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기일전(心機一轉)

2004.03.04 06:22

전지은 조회 수:870 추천:91

직장을 다시 잡기로 한 것은 순전히 남편에 대한 눈치가 보여서였다. 영원한 백수나 장노(인터넷 정의에 따르면, 장기간 노는 사람)가 되고 싶었던 것은 욕심이었고 학교에 다니는 어린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돌보아드려야 할 어른이 계셔서 집에 있어야 한다는 이유를 댈 수도 없는 형편이고 보면, 전업주부나 전업 작가가 되고 싶다는 것은 한가로운 꿈일 뿐.
밤낮 열심히 일하는 그에 비해 이사를 핑계로 몇 달 동안 방콕(방에 콕 처박혀 있는)휴가를 즐기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결혼 후 늘 직장 생활을 했고 더구나 한번도 전업 주부를 해 보지 못했던 것에서 기인된 내 위치는 좌불안석, 그 자체.
더구나 눈이 녹으며 계절이 바뀌는 듯 하자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동물들처럼 봄의 이른 향기를 찾아 길을 나섰고, 다행히 간호사란 직업은 새 직장을 찾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다시 시작하는 곳에서의 오리엔테이숀. 읽어야 하는 것들은 커다란 바인더 하나 가득 이었고 이주일 강의도 모자라 몇 일씩이나 비디오를 보고 듣게 하고는 시험도 쳤다. 비슷한 기능을 가졌지만 다른 이름을 가진 새로운 기구들과 새로운 컴퓨터 프로그램들을 만나며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늘 하던 일이라 눈감고도 할 수 있다고 장담했던 병원 중환자실의 일들이 새로운 것들이 되어 다가왔다.
25년 간호사 생활 중 12년 동안 중환자실 근무. 매너리즘에 빠져 병원 일, 인간의 생사 갈림길을 앞에 두고 얼마나 교만했던가를 깨닫는다. 다 알고 있다고 믿었던 내 지식과 중환자실의 어떤 상황에도 대처 할 수 있다고 장담했던 것은 어쩌면 커다란 자만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해준 이곳의 새 직장. 일주일에 한 두 번 나가기로 한 파트 타임이지만 새로운 곳에서 새 시스템에 적응시키기 위한 훈련을 받으며 머리로 하는 일 말고 가슴으로 하는 일의 소명감을 다시 배운다. 순발력이 좋고 경험이 많다는 이유로 그 동안 병원에서 쓰이는 중요한 수치나 약명, 대처하는 방법, 검사 소견 등의 참고자료 및 관련자료의 기록하나 만들어 갖고 않았던 것은 스스로의 자만에서 기인된 것임에 틀림없다. 기억력만 믿기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또한 아닐까, 반성해 본다.
빈 노트 한 권을 꺼내 지난 경험과 옛 것들을 기억해 내어 적었다. 그리고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오랜만에 의학과 간호학 서적들도 들쳐보고 인터넷을 통해 업데이트된 최신의 치료 방법들이나 추세 같은 것들도 참고로 기록했다.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내 견해도 펼쳐 보일 것이고 새로운 지식도 만들어보리라.
국민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이가 고이고이 간직했던 어머니의 첩지. 그 안에 적혀있던 너무나 소상한 자료들을 전수 받고 응용하여 최고 상궁이 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이치인지도 모른다.
심기일전하여 지나간 것들을 연구하고 경험했던 것들 바탕으로 새 지식과 새 견해들을 찾아보는 일에 다시 나선다. 전업 주부도 좋고 전업 작가도 좋지만 전문직업인으로 당당히 자리에 설 수 있을 때 가슴으로 깊은 심호흡을 할 수 있으리라.
이제 그만 눈치보는 백수에서 벗어나 산들거리는 봄바람을 맞으며 이른 봄 이슬을 먹는 당당한 백노(백일동안 기간을 정하고 노는 신선한 새)가 되어 볼까나?

(한국일보 목요칼럼, 3월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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