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 아일 모르시나요?

2002.11.19 00:44

전지은 조회 수:914 추천:44

"지금 잘 때가 아니야. 내려와 봐. 빨리 내려와"
그렇게 큰 남편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은 요 근래에 처음이다. 무슨 일이냐며 앞가슴이 반쯤 열린 파자마에 맨발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CNN에서는 비행기에 들이 받치는 쌍둥이 빌딩이 여과 없이 보여진다. 사고네, 커다란 사고. 그러나 곧 그것은 대형 사고가 아니라 전쟁이며 공격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미국 공격을 받다!> 라는 제목 아래,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여과 없이 중계된다.
전쟁이구나. 미국에선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꺼라고 믿었던 전쟁. 바로 눈앞에서 우박처럼 떨어져 내리는 건물의 파편들과 종이 인형처럼 가볍게 떨어지는 사람의 형체들. 공포감에 어쩔 줄 모르는 사이, 남편은 출근을 한단다. 오늘 같은 날 장사되겠어. 혹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니, 이런 땐 함께 있으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하는 것 아니야. 하루 쉬지. 여기조차 안전하지 않다면 지구 상 어디에도 우리들이 숨을 곳은 없어. 아이한테 전화나 걸어봐. 학교는 잘 다니고 있는지. 이런 때일수록 학교를 잘 다녀야지 아니면 징집이야. 커피 한잔을 들고는 휭하니 나가 버린다.
‘징집’이란 단어에 괜히 마음은 허둥거린다. 전화를 걸어 보지만 핸드폰은 꺼져있다. 그렇지 아직 일어날 시간이 아닌데. 다른 채널로 돌려보아도 판에 박은 듯 같은 화면이다. 불기둥이 솟는 쌍둥이 빌딩. 그리고 무너져 내리는. 흑백 기록물로 보았던 히로시마의 폭격 후 핵우산이 뿌옇게 내린 것같이 세계의 경제를 좌지우지했던 월드 스트릿이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조각품처럼 꼼짝을 않는 자세와 붙박이 시선은 화면에서 떠날 줄 모른다. 갈증 때문에 한 모금 마셨던 커핀 어느새 식었다. 할 일이 많았던 것 같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텅 비어 버린 머릿속은 아이가 잘 있을까, 란 한 마디만 고장난 테이프처럼 돌고 또 돈다. 메시지를 남겨 놓았으니 연락이 오겠지, 싶다가도 쓸데없는 걱정은 또 맴을 돈다.
붙박이 자세를 깬 건 기다리던 아이의 전화가 아니었다. 남편은 아직도 텔레비전 앞이 냐며 밖에 나가서 한 바퀴 돌고 오란다. 그런 다음엔 친척들에게 전화도 좀 해보고. 그렇지. 이모와 외삼촌과 사촌들, 그 중에 영구와 지니는 맨해튼 어디에서 근무를 한다고 했는데.
전화 번호들이 적혀 있는 수첩은 낡고 낡았다. 같은 이름 밑에 지우고 쓴 숫자들이 꽤 여러 군데이다. 비닐로 덮인 겉장은 코너마다 짙어지고 스카치 테이프로 붙이고 덧붙인 것들에 때가 끼어 흉하다. 그러나 아직 버릴 수 없는 것은 20년 전 미국에 도착하며 만들었던 새로운 이민 역사의 한 장 같아서다. 그 동안 한번도 바뀌지 않은 번호도 꽤 있다. 실증이 나면 즉시 내다 버린다는 X세대들이 보았으면 무슨 골동품이냐고 말하겠지. 아인 다행히 엄마의 못 버리는 성질을 그대로 닮아 무엇이든 의미를 부여해 쌓아두곤 한다. 차고에, 벽장 속에 쌓이고 쌓인 잡동사니들. 책장에 가득한 책들. 그 중엔 남편과 나의 대학 시절 노트까지 포함됐다.
가나다순으로 되어 있는 이름표를 따라 이모부 댁부터 전화를 돌린다. 자동응답기로 처리된 테이프가 계속 돌아간다. ‘모든 노선이 사용 중에 있으니 나중에 전화하십시오’ 사촌인 한, 씨까지 번호를 돌렸지만 어디에도 통화는 되지 않는다. 전화기를 옆에 놓고 다시 텔레비전 앞에 가 앉는다. 보는 사람조차 숨막히게 뿌우연 연기를 뒤집어쓰고 필사적으로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 소방관과 경찰들, 우왕좌왕하는 일반인들의 모습. 빽 뮤직도 장엄하다 못해 공포스러운 음이다. 15분 간격인가 꽤 자주 있던 광고도 전혀 나오질 않는다. 다시 아이에게 시도하려고 전화기를 집는데 따르릉, 전화가 걸려 온다.
“헬로우.”
“에미냐? 여긴 한국이다. 별일 없냐? 온 사방에 전화해도 아무도 안 되던데 너만 간신히 통화가 되는구나. 어떻게 된 일이냐? 밤새 한숨 못 잤다. 한밤중에 한국 테레비에서 미국에 전쟁이 났다며 쌍둥이 빌딩 무너지는 것이 나왔다. 전쟁이냐? 너희들은 어떻게 되는 거냐? 남수는 연락됐냐? 별일 없데? 아범 바꿔봐라.” 일방적인 한 보따리의 물음만 쏟아 놓으신 채 그이를 찾는다.
“출근했는데.....”
“오늘 같은 날도 장사 하냐. 전쟁이라는데.”
“엄마. 거기와 여기가 어디라고. 끝에서 끝이에요. 여긴 별일 없어요. 남수는 아직 연락 안되구요. 별일 없겠지요. 갠 L.A.근처잖아요. 나도 동부에 모두 전화했는데 전혀 불통이네요. 연락이 되는대로 알려드릴 께요.”
“어떡하냐, 지금 돌아 올 수도 없고....”
얼마 더 이야기 하다가 전화는 끊겼다. 전화가 오면 엄만 늘 박서방을 먼저 찾는다. 엄마가 보시기엔 마흔을 넘은 딸도 아직 어린애 인가보다. 딸은 늘 어리다고 생각하시는 어머니. 사위 말이라면 무조건 옳다고 믿으시는, 남자의 말은 무조건 우선 이어야 한다는 어머니. 다시 아이에게 전화를 돌린다. 다행이 아이는 학교에서 전화를 받는다. 아침 내내 연락이 안되더라고 목소리부터 올린다. 수업 중엔 전화를 꺼 놓지. 당연한 이야기 아니냐는 말에 머쓱해진다. 별일이 없는 것을 알고야 안도의 한숨을 쉰다. 아이의 반응은 의외였다. 올 것이 왔다는. 자신은 국가의 이름으로 징집이 온다해도 절대로 갈 수가 없단다. 징집명령이 떨러졌는데 안가면 범법이래. 상관없다며 아이는 명료하게 답했다. ‘싸워야 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라며.
아이와 통화가 끝나자 마음은 조금 덜 불안하다. 마흔이 훨씬 넘은 딸이나, 스물이 넘은 아들이나 어머니, 라는 위치에서는 같은 모습으로 바라보아지겠지. 물가에 내 놓은 아기가 아니라 해도.
시간이 되면 배가 고픈 것은 신통한 일이다. 쪼르륵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더 그 자세로 있었을까. 한국방송이 나올 시간이다. 라면 끓일 물을 얹으면서 채널을 바꾼다. 틀린 것 하나 없이 똑같은 화면이다. 한국말을 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라면과 김치를 꺼내고 멕시칸 고추를 썬다. 육계장면의 매운 맛도 모자라 눈물이 나도록 매운 할로피뇨 고추를 넣어야 하는 것은 성격과 관계된다. 누구에게도 똑 부러져야 하고 참지 못하는 성질. 앞과 뒤가 딱 맞지 않거나 식탁보 한 귀퉁이가 흐트러져도 참지 못하는 버릇. 처음엔 남편도 그런 성질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한 20년 같이 살고 나니 이젠 그도 잔소리 없이 침대보 귀를 맞힐 줄 안다.
홀에미에게서 자란 딸은 완벽해야했다. 별일 아니라고 우습게 보아 넘기는 일은 어느 시간에도 허용되지 않았다. 빳빳하게 다려 입은 흰 칼라의 교복 윗도리는 아침저녁으로 빨고 다리고, 밤마다 뜨거운 장판 위에는 교복 주름 치마가 요보다 먼저 갈아졌다. 적당히 물을 뿌리고 신문지를 덮고 그 위에 요를 깔고 잘 수 있었던 겨울. 흰 운동화엔 젖은 채오 백묵을 문질러 말렸다. 조금 얼룩이라도 지면 난리라도 나는 듯 별스러웠던 것은 엄마의 탓도 있지만 할머니의 영향이 더 컸다. 세 여자가 사는 집은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한다며. 지금도 어디든 문질러 닦는데 이력이 난 것은 그때부터의 습관이다. 가끔 친구들은 지금도, 지겹게 쓸고 닦는 그 고상한 취미 생활을 하느냐고 묻는다. 무릎이 시리고 아프고 어깨가 결리기 시작한 것은 한 일년쯤 되었을까. 이층 아래층을 올라 다니며 닦아대는, 취미 생활이 관절의 부분들을 마모시켰는지도 모른다. 아스피린을 서 너 알씩 먹어가면서도 한동안 취미 생활은 계속되었다.
라면을 설 끓여 물을 버리고 찬물에 헹구어 다시 끓인다. 할로피뇨고추를 썰어 넣으며 입엔 침이 가득 고인다. 아직 시선은 텔레비전 앞이다. 남편이 출근하기 전부터 그때까지 채널만 서너 번 바꾸었다. 인터네쇼날 채널에서 한국방송이 나오는 시간이면 늘 텔레비전을 튼다. 한 여기자의 취재가 들린다. 애써 신경 써 듣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들리는 방송. 그런 맛에 길들여져 그 시간엔 꼭 한국방송을 청취한다. ‘아직 확인된 한국인은 없습니다’ 그 여기잔 그렇게 현장 리포트를 마친다.
아이를 데리고 처음 갔던 뉴욕은 생동감에 넘쳤다. 대관령을 넘어 고속 터미널에 내리면 서울은 살아 있는 도시이고, 산 넘어 고향은 죽어 가는 도시라고 느꼈던 유년. 사람들의 빠른 걸음이 좋았고 바쁘듯 뛰어 다니는 석이 생동감 넘쳤다. 아름다운 산과 바다, 그것이 뭐 그리 대수인가. 사람이라면 좀 바쁘게 열심히 뛰어 봐야 할 것 같았다. 지하철을 타고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 내려야 되는 곳을 잘못 알아 콜롬비아 대학 근처에서 내렸다. 사방을 둘러봐도 검은 피부의 사람들. 울긋불긋한 옷에 퀘퀘한 지하철 냄새. 어디에서 어떻게 32가 까지 돌아가야 하는지 막막했다. 위기감에 아이의 손을 꽉 잡고 환한 곳을 향해 무조건 걸었다. 아인 그때 어렸어도 투덜거리지 않고 엄마의 빠른 걸음에 따라 뛰었다.
돌고 돌아 나온 거리, 쓰레기가 덮인 거리. 창이 깨진 건물. 빌딩들 사이에서 미아가 되었다. 두려움에 가방 속에 있을 지도도 꺼내지 못했다. 얼마를 걸었을까, 아이의 손을 잡은 손에 축축이 물기가 베어 왔다. 큰길로 나오자 택시 스탠드가 보였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탔다. 행선지를 말하자 흘끗 처다 보던 터번을 쓴 인도 운전사. 여행객이냐고 물었던가. 뭐라 답했는지 지금은 기억할 수 없지만 32가의 이모네 가계가지 무사히 도착했다.
허드슨 강이 바라다 보이는 맨해튼의 여름은 도시의 중심에서 그런 대로 낭만적이었다. 가난한 유학생 아내가 유치원생인 아이를 데리고, 입을 덜기 위해 갔던 뉴욕 행이 아니었더라면 센트랄 팍의 자연과 불야성을 이루는 맨해튼의 밤을 정열적으로 아름답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퇴근 후 남편, 그도 역시 집에 들어서자 말자 텔레비전 앞으로 간다. 거리엔 개미새끼 한 마리 안보이더라고. 가계는 문만 열었다 뿐이지 손님은 평시 십분의 일도 안되었다고 했다. 정말 전쟁일까, 물었다. 그렇다는 군, 그의 손님들이 들려주었을 토막 적인 이야기들이 전쟁의 공포를 더한다. 어떻게 해야지. 이젠. 그냥 평시처럼 하면 된데. 내일 은행에 가서 현금이라도 좀 찾아 놓을까. 비상 식량도 좀 구해 놓구말야. 차고에 있는 포터블 버너는 잘되는지, 갈아 끼울 가스통은 충분한지. 병에든 물도 좀 사다 놓아야겠지. 한 수 거든다.
아이는 18세가 되면서 국가에 유권자 등록을 했다. 말은 선거를 위해서 라지만 일단 유사시에 징집을 할 때 기초자료로도 쓴다고 했다. 아이는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 엄마, 아빠의 시민권 선서에 따라 자동으로 미국시민이 되 버렸다. 여기서 태어난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아인 한국인일까. 문화도 언어도 영어가 훨씬 편한 아이. 그런 아이가 대학 일년생이 되자 한국으로 모국어 연수를 갔다. 아이에게 모국어는 한국어일까, 그땐 그것이 의문이었다. 아이는 한국 체류 기간을 연장시키고 인사동 <귀천>의 생강차 맛을 알려왔다. 아이에게 최선이라고 믿었던 그 옛날의 결정이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든 것은 그 즈음이었다.
한국 방송으로 채널을 돌린다. KBS 저녁 뉴스에도 온통 뉴욕의 사건뿐이다. 이어지는 것은 낮 익은 현지 리포터다.
“처음으로 알려진 한국 가족의 슬픈 사연입니다” 그렇게 그녀는 시작한다.
병원 앞, 줄을 이어선 사람들 사이로 한 여인이 비춰진다. 넋이 나간 듯 서있다. 그녀를 잡고 있는 것은 화장이 진한 또래의 여인이다. ‘딸을 찾으러 나왔어요’ 간밤에 꿈이 하도 좋지 않아 아침 일찍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지요. 출근 시간에 맞춰. 무슨 일 이냐는 듯이 아이가 받습디다. 별일 없니, 한 마디 했는데 갑자기 아이가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비행기가 들어와요! 커다란 비행기!’ 그리곤 전화가 끊겼어, 병원에 실려 왔겠지? 모습은 넋이 나간 것처럼 초췌했으나 말은 또박또박 이어간다. 옆에 서 있던 여인이 거든다. 이름은 ‘제인’이고 머리는 길어. 아주 검지는 않지만 검은색 피부에 키는 170이 넘어. 24살이야. 참, 안경도 끼는데. 여자의 가슴과 등엔 커다란 포스터가 붙어있다.
무성영화가 한창이던 60년대, 초등하교 운동장에선 흰 자막을 치고 영사기를 돌렸다. 변사가 읽어 주는 사연들은 왜 그리 슬펐을까. 아직 철들기도 전인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학교 운동장에서 꽤 여러 번 훌쩍거렸던 것 같다. 할머니는 청승맞다고 야단을 치셨고 엄만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라며 감쌌다. 영화가 있는 날이면 골목을 다니며 선전을 하던 방물장수. 포스터를 쓰고 골목을 돌며 목이 터져라 영화 선전을 했다. 허장강과 도금봉의 얼굴을 커다랗게 그려 넣었던 포스터, 그것처럼 만들어진 그녀의 포스터에는 아이의 얼굴 사진이 커다랗게 확대되있다. 가슴 쪽엔 영어로, 등쪽은 한국어로 쓰여진 아이에 대한 설명. 카메라가 가까이 가서 잡는다.
이름은 제인 화잍. 앳띤 얼굴, 어깨까지 덮는 흑발의 미인이다. 얼굴이 갸름하고 눈, 코가 큰 것을 보니 아주 동양 아이 같지는 않다. 미인은 늘 혼혈아에게서 더 많은 것 같다. 누구 이 아일 아시거든 연락해 주십시오. 전화(212)234-5678. 그렇게 포스터는 말하고 있다.
‘사람을 찾습니다’ 한국을 떠나가 얼마 전, 전국을 울렸던 특집. 누가 이 여인을 모르시나요, 노랫말은 기억에 가물거리지만 그땐 모두 얼마나 울었던가. 잊어버린 사람을 찾는 일, 더구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찾는 일에야 밤이 지새면 어떻고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면 어떻겠는가.
아이와 남편이 한바탕 한 것은 귀국 후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아이. 한국말 몇 자 쓰고 읽을 줄 안다고 제법 한국인 행세를 하는 아이. 동양철학을 공부해야겠단다. 엔지니어가 되야 하고, 의사가 되어야 하는 한국부모의 입장에선 길길이 뛸 수밖에. 세상이 뒤집힐 것처럼 난리를 치고, 결국 아이는 집을 나갔다.
입던 채로 아이의 주머니에는 내가 아는 한 3불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사흘 밤낮을 헤맸다. 알고 있는 친구 집 근처 골목마다 혹, 아이의 차가 서있지 않을까 기웃거렸다. 직장엔 독감에 걸려 못나간다는 핑겔 댔다. 어디에 숨었는지 머리카락 같은 흔적조차 모이지 않자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한다했다. 남편은 말렸다. 사고가 있었으면 벌써 우리에게 알려졌을 거라며. 홈레스 쉘터를 찾아 간 것은 어디에도 아이의 흔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버리고 결국 친구의 도움을 청했다. 아인 기숙사의 친구 방에 기거 하고있었다. 울며불며 찾아간 에미에게 아이는 차갑고 냉정했다. 20불 짜리 한 장을 쥐어 주며 돌아서는 캠퍼스의 숲 속은 어둡고 습했다.
어느 갤럽 조사에 의하면 중산층의 43%가 이민을 생각한다던가, 사교육비에 지친 대학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이곳에 남을 수 있다는 것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땐. 영주권을 얻고 직장생활을 하며 스스로 얼마나 대견해 했던가. 자만감에 취해 휘청이고 낡아 가는 울타리를 보지 못했다.
늦은 시간에도 전화를 건 것은 이모의 가게도 걱정이 되었지만 이제 막 신혼인 사촌이 걱정돼서다. 맨해튼 어디엔가 산다고 했는데 별일은 없는지. 오래 신호음이 간다. 신호음도 떨어지지 않고 기계로 알려주는 점 노선이 바쁘니 다음에 다시 하라는 말도 들리지 않는다. 아직 남편은 텔레비전 앞에 있다.

밤새 한잠 못 잔 것 같다. 머리가 띵한 것이 진한 커피로도 머리 속은 맑아지지 않는다. 연거푸 석 잔이나 마신다. 텔레비전에선 아직도 같은 이야기다. 이번엔 CNN에서도 병원 모습을 비춰준다. 어젯밤에 보았던 그 여인은 아직도 그 자릴 지킨다. 이젠 그 여인뿐 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포스터를 입고 섰다. 비까지 내리는 뉴욕의 거리는 폐허, 그자체인 듯하다. 각각의 사연을 안고 줄지어선 사람들. 광고가 없는 TV프로들은 장송곡 같은 무거운 음악들만 내 보낸다. TV를 끌까 싶다가도 혹 비상사태 같은 것이 터질까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슬픔과 경악과 분노와 상실감으로 마음은 엉망이다. 또 전화나 걸기로 한다. 이번엔 동부뿐만 아니라 남가주에서부터 시작이다.
모두들 무사하단다. 아침 일찍 맨해튼의 사촌과 통화가 됐다는 LA조카의 말에 한숨을 놓는다. 당분간 출근을 못하겠군. 휴간가? 기분을 띄워 보려 농담 비슷하게 건네 본다.

이모의 전화를 받은 것은 사흘 뒤다. 겨우 가계를 열었다고 했다. 길엔 먼지가 뽀얗고 응급 약을 찾으러 오는 손님 말고는 전혀 손님이 없단다. 이참에 좀 쉬지 그래요. 아니 아직은 아니야, 좀더 있다가,를 연발한다. 이야기 끝에 한국 TV를 봤는지 묻는다. 그럼 종일 켜 놓고 사는데, 지난 몇 일 동안. 그럼 제인네 이야기 봤겠네, 한다. 제인이 누구예요? 너도 알잖니? 너도 여기 오면 머리 자르러 가는 미용실 말이다. 내 단골 미용실. 우리 교회 집사이잖니. 아, 네. 딸은 찾았나요? 아니, 아직. 교회사람들이 모두 매달려 각 병원마다, 시체 보관소마다 가보지만 아직 이야.
여인은 이모에게 일일이 설명하지 않았지만 교회 사람들 모두는 그 여인이 미국에 오기 전까지는 양공주였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친정의 누구도 한번 다녀가는 적이 없으며, 미국으로 온 후론 한번도 한국을 가지 않은 여자. 흑인 남편을 따라와 텍사스 어디엔가 잠시 산 것 말고는 늘 뉴욕의 한국인 거리를 지켰던 여인. 다행히 미용 기술을 배우고, 자격증을 따고 미용실을 내며 돈을 좀 모았고, 그 남자로부터 늦게 딸까지 하나 낳아 재미있게 사는 듯 싶었다. 아인 예쁘고 똑똑해서 NYU를 장학생으로 다녔다던가. 남편은 죽은 것도 아니데 어느 날 어디론가 사라졌단다. 그래도 딸 하나 키우며 열심히 살았던 여인. 인정받는 곳은 오직 한국 교회밖에 없었으므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던 여인. 누구와 누가 교회를 옮겨도 그 여인은 늘 같은 교회를 지켰단다. 교회사람들 모두는 제인이 죽었을 거라고 믿지만 누구도 그 여인에게 그 말을 해 줄 수 없다는 것. 자식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여인의 신앙 같았을 딸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꿈의 나라, 유토피아라고 믿었다. 기회의 나라에서 열심히 살았고 지난 시간에 대해 한 번도 들추어 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가지면 잊어버리고 살수 있다고. 다행히 지구의 밤을 동아 온 곳엔 여인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없다. 바다를 건너 왔으면 다시는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던가. 스스로 한번도 옛날 이야길 해 보지 않았다.
일 주일이 넘도록 그 여인은 제인의 실종 신고를 하지 않았다. 교회에선 제인과 그 여인을 위한 기도회가 시작되었다. 백방으로 수소문 해 보아도 제인의 흔적은 없고 유전자 확인인가 해야 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서너달 후였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버틴 시간들은 맨해튼의 센트랄 팍으로 늦가을이란 이름을 달고 온다. 한 맺힌 뉴욕 사람들의 아픔을 아는 것처럼 공원은 치자 빛으로 물들고 계절의 끝으론 참 바람 가슴으로 들어 분다. 소문은 늘 날개를 달고 다니는 것이라지 만 여인은 행려자가 되어 겨울의 맨해튼을 떠돈다고 한다. 교회 사람들도 말리고 돌보아 주다 지쳐 이젠 영락없는 거지가 되었단다. 사진의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포스터를 가슴 앞과 뒤에 진 것만은 여전하단다. 교회의 지인 들도 잘 못 알아보고 횡설수설하는 여인. 늘 ‘제인아, 제인, 제인’ 이름만 부르고 다닌다던가.
오랜만에 전자 메일을 살펴본다.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사를 사는 중에 컴퓨터의 고장이 있었다. 직장에서 아쉬운 데로 쓸 수 있었으므로, 한국말을 사용하는 개인 구좌는 소홀히 했다. 열 댓 토의 메일이 왔다. 그 중 하나, 눈에 띤 것은 너무도 오랜만인 친구의 소식이었다. 그가 떠났던 것은 지난 봄이었다.

<맨해튼에서 부치는 편지>
오늘 이 시간 좀 다른 상황에서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길 원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친구들이 아는 것처럼 난, 세계 무역회관 제 1청사(안테나가 높게 서 있는 건물) 38층의 리만 브라더스에 다니고 있습니다. 아침 6시 35분부터 미팅 때문에 사무실에 있었지요. 물론 난 그 시간, 건물 안에 있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내게 그 당시의 상황을 물어와, 여러분들 모두에게이 메일로 나의 상황을 알리고자 편지를 씁니다. 전 어떤 상처도 입지 않고 살아있습니다. 현장에 있었던 이만 명 중의 한 사람으로 당시의 상황을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첫째로, 이 사건으로 오늘은, 지금까지의 내 생애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날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살면서 절대로 보고싶지 않았을 사건 현장에 있게된 것이지요.
화요일 아침, 같은 건물 내 다른 층에 있는 메리얼사의 직원들과 미팅을 마치고 막 돌아왔습니다.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10 여분쯤 되었을까, 커다란 굉음이 들렸고 첫 번째 공격을 느꼈습니다. 천둥치듯 화약고가 터지는 것 같은 소리와 건물이 휘청거리며 밀쳐졌다가 그네처럼 제자리로 돌아오는 듯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내 어깨를 꽉 잡고 전후로 몇 번 흔드는 듯한 느낌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난 몇 미터 앞에 있는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고있었습니다. 동시에 종이부스러기들과 산산조각이 난 기계들과 철제들이 비오듯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번개처럼 스쳐 가는 내 생각은 빌딩의 위 부분 어딘 가에서 가스관이 터졌거나 작은 비행기나 헬리콥터가 빌딩 꼭대기에 부딪힌 줄 알았습니다. 창 가까이 다가 가 무슨 일인가 살펴보려다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아, 바로 눈앞에 있던 책상 위의 지갑과 열쇠 꾸러미, 손 컴퓨터를 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비상구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이상한 것은 동료들 중 어느 누구도 비상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태는 한번도 없었으니까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난 38층에 있었습니다. 20분쯤 걸려서 건물의 아래 층까지 거의 내려 올 수 있었습니다. 비상계단은 겨우 두 사람이 서로 지나칠 수 있을 정도로 좁았고, 매 층에서 합세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한 20층 정도에서 우리는 연기가 자욱 해짐을 보았습니다. 9층 정도에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며 위로 올라가는 소방수들과 마주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층에는 이미 물이 가득 고여 작은 강을 건너는 것 같았습니다. 계속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이때까지 어느 누구도 무슨 일인지 몰랐습니다. 그냥 아래로, 아래로만 내려 갈 뿐. 한꺼번에 아래로 내려가려는 사람들 때문에 비상구의 열기가 점점 더 해졌습니다. 당황하여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위기를 탈출하려는 우리들에게 불안감을 가중시켰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래층에 있었던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상황판단이 안되었고, 고층에 있었던 사람들은 피할 시간조차 없었던 것 같습니다. 거의 비상계단을 빠져 나왔을 땐(아직 건물 안쪽이었음) 건물의 바깥인 분수대 쪽에서 자욱한 연기와 활활 타오르는 화염을 보았습니다. 완전히 빠져 나왔을 때, 자갈을 쏟아 붙는 듯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커다란 유리 창 밖으로 산산조각이 난 유리창 파편들과 휴지처럼 찢긴 건물조각들,뒤 틀린 철제덩이들이 우박처럼 내리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빌딩사이에 있었던 다리 쪽으로 가지 말라고 알려주었더라면 그 처참한 장면들을 목격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우리들에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걷고 뛰어 하이웨이 건너편에 다 달았습니다. 살면서,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던 처참한 광경들, 찢겨진 시체들과 구겨진 건물의 잔해들...80층에서 떨어지는 시체들도 보아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모든 광경을 그대로 보아야했습니다. 우리는 뛰다시피 빌딩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강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제야 한 번 건물을 돌아다 볼 수 있었습니다. 이때까지도 난 세계무역회관 제2 청사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강가에 다다랐을 때야 귀동냥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중의 하나인 이 건물이 화염에 쌓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순간, 난 그 건물을 빠져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며 안도의 숨을 쉬었습니다. 이 얼마나 이기적인 마음입니까?
멍청한 상태로 난 계속 맨해튼 서쪽에 있는 강변로를 따라 걸어갔습니다. 메린린취에서 일하는 친구 하날 만났고 계속해서 걸어가며 다른 이야길 좀 해보려 했습니다만...말이 이어지지 않았고 난 그의 셀루라 폰을 빌려서 가족에게 전화를 걸려했습니다.(어느 가족이 놀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셀루라 폰을 몇 번 시도했으나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난 다시 뒤를 돌아보며 세계무역회관 제1청사의 파괴현장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도 난 제2청사가 무너진 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계속 걸어 1/3 마일쯤 왔을까, 지나는 사람들의 공황에 가까운 외침을 들으며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고 그때야 난 제2 청사가 눈앞에서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굉장한 위력의 폭탄이 터져 건물이 폭삭 주저앉았다고 했습니다. 집 쪽으로 계속 걸었습니다. 그냥 걸었습니다.
6가와 7가 사이 크리스토퍼와 서쪽 4가 근처에서 난 브라이언과 작별을 하고 동쪽으로 돌아 맨해튼의 그린니취 빌리지 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허드슨 거리에서 잠시 멈추어 사람들과 함께 차에서 나오는 라디오 뉴스를 들었습니다. 거리로 나와 있던 사람들은 내 몰골을 보고 의사를 보거나 병원에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난, 그들의 걱정을 뒤로 한 채 계속 아파트를 향해 걸었습니다.
블리커와 7가 쯤에서 한 그룹의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건물 쪽을 쳐다보며 괴성같은 소리로 탄식했습니다. 무슨 일인가 물어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말해주기를 세계무역회관 쌍둥이 건물이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때쯤 우리 아파트의 매니저인 애나가 거리로 뛰어 나왔습니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얻고 겨우 걸어 아파트로 들어갔습니다.
아파트에 들어와 조금 정신을 차리고 전화번호를 눌러보았지만 역시 집 전화도 불통이었습니다. 다시 밖으로 나왔는데 6가 쪽에서 옆자리에 일하던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남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잿빛 연기와 화염에 쌓인 스카이라인. 어디에 뭐가 있었고, 뭐가 없어졌는지 분간키 어려웠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그와 헤어지면서, “내일 만나....”라고 인사하려다가, 머뭇거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그리고 잘 가” 라고 인사하며, 내일이 아닌 다시 만날 때까지라는 단어를 쓰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데 세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난 몇 시간동안 저를 염려하셨을 가족과 친지. 친구들에게 미안하지만, 제가 다시 컴퓨터 앞에서 글을 써서 여러분들에게 제 안부를 전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했습니다.
저는 안전합니다. 아직 전화는 불통입니다. 다만 가슴이 심히 벌렁거리고 손이 심하게 떨립니다.
서로의 평화를 빌며.
맨해튼에서 비엔비 드림.

친구를 까맣게 있고 있었던 것은 그가 뉴욕으로 이사를 간 후엔 한번의 연락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도착 후 한 두 번은 연락했지만 그의 소식은 전무했다. 그런 그가 이 메일로, 그것도 사건 이후의 근황을 알려 오다니. 답을 할까 하다가 그만 두기로 한 것은 시간이 너무 지나서였다.
연휴가 되자, 아이가 다녀가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문득 그 여인의 소식이 궁금하다. 아직 계절이 바뀐 맨해튼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혹 정신 병원이나 행려자 수용소 같은 데로 끌려간 것은 아닐까. 딸의 소식은 알았을까. 유전자 감식을 받을 수 있는 작은 증거나 지푸라기 같은 제인의 소지품 같은 것이라도 찾았을까.
“누구, 이 아일 아시나요?”
“누구, 모르시나요, 내 딸, 제인?”
“누가 이 아일 모르시나요?” 메아리 되어 오랫동안 남을 것 같다.


(재외동포 문학상,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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