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

2003.03.18 01:37

전지은 조회 수:566 추천:46

봄비가 내린 아침은 상큼하다. 매일 변하는 주홍과 분홍 중간색쯤인 하늘을 바라보며 오늘도 이른 출근을 한다. 그러나 건물 안의 웅성거림은 늘 이별을 준비하는 이들의 아픔이 기다린다. 아무리 천수를 누린 호상이라 하더라도 헤어짐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허둥거리게 마련이다.
환자 명단에서 그분의 이름을 보았다. 가슴이 쿵 떨어진다. 마디마디 단단한 매듭으로 엮어 있었을 힘들었던 여정, 이젠 편하게 풀어놓으시고 좋은 곳으로 가시려나, 생각이 든다. 중환자실로 이어지는 복도에 가득한 낯익은 얼굴들, 손잡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도 하고 작지만 감사한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도 함께 한다. 천상병 시인의 싯귀처럼 '세상에서의 소풍 끝내시고 돌아가시는 길'이 평화롭길 빌며. 그곳에선 한평생 그리워 하셨을 낭군을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사시라는 말도 마지막 순간에 드려본다.
바쁠 땐 까마득히 잊고 살다가도 어르신들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서면 꼭 다시 생각나는 것은 오래 전 돌아가신 시어머님의 말씀이시다. "잘살아야한다. 건강하고 재미있게. 어디서 누굴 모시고 살더라도 내 아들이 잘 사는 일이니 난 괜찮다." 신혼여행에서 막 돌아와 빨강치마 연두 저고리 차림으로 큰절을 올리고 나자 해 주셨던 한 말씀. 철들지 못한 어린 신부였어도 그 말씀은 한없이 고마웠다. 홀어머니의 무남독녀였던 며느리의 입장을 선선히 먼저 챙겨 주신 가슴이 넓으셨던 분.
기억하거니와 대학 일 학년의 재미로 해보았던 미팅에서도, 친지의 소개로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도, 제일 먼저 알아보는 것은, 그가 장남인지 외아들인지 하는 것이었다. 그 조건에 부합되는 사람이면 아무리 애프터를 나가고 싶었어도, 조건이 좋았어도 두 번을 만나지 않았다. 그런 계산으로만 본다면 남편은 최상이었다고 나 할까. 만남이 길어지고 양가의 소개가 되었을 때도 연애를 했다는 것만으로 친정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설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무기는 그가 지체라는 것이었다. 암묵적인 약속처럼 신혼여행에서 돌아왔었어도, 아이가 생겼어도 따로 살림을 나지 않았다. 유학을 준비한다는 핑곌 대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해 주신 그 한마디의 커다란 빽을 믿고 난 거의 시집살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명절 때도 시댁에서 하룻밤 지내기가 무섭게 남편과 함께 친정으로 돌아갔다. 그때도 어머님께선 그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어머니, 너희들 기다리시겠다. 빨리 가라.' 미국에 살았던 지난 20년 세월은 바다가 멀다는 이유로 전화 한 통이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다.
당신의 거동이 불편해 지실 만큼 편찮으셨어도 생업을 접어두고 가 뵌다거나 모시고 살며 좀 도와 드렸어야 한다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유는 늘 미국 생활이 바빠서, 아이 학교와 내 직장 때문이었다. 위독하신 것 같다는 시동생의 전화를 받고도 남편만 혼자 비행기를 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떤 경우가 되었다 하더라도 함께 갔어야했다. 철들지 못했던 생활의 각박함은 이제 후회와 아픔만을 가져다준다. 지난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다른 이웃과 지인 들의 경조사를 보면서 많은 후회를 한다.
내 친정어머니가 편찮으셨다면 그렇게 남의 집 불 구경하듯 남편만 덜렁 보냈을까. 생업을 접고라도 한걸음에 달려갔을 것이다. 당신의 너른 마음을 깨닫지 못했던 스무 해가 넘는 며느리라는 이 자리. 며느리도 어느 집에선 딸이었다. 그리고 그 딸이 며느리가 되었다는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아니면 모른척했었을까.
퇴근길, 봄비가 왔던 탓인가 병원 마당가엔 분홍과 흰색의 며느리밥풀 꽃이 한 뭉터기 피었다. 산야지 초원도 아니고 개화기인 늦여름도 아닌 때에 핀 들꽃은 용케도 눈에 띄었다. 시어머니의 학대에 못 이겨 입에 밥알을 물고 죽어간 며느리의 무덤에서 난 꽃이라던가, 며느리 노릇 한번 해 보지 못했던 시간들이 후회의 눈물이 되어 꽃 속으로 떨어진다.
잡초로 구분되었을 들꽃들은 정원사에 의해 며칠 후 뿌리 채 사라졌다. 흙이 파인 자리가 마당의 새 살처럼 뽀얗게 덮여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6 인터넷 유감 전지은 2004.08.24 769
15 은둔 전지은 2003.12.15 747
14 Code Orange(오렌지색 경고) 전지은 2003.03.18 737
13 건망증 전지은 2003.10.21 663
12 무지개는 서쪽 언덕에도 뜬다 전지은 2003.07.13 644
11 탈(脫), 캘리포니아 전지은 2003.12.15 608
10 목타는 도시 전지은 2002.11.17 606
» 며느리 전지은 2003.03.18 566
8 나의 피리 전지은 2003.07.13 548
7 인디언 마을 가는 길 전지은 2003.07.13 520
6 초가을 향연 전지은 2003.10.21 516
5 경숙의 출판 기념회 전지은 2003.08.07 488
4 Re..누가 이 아일 모르시나요? 전지은 2002.11.19 454
3 Re..슬픈 아침 전지은 2003.03.21 452
2 가부장제(家父長制), 안되나요? 전지은 2003.06.20 383
1 장애인 시대 전지은 2003.05.22 353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0
전체:
22,474