율을 하는 듯하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떨어지는 동백꽃잎을 눈물 뚝뚝 떨군 것 같다고 표현했던 선운사 동백꽃은 언뜻 보기엔 보이지 않았다. 섭섭한 마음을 누르고 돌아서려는데, 두꺼운 잎들 사이로 동그란 염주 알 크기의 꽃봉오리들이 수없이 맺혀있는 것이 보였다. 몇몇 개는 참말이지 빨간 꽃잎을 립스틱 짙게 바른 입술인양 봉긋이 열고, 금빛 찬란한 꽃술을 숨길 듯 말 듯 조심스레 드러내고 있었다. 유리조각으로 살갗을 저미는 듯한 겨울바람 속에서도 흔연히 꽃을 피우는 새빨간 동백의 정열에 찬탄의 미소를 보냈다. 꽃 속에 '스카렛 오하라'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같고 '황진이'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같다. 한 때 나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던가? 내 자신도 주체못할 저런 열정의 때가... 점점 기울어 가는 내 안의 정열을 꺼내어 안쓰런 마음으로 더듬어 본다. 그러나 지금은 끝없이 끓어 오르는 정열보다는 부드러운 관조의 혜안을 지니고 싶다.
아직 채 피우지 못한 동백의 꽃봉오리들.... 저 꽃이 만개 하는 날이면 선운산 대웅전 뒷산은 선홍색 치마를 두른 듯 할게다. 그 황홀한 모습을 보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자꾸만 동백꽃잎으로 스며드는 시선을 거두고 들어온 문으로 나서니, 대리석으로 단아하게 조각한 듯한 다리가 내 발에 매끄럽다.
'극락교'
아, 이 다리를 건너면 극락으로 가는 길인가 보다. 감촉이 견고하다. 깔끔하고 정교한 다리의 한복판에서 좌, 우를 바라보자 밑으로 물이 흐른다.
산꼭대기에서 흘러옴직한 청담색의 물줄기.
겨울 속을 여유롭게 흘러내린 물은 시냇물처럼 청아하게 맑지도, 돌돌거리는 낭랑한 소리도 내지 않았다. 다만 소리 없는 움직임으로 옥빛의 몸을 끌고 갈 뿐이다. 아마 극락은 저렇듯 조용한 움직임으로 가는 곳인가 보다.
다리를 벗어나니 쪽진 머리의 가르마 같은 오솔길이 이어진다. 양옆으로 겨울나무의 애잔한 숨소리가 떨리는 듯 들려오고, 가랑잎 뒤척이는 소리가 발끝에 채인다.
야트막한 산, 버석이는 잡목 사이 군데군데 작은 물줄기들이 흐른다. 물줄기들은 펼쳐진 은색 테이프처럼 푸른 이끼가 듬성듬성 낀 바위에서 직강하로 떨어져 작은 소를 이루었다. 순은처럼 맑고 투명한 물소리... 가슴이 서늘하다. 이승의 극락이 따로 있을까? 여기가 극락이다 싶으면 극락인 것을...
잎을 버린 가난한 나무들이 저희끼리 수런거리는 얘기를 엿들으며 오솔길을 나서니 또 하나의 다리로 이어진다.
'도솔교' 그렇다면 도솔교 밑을 흐르는 물은 도솔천일까?
도솔교를 건너니 곧 아스팔트길이다. 그러고 보면 도솔교는 현세로 이르는 다리인 모양이다. 길 옆 가로수로 서 있는 동백을 바라보자, 단단한 꽃봉오리가 입을 꼭 다물고 살래살래 고개를 흔든다. 마치 아무 것도 보여 줄 수 없다는 듯이... 그러나 동백꽃의 황금색 속가슴까지 훔쳐 본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버스정류장 앞에 섰다.
마치 꿈속에서 극락을 다녀 온 기분이다.
조용히 옷깃을 여미며 다시 속세로 돌아가려는 나를, 저만치에서 1월의 바람이 샐쭉한 눈으로 보고있다.


. - 현대문학 수필 동인지 '아침장미'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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