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웨이 17에서 생겼던 일

2004.03.04 06:19

전지은 조회 수:832 추천:100

콜로라도로 이사를 온지 꼭 두 달. 이젠 제법 익숙해 질법한 날씨이지만 천지를 온통 설원으로 만드는 눈길 앞엔 속수무책이다. 어깨가 아프도록 운전대를 꽉 잡아도 흔들리고 미끄러지는 승용차. 더하여 시계마저 좋지 않을 땐 말 그대로 업친데 덮친 격이다. 캘리포니아에선 언제 이런 눈길을 운전해 보았겠는가. 겨울을 준비하며 바퀴 4개를 모두 스노우 타이어로 갈아 낀 것은, 딴엔 단단히 월동 준비를 한 것이었다.
그해 겨울, 그 아찔했던 기억 때문일까, 주위의 모든 차량들이 내 차를 비켜가도 난 꿈적도 않고 운전속도를 지킨다. 그땐 겨울비였지만 지금 이곳은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눈이고 보니 더욱 조심 할 수밖에.
하이웨이 17은 실리콘밸리 끝자락에 붙어 제법 꼬불거리는 산길로 내 고향의 옛 풍경을 불러다 주곤 했다. 그 맛에 난 곧잘 산길을 넘는 운전을 즐겼다. 겨울 장마가 막 시작되려는 그날은 오랜 문우와 약속이 있던 날이었다. 비는 부슬거리고 비옷을 입은 산록들은 초록을 더욱 짙게 드리며 운전을 즐겁게 해 주었다. 막 바꾸어 넣은 C.D.의 음악도 풍경과 어울렸고 한가한 오전의 서행을 짜증내거나 방해할 누구도 없었다.
한참 운전을 즐길 때 갑자기 차가 휙 돌더니 시멘트로 만든 가이드 레일에 꽝! 부딪혔다. "어, 어" 무심결에 브레이크를 꽉 밟았던가 차는 기우뚱했고 '360도' 회전을 하여 주행의 반대 방향으로 턱 멈추어 섰다. 운전대를 잡은 손은 와들와들 떨리고 이젠 죽었구나 싶었다. 내 차를 향해 달려오던 빨간색의 작은 승용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아슬아슬하게 섰다. 그 뒤를 따라오던 차량들도 모두 멈추었다. 빨간 차에선 한 젊은이가 비를 맞으며 내렸다. 그 뒤의 차량에서도 또 다른 사람들이 손에 전화기를 들고 내리며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다. 젊은이는 창으로 다가서며 다친 데는 없는지. 괜찮은지 물었다. 그리고 차의 기아를 주차로 바꾸라고 소리쳤다. 그때까지 난 있는 힘을 다해 브레이크를 밟고 있었고 그의 말소리는 들리는데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겨우 기아를 바꾸자 젊은이는 날 내리게 하고 나의 차를 직접 돌려 주행선상에 놓아주며 차에 문제가 없는 것 같으니 목적지까지 가라고 했다.
돌아갈 수 없게 생긴 하이웨이였기에 난 덜덜 떨며 겨우 서행을 하여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고지점에서 20분은 족히 더 가야 했던 약속장소. 최종행선지에 차를 주차하고 내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자 그때까지 내 뒤를 따라왔던 그 빨간 차는 빗속으로 속력을 내어 사라졌다.
문우를 만나 떨리는 가슴을 진정 시키기 위해 뜨거운 국물을 하나 청해 마시고 나자 그가 궁금해졌다. 일 면식 하나 없는 낯선 운전사의 안전을 위해 행선지가 아닌 곳까지 따라 와 주었던 빨간 차의 주인. 안전을 확인한 뒤에야 자신이 누군가도 밝히지 않은 채 총총히 사라져간 젊은이.
아직 캘리포니아 차량 등록판을 달고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내 운전에 빵빵거리거나 위험하듯 휙 질러가지 않는 이곳의 운전자들과 그때 하이웨이 17에서 만났던 젊은이 같은 소시민들의 정의감과 책임의식이 오늘의 미국을 있게 한 기본 정신은 아니었을까, 설국의 낯선 길에서 얼뜨기 아줌마는 오늘도 거북이 운전을 하며 생각해 본다.

(한국일보 목요 칼럼,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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