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이 두려운 사랑

2004.02.27 15:49

장태숙 조회 수:793 추천:55

동물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순박하도록 투명하고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왠지 슬퍼 보인다. 사람의 손에 길들여진 애완동물일 수록 불안한 그 눈빛이 측은하리 만치 외로워 보이는 것은 사람의 눈치를 보아가며 애교를 부리고 재롱을 떨어야만 하는 구차한 생존에 고독함을 느끼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동물 애호가 중에서는 애완동물을 가족 이상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고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시대에 살면서 은혜를 배반으로 갚는 사람들보다는 사랑의 정성만큼 우직하게 믿고 따르는 애완동물에게 더 애착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애완동물일 경우 그렇지 못한 동물에 비해 안정되고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길들인다는 것은 거기에 따른 사랑과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우리 집 식구들도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나 좋아할 줄만 알았지 책임이 뒤따르지 않으니 그것이 탈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집에서 개를 몇 번 키운 적이 있다. 아이들의 성화로 키웠지만 한국에서는 집이 아파트인 관계로 생각지 못한 어려움이 많았다. 크기가 작은 강아지일 때는 그저 귀엽기만 하고 거실이나 방마다 대책 없이 실례하고 마는 대소변 치우기가 별로 어렵지 않았으나 몸 부피가 커지면서 그 양과 냄새는 지독했다. 순번을 정해 치우기로 했던 아이들도 서로 미루기 일쑤고, 집안 구석구석 냄새가 배어 내 신경도 날카로워져서 그 일로 인해 목소리가 높아졌다. 물론 대소변 버릇도 나름대로 열심히 가르쳤으나 쉽지가 않았다. 초롱이(개이름)는 초롱이 대로 비실비실 눈치를 보는 듯했고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측은하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했다.
결국 못할 짓이라고, 아파트에서는 키울 수 없는 일이라고 두손들고 마당이 있는 대구 할아버지 댁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마당이 있으니 초롱이에게도 좋고 가끔 내려가서 볼 수 있으니 우리에게도 좋은 생각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했으나, 그 이듬해 시댁에 가니 초롱이는 보이지 않고 한달음에 먼저 뛰어간 딸아이가 두 눈에 가득 눈물을 담고 있었다.
"할머니께서 팔아 버리셨대요. 아마 보신탕 집으로 갔을 거예요. 엉엉... "
아이는 울음에 파묻혀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겨우 말하고는 커다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나는 난감한 채 아이를 끌어안고 그저 망연히 서 있었다.
내가 어릴 적에도 대부분 시골집들이 그렇듯 우리 집에서도 개를 키웠다. 흔한 잡종 개였지만 같은 집에 한식구처럼 살면서 친해지고 가까워지는 건 족보 있는 개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렇게 건강하던 개도 중개쯤 되면 알 수 없는 이유로 온 마당을 요란스럽게 헤매다 거품을 입에 문 채 죽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놀람과 당혹스러움 속에서도 매우 끔찍한 일이었다. 무섭고 두렵기도 했지만 개가 없는 빈자리는 아무리 물로 씻어내도 남는 얼룩처럼 한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던가?
그 허전함과 적막함은 어린 나를 퍽이나 가슴 아프게도, 쓸쓸하게도 했다.
끔찍하게 사랑한 것도 아니고 그저 무덤덤하게 바라봤을 뿐인데도......
부모님들도 텅 빈자리를 느끼셨는지 다른 개를 사오셨지만 매번 비슷한 모습으로 죽었다.
쥐가 극성이던 그때, 쥐약을 잘못 먹었는지, 질병 때문인지 알 길이 없으나 한낱 짐승일 망정 한 집에 살던 개가 죽는 모습은 충격일 뿐만 아니라 가슴에 상처로 남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내겐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을 키운다는 것이 별로 달갑지가 않다.
그런데도 딸아이는 동물들을 유난히 좋아한다. 동물인형만을 모으는가 하면 동물그림이나 사진 등을 스크랩하기도 하고 벽에 붙여 두기도 한다. 봄철이면 병아리 같은 것을 들고 와 나를 곤혹스럽게도 하고 제 아빠를 졸라 청 거북이나 금붕어 따위를 사 가지고 오지만 경험이나 전문지식이 없는 우리에겐 무모한일일 뿐이다. 병아리는 일주일을 가지 못했고 수면 위로 둥둥 떠오른 금붕어나 움직이지 않는 청 거북을 들어내는 소름끼치도록 싫은 일은 언제나 내 몫이 되고 만다. 그것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은 딸아이의 상심과 울어 빨갛게 부은 눈동자를 보는 일이다. 왜 이 아이는 매번 상처받는 일을 저지르는지 모르겠다. 예쁘고 귀여운 것만 알았지 죽음이나 이별이 가져다주는 고통이 머지않아 닥치리라는 생각은 왜 못하는지......
며칠 전에도 작은 소란이 있었다.
미국으로 건너와서 이제는 아파트가 아닌 마당 있는 하우스(단독주택)이니 개를 키우자는 식구들의 의견에 낯 설은 이국 땅에서 외로움을 시리게 느끼던 차에 나 역시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 그날, 남편은 내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고양이를 퇴근길에 덥석 안고 온 것이다.
아직도 아련하게 상흔이 남아있는 강아지도 아닌 웬 소름 끼치는 고양이?
나는 고양이의 이름만 들어도 에드가 알렌 포우의 <검은 고양이> 생각이 난다. 가끔 마당에 나와 있으면 동네 고양이들이 담 사이를 날렵하게 빠져 나오기도 하고 베란다에 걸어 둔 새장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잉꼬를 노려보기도 한다. 눈빛만 노랗게 번뜩이는 검은 고양이도 있고 제 집인 양 느긋하게 활보하며 도발적인 뾰족한 눈빛으로 쏘아보는 누런 고양이도 있으며 한밤중 진저리 쳐지도록 아기 울음소리 내는 얼룩 고양이도 있다.
동네 고양이들만으로도 끔찍한데 딸아이가 안고 나오는 새끼고양이를 보는 순간 난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나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돌려보내기로 한 다음날, 고양이를 챙기는 남편 곁에서 물끄러미 바라 본 새끼 고양이는 나의 선입견을 싸악 지워 버릴 정도로 귀엽고 예뻤다. 어른 손바닥만한 크기에 까만 포도 알처럼 둥그런 눈매가 날카롭다기보다는 순진하도록 맑고 깨끗했으며 하얀 눈처럼 보드라운 털은 눈부신 순백의 색깔이었다.
겁 없이 아장아장 걸어오는 걸음걸이라니......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그냥 키운다고 그럴까? 딸아이가 충분히 매료될 만했다. 더욱 나를 뒤흔든 것은 아이의 방안에 있는 고양이 바구니 위로 아이가 걸어 놓았음직한 인형들이 흔들흔들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자라지 않고 그냥 새끼로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것 또한 얼마나 큰 나의 이기인가! 어떤 야성적인 동물이라 할지라도 새끼 때는 귀엽고 예쁘다. 그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모습은.
그러나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단호해야 한다. 여기서 마음이 약해지면 또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칼바람이 일듯 냉정히 돌아섰다. 아이들보다 집안에 있는 시간이 많기에 하루종일 싫어하는 고양이와 같이 지내면서 사랑과 책임을 다 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며칠동안 심란했다. 과연 내가 잘한 건지......
눈앞에 깜찍하도록 귀여운 흰색 페르시아 새끼고양이가 아른거렸지만 몇 년 전 아파트에서 기르던 개가 너무 커져 할 수없이 후배에게 넘겨 주었을 때, 그렁그렁하던 딸아이의 눈과 원망스러워 하던 개의 눈빛을 생각하며 단호하게 끊을 수밖에 없었노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딸아이는 한동안 그 개를 못 잊어 했다.
식구들이 원하던 고양이를 거부한 미안스런 마음만큼 마당에
서 뛰놀 수 있는 튼튼하고 예쁜 강아지를 구해 사랑과 정성으로 키워야지 하고 마음먹어 본다.
한평생을 살면서 이별이 두려워 사랑하지 않고 살수는 없지 않는가!


- 현대문예 수필동인지 '아침장미' 6집(1996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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