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de Orange(오렌지색 경고)

2003.03.18 01:36

전지은 조회 수:737 추천:52

오렌지색 경고

오렌지색은 조금 차가운 색감의 노랑과, 정열 그 자체로 대변되는 빨강의 중간쯤으로 보는 이에게 따듯한 감을 준다. 무채색에 익숙해진 나 같은 사람은 큰마음 먹지 않고는 입을 수 없는 색깔이기도 하다.
주일의 일과는 늦잠에서 일어나 동네 한바퀴를 돌고 산 넘어 성당을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미사 후에는 한국 마켙에 들려 일주일분의 한국음식을 사고, 일주일분의 비디오 테이프를 빌리고, 또 소소하게 필요한 것들을 사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중 가장 들리기 싫어하는 곳은 전자제품 판매소이지만 남편과 내가 함께 뚤뚤 거리지 않고 돌아 볼 수 있는 곳은 그래도 홈디포 아닌가싶다. 새로 부엌을 고쳐볼까 궁리해 보기도 하고 올 봄 화단은 어떻게 바꾸어 볼까 생각하며 혼자 웃음을 지어 보기도하고 계절에 따라 바뀌는 물건의 진열대 앞에서 혼자 모든 것을 장식하고 바꿔 보는 상상의 나래를 펴는 즐거움. 오렌지색 앞치마를 두른 건장한 청년도 나이가 지긋해 경험이 많을 것 같은 아저씨도 묻는 것을 가르쳐주기에 무척 친절하다.
이번 주말도 예외 없이 매장 전체를 기웃거려 볼 참이었다.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응급용품 전시대였다. 예전에도 그곳에 그 전시품들이 있었던가. 호객행위를 하기에 충분하게 배너를 붙여 놓고 각각의 용품들에 대한 설명도 잊지 않고 있다.
엊그제 저녁 로컬 뉴스에서 각 슈퍼마켓의 덕테잎과 비닐이 동이 났다는 소식을 들으며 본토에서 한번도 전쟁을 치러 보지 못한 참으로 우매한 미국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 무지와 짧은 소견 탓도 있겠지만 덕테잎과 비닐로 막아질 수 있는 생화학전이라면 그들은 아예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9.11의 엄청난 아픔을 겪었던 유족들이 사고의 현장과 유엔 본부 앞에 모여 반전데모를 벌린다. 오랜 역사를 지녀 고리타분할 것 같고 보수주의적이어야 할 것 같은 유럽이 새롭고 참신한 유럽을 내세우며 대대적인 반전운동을 펼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사람들은 모여 '평화'를 외친다. 월남전 때의 반전 가수, 존 바이에즈가 60이 넘은 나이에도 예의의 상징인 긴 머플러를 두르고 나와 열창을 하고 아이는 전장에 나가는 군인처럼 비장의 준비를 하고 사진기를 들고 현장으로 갔다.
병원의 절친한 친구의 외아들이 삼 주일 전 징집되었다. 지난 수요일, 해병대로 불려간 그는 지금 20 살, 아직 어머니에게 "마미"라고 부르는 청년, 아니 내겐 아직 내 아들처럼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이다. 전세계를 여행해 보고 싶었던 18세의 청년은 3000불 싸인 업 캐쉬 보너스란 말에 본인의 상황을 상세히 적어주고 말았다던가. 그땐 이 빠른 징집을 예기치 못했을 것이고 중고차 한대를 살 수 있었던 3000불은 고3의 청년에겐 큰돈이었을 것이다. 우선은 미국 내 어디서 훈련만 받겠지, 가능하면 오랫동안 훈련만 받았으면 내심 기도해본다.
병원 게시판 곳곳에 붙어 있는 '천연두 백신을 거부하자'라는 캠페인을 보면서, 지금까지 핍박받은 것도 모자라 무고한 목숨들이 총받이가 될 것이 뻔한 일에 동참할 수 없어서 거리로 나왔다는 뉴욕의 어느 중년 여인을 보면서, 아버지가 끝내지 못한 일을 아들이 끝내고자 수만의 무고한 시민과 우리들의 아들들을 전쟁터로 내 몰수는 없다는 남가주의 어느 여인을 보면서, 전쟁은 과연 세계인이 바라는 바일까, 부시 대통령이 진행중인 전쟁하기를 원하는 미국인의 지지율이 70%를 육박한다는 것은 과연 맞는 통계일까, 생각해본다.
두 달 전이었던가, 전 가족이 회교도인 아랍 계의 환자가 입원을 했었다. 심장이 좋지 않아 수술을 받았고 수술 후 병세 또한 좋지 않아 오랫동안 중환자실 신세를 져야했다. 그를 수술했던 집도의는 손이 빠르고 능숙한 유대인이었다. 마취의사는 인도에서 태어난 불교를 믿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의 주치의는 일년에 두 번 부활과 크리스마스 때 만 교회를 간다면 웃는 백인 의사였다. 한동안 그를 간호했던 난 사춘기 때 개종을 한 가톨릭. 난 늘 손에 묵주반지를 끼고 있고 병실의 창가엔 다른 병실들과 마찬가지로 십자가가 걸려있었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그의 가족들은 알록달록한 문구들을 적어와 침상 가에 걸거나 주문 같은 것을 외웠다. 누구라도 그들의 기도 시간에 그 자리에 함께 있게되면 조용히 머리 숙여 함께 기도했다. 같은 시간에도 CNN이나 FOX뉴스에선 오렌지색 경고를 서슴지 않았지만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그가 아랍계통의 사람이라는 핑계로 치료와 간호를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그가 위 층 일반 병동으로 올라가던 날, 병원신부님의 주선으로 우린 모두 서로 손을 잡고 침묵의 시간을 갖았다.
경고는 노란색으로 돌아가 다행인가 싶더니 매스컴들은 다시 전쟁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손과 손에서 전해졌던 따스함으로 더 이상 경고가 필요 없는 세계의 평화를 지킬 수는 정녕 없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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