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2004.06.01 00:51

전지은 조회 수:882 추천:80

요즈음 친구의 아들, 딸들이 고등학교, 대학 졸업이라고 곧잘 알려온다. 졸업 축하 파티에 참석할 수 있는 지 여부를 묻는 RSVP 엽서를 따로 넣은 것과 금박 필기체로 초대장을 인쇄 한 것이 결혼 청첩장 같은 고운 정성이 들어있다.
그 옛날 갈래머리를 풀어 어른 흉내를 내며 나팔 바지에 털목도리를 두르고 밤새 겨울 거리를 쏘다니거나 종일 다방에 앉아 팝송이나 신청하며 세상의 모든 아픔을 혼자 짊어진 양 했던 우리들 세대의 졸업시즌.
추억을 찾아 떠난 것은 아이들의 그것처럼 고운 정성이 담겨있는 옛친구들의 소식을 접한 후였다. '고등학교 졸업 30주년'. 함께 만나보자는 초대의 글. 혹자는 그것이 무슨 그리 큰일이냐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참, 많이 보고 싶었으며, 강산이 세 번 변한 시절엔 친구들이 어떻게 변해 있을까 궁금했다. 곰삭아진 그리움을 꺼내며 비행기 속에선 친구들의 이름과 특징들의 기억해 내곤 혼자 씩, 웃어보았고 많이 변했겠지 상상도 해 보았다.
시간을 기다리며 세월의 길이는 작은 것들에도 감동 받게 했고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물이 핑돌게도 했다. 새 신발, 새 옷을 사고, 머리 염색을 하며 소풍날 아침처럼 달떠 있었다.
만남의 장소엔 대부분 날아갈 듯 고운 한복을 입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염려했던 것처럼 슈퍼마켓이나 길을 가다가 마주쳤으면 전혀 알아보지 못했을 얼굴들. 입구에서 "3학년 5반, 최지은" 커다란 명찰을 찾아 옷섶에 붙이자,"아하, 너!" 그렇게 소리지르며 손을 잡는 알 듯 모를 듯한 얼굴들도 있었다. 껑충껑충 뛰며 서로의 이름과 얼굴을 확인하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말하지 않아도 얼마나 보고 싶었던 얼굴들인가.
그리운 것은 어디 친구들 뿐 만이겠는가. 이미 정년 퇴직을 훨씬 넘기시고 할아버지가 되신 고3 담임 선생님. 시인의 모습을 잃지 않으시고 우리들을 활짝 핀 꽃들이라 불러 주셨다.
중풍을 만나 왼쪽을 전혀 쓰시지 못하시는 고2 담임 선생님. 그러나 기억은 더욱 총총해 지시는지 심한 사춘기를 앓았던 갈래머리 시절의 나를 너무도 또렷하게 기억해 주셨다.
이미 하늘 나라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지켜보시며 미소를 짓고 계실 수학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
머리의 백발은 성성해 지고 눈가의 주름은 어쩔 수 없어도 세월 속의 기억들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선명해 지는 것에 놀라웠다. 옛 시절로 돌아가 까르르 까르르 웃는 중에 너무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중학교 3년 내내 제일 단짝이었던 친구. 고등학교 3년 동안 그녀는 취업 반에, 난 진학 반에 있었으므로 매일 만나지는 못했어도 주말이면 경포 호숫가를 함께 걷기도 했고 수학여행 중엔 둘만 몰래 빠져나가 시냇가에서 별빛과 함께 밤새 이야기를 두런거렸던 친구. 그때의 인생은 때론 앵두 빛이었고 때론 폭풍우가 몰아치는 사춘기였는데. 세상의 온갖 근심을 우리 둘이 다 짊어진 양 긴 한숨을 내 쉬기도 하고 사회의 정의를 위해서만 살아야 하는 것처럼 큰소리로 열을 올리기도 했던. 한창의 치기로 의기투합이 참 잘되었었던 친구.
'널 다시 찾은 것만으로도 이번 동창회엔 정말 잘 온 거야. 온 보람이 있어, 꼭 다시 연락하며 지내자'는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물기가 젖어 들었다. 전업 주부인 그녀는 나의 미국 생활에 관심이 많은 듯 했다. 말 섧고 물 다른 곳에서 고생했을 거라는 따듯하고 걱정스러운 한마디에 난, 그녀의 손을 꼭 잡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나의 무심함으로 20년 미국 생활동안 한번 연락을 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미안했다. 아들이 L.A.에서 대학을 다니고 지금은 남편과 둘이 제2의 신혼을 즐기고 있다는 이어지는 내 말에, 그녀는 남편과 함께 우리 둘의 신혼집에 한번 다녀가겠단다. '그래, 언제라도 환영이야'라고 답하며 목은 왜 그리 메이던지.
수학여행의 그 밤처럼 밤새 이야기하고 웃고, 떠들고, 서로를 확인했던 24 시간. 한숨 눈 부치지 않았어도 전혀 지치지 않았다. 깨어나기 싫은 아름다운 꿈처럼 그렇게 서 있었던 만남의 장. 헤어지는 시간은 너무도 아쉬웠고 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꼭 잡았던 손에 축축이 물기가 돌아도 놓지 못하는 것은 살아가야 할 날들이 살아 온 날들보다 짧을 것이 분명하므로 어느 한순간도 놓치기 싫은 마음 때문이다.
한동안 잘 지낼 수 있는 삶의 활력소를 얻어 돌아왔다. 콜로라도의 풍경을 몇 자 적어 그녀에게 보내며 우체통 옆에서 푸른 숲을 바라본다. 벌써 그녀 부부의 방문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때문일까, 숲에서 부는 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한국일보 목요칼럼, 5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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